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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화 6장. 혼자 걷는 자, 독행류(獨行流)(2)
“오늘은 이곳에서 노숙을 해야겠네요.”
방진보의 말에 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두른다고 했는데도 어느새 사위에 어둠이 거뭇거뭇 내리고 있었다.
방진보는 이제 담호가 따로 말하지 않아도 능숙하게 노숙을 준비할 줄 알았다.
커다란 바위 밑 움푹 파인 공간에 모닥불을 피우고, 식사를 준비했다. 간단한 건량으로 식사해도 상관없을 텐데 방진보는 기어이 솥을 걸고 근처 샘에서 물을 길어 왔다.
그사이 담호는 눈을 감고 명상을 했다.
그동안 담호는 많은 싸움을 해왔다. 신강은 물론이고 중원에 들어와서도 계속해서 싸워 왔다. 아마 담호만큼 짧은 시간 동안 많이 싸운 이는 없을 것이다.
연이어 계속된 싸움은 그의 실전 감각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아울러 암형권의 보완점도 보이기 시작했다.
그가 어둠 속에서 만들어 낸 암형권은 분명 파괴적이었다. 아마 일대일인 싸움에서 암형권만큼 파괴적인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수많은 싸움에서 그 사실을 확인했다. 문제는 다 대 일의 싸움이었다. 수많은 자들과 싸울 때는 암형권은 확실히 묘용이 떨어졌다.
하지만 담호는 급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틀이 확고히 잡힌 무공을 개선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공을 만들어 낸 담호라 할지라도 말이다.
담호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을 때였다.
“형, 식사하세요.”
방진보의 목소리가 그의 상념을 깨웠다.
담호는 눈을 뜨고 방진보를 바라봤다. 방진보는 어느새 그럴싸한 음식을 차려놓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헤헤!”
그동안 방진보의 음식 솜씨는 일취월장했다. 이제는 몇 가지 안 되는 재료만으로도 맛을 낼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오늘 그가 만든 것은 소고기 죽이었다. 미리 준비해 둔 소고기 육포와 말린 곡물 가루로 죽을 만든 것이다.
“수고했다.”
“아니에요. 어서 드세요, 형.”
방진보가 죽을 한 그릇 떠서 담호에게 건넸다.
산속에서 대충 만든 죽이라고 보기엔 향과 맛이 너무 뛰어났다. 담호는 방진보를 만나 호강한다고 생각했다.
담호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방진보도 숟가락을 떴다. 자신이 만들었지만 무척 맛있었다.
“헤헤! 맛있다.”
“수고했다.”
“아니에요. 그냥 대충 만든 거라서 힘들지 않았어요.”
방진보가 손사래를 쳤다. 담호는 그런 방진보의 모습을 말없이 바라봤다.
마냥 앳되기만 하던 방진보의 얼굴에도 이젠 제법 의젓한 표정이 깃들었다. 많은 경험을 쌓으면서 방진보도 그만큼 단단해졌다.
담호는 그런 방진보가 대견스러웠다.
“형,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요?”
“말하거라.”
“화산파…… 말이에요. 괜찮으시겠어요? 그들과 만나지 않고 이대로 떠나도.”
“상관없어.”
“정말요? 형, 화산파의 제자셨다면서요?”
“과거의 이야기다.”
담호가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악양검문의 사건이 있은 후 한소유는 담호를 찾아왔었다. 하지만 담호는 한소유를 만나지 않았다.
이미 끊어진 인연이었다. 그나마 사부 때문에 한 줄기 인연의 끈이 유지되고 있었지만, 그것은 언제 끊어질지 모를 만큼 가늘었다.
“언젠가는 화산에 들러야겠지. 하지만 그것이 꼭 지금일 필요는 없어.”
한소유는 분명 현소 진인이 잘 지낸다고 했다.
그거면 충분했다. 당분간은 화산파에 신경을 쓰지 않을 이유로 넘치고 찼다.
“그럼 화산파엔 가지 않으실 건가요?”
“당장은.”
“에효!”
“아쉬우냐?”
“화산의 경치가 일품이라면서요? 꼭 한 번은 가 보고 싶었어요.”
“언젠가는 갈 수 있을 거다.”
“그때 꼭 데려가 주셔야 해요.”
“그래!”
담호가 담담히 대답했다.
방진보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만 자거라. 내일 일찍 출발하려면 체력을 충분히 비축해놔야 한다.”
“예!”
방진보가 씩씩하게 대답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오랜만의 강행군이 피곤했는지 방진보는 금세 수마에 잠식되었다.
담호는 잠이 든 방진보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다음 날 두 사람은 새벽 일찍 노숙지를 떠났다.
산을 내려가는 길은 그리 힘들지 않았다. 말을 타고도 내려갈 수 있을 정도로 완만했기에 편히 내려올 수 있었다.
“휴!”
산을 내려와 조그만 개울가에 도착하자 방진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말을 타고 산을 내려오는 것은 꽤나 체력이 많이 소모되었다. 불과 반나절을 말을 탔을 뿐인데 살은 족히 서너 근은 빠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방진보는 잠시 말에서 내려 세수를 했다. 찬물로 세수를 하자 정신이 번쩍 들면서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시원하다.”
방진보가 환히 웃었다.
더위가 가시자 주위를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그들의 눈앞으로 광활한 논밭이 펼쳐져 있었다. 논밭을 가득 채운 벼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은 무척이나 장관이었다.
“우와!”
방진보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는 단 한 번도 이렇게 벼가 가득한 평야를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담호도 마찬가지였다.
곳곳에서 논밭을 관리하고 있는 농부들의 모습이 보였다. 바지춤을 허리까지 걷어 올린 채 잡초를 뽑고 있는 농부들의 모습은 담호에게 묘한 감흥을 안겨 주었다.
“하하하!”
그들의 웃음소리가 이곳까지 들려왔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 것일까? 그들은 한시도 쉬지 않고 떠들었고, 입가엔 미소가 가득했다.
이마와 턱을 따라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지만 누구 한 명 피곤하다고 투덜거리는 법이 없었다.
담호와 방진보는 한동안 말없이 농부들의 모습을 지켜봤다. 이곳은 이제까지 그들이 경험했던 거친 세계와 다른 세상이었다.
아낙들이 광주리를 이마에 이고 걸어왔다.
“새참 들고 일하세요.”
아낙들이 큰 목소리로 일하는 지아비와 자식들을 불렀다.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일하던 농부들은 웃으며 아낙들을 향해 걸어갔다.
문득 중년의 농부 한 명이 담호와 방진보를 발견했는지 이쪽을 바라봤다. 잠시 두 사람을 바라보던 농부가 휘적휘적 다가왔다.
“처음 보시는 분들이구려. 저 산을 넘어오셨소?”
“예! 저희들은 호남성에서 왔어요.”
방진보가 대답했다.
농부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래? 먼 길을 왔구나. 배고프지 않느냐?”
“헤헤! 배고파요.”
방진보가 넉살좋게 웃었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농부가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담호를 바라봤다.
“괜찮으시다면 같이 드시겠소? 차린 것은 별로 없지만.”
“괜찮소.”
“저 아이는 아닌 것 같은데.”
담호의 말에 농부가 방진보를 가리켰다.
방진보는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으로 담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엔 간절한 빛이 가득했다.
‘형, 제발요.’
음식 앞에서는 한없이 약해지는 방진보였다.
그의 간절한 바람에 담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폐가 되지 않는다면…….”
“폐가 될 게 무에 있겠소? 어차피 남는 음식인데.”
농부가 두 사람을 커다란 나무 아래로 데려갔다. 나무 아래에는 포대기로 아이를 등에 업은 중년의 아낙이 보자기를 펼치고 있었다.
보자기 안 쟁반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감자와 집에서 직접 담은 술이 담긴 주전자가 있었다.
“여보, 시장하시죠?”
아낙이 농부를 반가이 맞아 주다 말고 담호와 방진보를 바라봤다. 낯선 사람이 함께 있으니 이상한 것이다.
그러자 농부가 퉁명스레 말했다.
“지나가시던 분들이야. 혼자 먹는 것보다 여럿이 먹는 게 더 맛있잖아.”
“이이가 또?”
아낙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의 반응을 보니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닌 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아낙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감자밖에 없지만 같이 드세요.”
부창부수라더니, 그녀도 남편처럼 타인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하는 듯했다.
“감사해요.”
방진보는 사양하는 법 없이 넙죽 인사를 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에 아낙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담호도 방진보의 옆에 털썩 앉았다.
농부는 커다란 감자를 집어 담호에게 건네주었다.
“드시구려.”
“고맙소.”
“별말씀을. 감자야 많으니까.”
농부는 퉁명스레 말하며 감자를 먹기 시작했다. 그런 농부의 모습에 아낙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참으로 정이 많은 남편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냥 보내지 못하고, 이렇게 감자 한쪽이라도 꼭 먹여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미련하다 할 만도 하지만 아낙은 그런 남편이 좋았다. 넉넉한 마음 씀씀이와 자상한 마음이.
농부가 주전자를 들며 담호에게 말했다.
“집에서 담근 술인데 드시겠소? 맛은 없어도 갈증을 푸는 덴 그만일 거요.”
농부는 담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사발 가득 술을 따라 준 후 자신의 사발에도 가득 따랐다. 그러곤 바로 벌컥벌컥 마셨다.
“크으! 좋다.”
입가에 흐르는 술을 닦으며 농부가 미소를 지었다. 술을 어찌나 맛있게 마시는지 방진보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농부가 그런 방진보를 보며 물었다.
“왜 마시고 싶으냐?”
“예!”
“술은 어른이 된 다음에 마셔도 늦지 않는다. 고추에 털이 나거든 마시거라.”
“예!”
방진보가 금세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감자를 맛있게 먹었기에 아쉬움을 뒤로 할 수 있었다.
담호도 감자를 맛있게 먹었다. 소금 간도 되어 있지 않은 투박한 음식이었지만 아낙이 농부를 위하는 마음이 그대로 녹아 있는 것 같아서 더 맛있게 느껴졌다.
아낙은 제자리에 쪼그려 앉아서 담호와 방진보를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한눈에 봐도 담호가 보통 사람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행색이나 분위기가 이제까지 봐 온 여행객들과는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다.
아낙이 호기심에 물었다.
“그런데 어디로 가시는 건가요?”
“딱히 목적지는 없소.”
“그럼 유랑을 하시는 건가요?”
“그렇소.”
담호의 대답에 아낙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 그녀의 얼굴엔 부럽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이곳에서 태어나 이곳의 남자와 혼인했다.
그녀에게 세상은 이곳뿐이었다. 그래서 바깥세상에 대한 동경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자유롭게 천하를 주유하는 사람들을 보면 부러울 때가 많았다.
“많이 돌아다니셨나요? 어떤 곳에 제일 아름다웠나요?”
“어허! 이 사람이…….”
농부가 혀를 차자 아낙이 살짝 고개를 움츠렸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 어린 호기심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담호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내가 본 풍경 중에서는 화산이 제일이었소.”
“화산이라면 섬서성에 있는?”
“그렇소.”
“정말 화산이 그렇게 아름다운가요?”
“내가 본 풍경 중에서는…….”
“화산의 어떤 풍경이 그렇게 아름다운가요?”
“글쎄…….”
담호가 기억을 더듬었다.
“화산은 바위로 이뤄진 암산, 백척협, 천척당으로 대변되는 수직에 가까운 돌계단을 오르다 보면 땀이 비 오듯 쏟아지지. 하지만 그곳을 넘어서면 용의 등뼈를 닮은 포룡령이 보이고, 그 너머에는 연화봉이 존재하오. 연화봉은 해가 질 때가 가장 아름답지. 노을이 일품이거든. 조양대로 가면 매화가 일품이지. 봄바람에 실려 오는 매화향은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지. 매화가 질 때면 화산 전체가 매화 잎으로 새하얗게 물들지.”
자신도 모르게 말이 술술 나왔다.
천금마옥에 홀로 갇혔을 때부터 떠오르지 않은 기억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운대봉의 조그만 모옥, 그곳에서 바라본 화산의 전경, 그리고 사부와 함께 있던 자신의 모습.
조그만 주먹으로 바위를 깨고자 그토록 노력하던 자신의 어린 시절 기억이 해일이 되어 머릿속을 휩쓸고 지나갔다.
담호의 눈빛이 깊이 침잠됐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화산의 모습이 그렇게 기억 속에서 되살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