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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118화 (118/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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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화 6장. 혼자 걷는 자, 독행류(獨行流)(3)

화산에 노을이 지고 있었다.

연화봉 정상의 상궁에서는 온통 붉게 물든 화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노을이 지면서 화산 곳곳에 등불이 환하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운대봉 정상의 진무궁, 산 중턱에 있는 금천궁, 보현궁에도 등불이 걸렸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아름다웠지만 현천 진인은 그런 감흥을 느낄 수가 없었다.

“지금 무어라 했느냐?”

벼락이 떨어져도 흔들릴 것 같지 않던 그의 얼굴에 균열이 갔다.

그의 앞에는 무경과 운경이 앉아 있었다.

무경의 표정 역시 현천 진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항사 여유롭던 그의 얼굴은 경직이 되어 있었다.

현천 진인의 물음에 운경이 차분히 대답했다.

“천경이 권마라 합니다.”

“권마가 천경이라고?”

“그렇습니다.”

“잘못 들은 것 아니냐?”

“확실합니다. 현무 사숙이 그렇게 전서를 보내오셨고, 천하에 떠도는 소문도 그러하니까요.”

“으음!”

현천 진인의 입에서 절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그의 얼굴엔 곤혹스러운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평소 자신의 감정을 감추는 데 능숙한 그가 이 정도로 동요를 드러내는 것은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만큼 운경이 말한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비록 화산에서 은거하다시피 하고 있는 현천 진인이었지만 외부의 정보만큼은 민감하게 수집하고 있었다.

권마(拳魔).

당금 강호를 쩌렁쩌렁하게 울리고 있는 고수였다. 단순히 신진 고수라고 치부하기에 그가 쌓아 온 악명과 위명은 결코 가볍지가 않았다.

강호에서는 그를 이미 절대의 반열에 든 고수로 취급을 하고 있었다. 화산파의 장문인인 현천 진인보다도 오히려 더 높게 평가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고수가 화산파 출신이라니? 그것도 절름발이라고 모두에게 외면을 받았던 천경이다.

쉽기 믿기 힘든 사실이었다.

현천 진인은 입안이 텁텁해짐을 느꼈다.

그사이 운경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가 처음 모습을 보인 곳이 신강입니다. 일전에 저희가 마교를 추적해 갔던 천금마옥이 있는 곳입니다. 그는 천경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천금마옥에 버리고 갔던…….”

“크음!”

이번엔 무경이 침음성을 흘렸다.

그의 얼굴은 현천 진인보다 더욱 처참했다.

그날 천경을 버리기로 결정한 이는 바로 무경이었다. 그 때문에 몇 년이나 죄책감에 시달렸었다. 이제야 겨우 죄책감을 떨쳐 버렸는데 천경에 관한 소식을 들으니 다시금 악몽이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그래! 그가 천경이라고 치자. 그런데 화산파의 제자임을 부정했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감히!”

현천 진인의 얼굴에 노기가 떠올랐다.

한평생 화산파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친 현천 진인이었다. 그에게 화산파는 인생의 모든 것이었다. 그 어떤 가치도 화산파보다 소중하지는 않았다.

그런 그에게 화산파를 부정한 담호란 존재는 결코 곱게 보이지 않았다.

운경이 그런 현천 진인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운경은 담호가 화산파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거기엔 자신도 할 말이 없었다. 일찍 무공을 포기하는 것이 담호를 위하는 일이라 판단하여 사정없이 독설을 퍼부었으니까.

“그래서 천경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악양을 떠난 것 같은데 아직 행방이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

“으음!”

현천 진인이 침음성을 흘렸다.

그의 머릿속은 무척이나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마교가 역사의 전면에 재등장한 시점이다.

무림맹이 결성되었지만, 결국 화산파를 지키는 것은 스스로의 힘으로 해야 한다.

이럴 때는 한 명이라도 더 절대고수를 가지고 있는 문파가 생존에 유리했다. 현천 진인은 이미 수십 년 전에 그런 사실을 깨달았다.

“현소는 여전히 두문불출하고 있느냐?”

“그렇습니다.”

“현소의 거처로 가야겠다.”

“당장 말입니까?”

“그렇다.”

현천 진인이 몸을 일으켰다.

화산파의 장문인이 된 이후 좀처럼 상궁을 벗어난 적이 없던 현천 진인이었다. 그런 현천 진인이 직접 움직이는 것은 화산파에 무척이나 큰일이 일어났다는 증거였다.

현천 진인이 상궁을 벗어나 운대봉으로 향했다. 그 뒤를 무경과 운경이 따랐다.

화산파의 장문인과 대제자, 이제자가 함께 나서는 행렬은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장문인이 어디 가시는 거지?’

‘대사형과 이사형이 동행하다니. 무슨 큰일이라도 벌어진 건가?’

그들은 현천 진인 등에게 인사를 하면서도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현천 진인이 운대봉 중간에 멈춰 섰다.

“현소의 거처가 아마 이쯤이었지?”

현소 진인이 이곳에 자리를 잡은 지 벌써 수십 년이 넘어가지만 현천 진인은 단 한 번도 찾아온 적이 없었다. 당연히 정확한 위치를 모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운경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앞장섰다.

“조금 더 위쪽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네가 앞장서거라.”

“예!”

결국 운경이 앞장서 안내했다.

현소 진인의 거처로 들어가는 오솔길엔 수풀만이 무성했다. 현소 진인은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제자들은 그를 찾지 않았다.

우거진 수풀이 화산파 제자들과 현소 진인의 단절을 보여 주는 증거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운경은 기억을 더듬어 전진했다. 그렇게 한참이나 걸어 들어간 끝에 그는 조그만 모옥을 발견할 수 있었다.

화산파 장로의 거처라고 보기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하고 허름했다. 지붕은 다 무너져 가고 있었고, 벽에도 구멍이 숭숭 뚫려 있어 과연 사람이 살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현천 진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곳에 현소가 있단 말인가?’

문득 자신이 현소 진인에게 너무 무심했던 게 아닐까 하는 자책감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그가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흠흠! 현소 안에 있는가? 나 현천일세.”

“…….”

안에서는 그 어떤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현천 진인이 다시 한 번 목소리를 높였다.

“사형이 왔으니 안에 있다면 어서 나오게나.”

이번에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이 친구가…….”

결국 현천 진인이 화를 내며 모옥 안으로 들어갔다. 방문을 여는 순간 현천 진인의 표정이 변했다.

모옥 안은 텅 비어 있었다. 그 안에는 현소 진인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모옥은 무척 오래전에 버려진 듯했다.

“이럴 수가!”

현천 진인의 당혹스러운 감정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났다.

내왕이 뜸했지만 그래도 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설마 이렇게 거처를 떠나 종적을 감출 정도로 큰 상처를 입었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었다.

“사숙이…….”

“떠나신 건가?”

무경과 운경이 망연히 중얼거렸다.

그들 역시 현소 진인이 거처에 없을 줄은 몰랐다.

현소 진인의 방 안에는 용사비등한 필체로 글씨가 쓰여 있었다.

견리이불기진(見利而不其眞).

“허! 이로운 것만 보면 그 안에 담긴 진실 된 것을 보지 못한다?”

현천 진인이 탄식을 터트렸다.

화산파에 이로운 것만 보고 생각하다 보니 담호와 같은 인재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한 자신을 탓하는 말 같았다.

현천 진인은 담호가 절름발이라는 편견에 휩싸여 그의 가능성을 무시했다.

현소 진인이 남긴 글귀는 회초리처럼 그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처음으로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경아.”

“예! 사부님.”

“사제를 찾거라. 반드시!”

“알겠습니다.”

“휴!”

현천 진인의 탄식이 바람에 흩어졌다.

더위를 식혀 주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지만, 현천 진인은 오히려 한기를 느꼈다.

농부의 이름은 장일이라고 했다.

장일은 담호와 방진보에게 하루 묵어가라고 했다. 담호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겉으로는 투박해 보이지만 기실 누구보다 정이 많은 장일이었다. 그는 쓰지 않는 빈방을 담호와 방진보에게 내줬다.

밤늦은 시간 담호가 홀로 밖으로 나왔다.

한참을 걷다 보니 어느새 야산 중턱이었다.

담호는 높은 바위 위에 서서 드넓게 펼쳐진 논밭을 바라봤다.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벼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은은한 달빛 아래 벼들이 일렁이는 모습이 꼭 파도가 치는 밤바다를 보는 것 같았다.

한동안 제자리에 서서 논을 바라보던 담호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만 나와.”

“…….”

“끌어내 줄까?”

“나가겠습니다.”

그제야 어둠 속에서 누군가 대답했다.

숲속 커다란 나무 뒤에서 검은 그림자가 걸어 나왔다. 능라의를 입은 이십 대 중반의 훤칠한 도사였다.

젊은 도사가 담호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무량수불! 사제 명경이 사형을 뵙습니다.”

“명경?”

담호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화산파를 나온 지 십이 년이 지났지만 잊을 수 없는 이름들이 있었다. 명경도 그중 하나였다.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그가 생사지경을 헤매고 있을 때 현검 진인의 제자가 된 이가 바로 명경인데.

직접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니, 악양검문에서 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그가 명경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명경이 담호에게 다가왔다.

“사형.”

“이미 말했을 텐데. 나는 이제 화산파의 제자가 아니라고.”

“이곳에 오기 전 사저에게 이야기 들었습니다. 저는 그런 사정이 있는지 정말 몰랐습니다. 제가 사부 대신 사죄를 드리겠습니다.”

명경이 담호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담호의 눈빛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사과하려고 도독 고양이처럼 몰래 따라온 것이냐?”

“알고 계셨습니까?”

담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명경에겐 그의 침묵이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명경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담호가 악양을 떠난 직후 몰래 따라왔다.

단순한 호기심 때문도 아니었고, 담호의 말처럼 사부 대신 사과를 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담호를 처음 본 그 순간부터 피가 끓어 견딜 수가 없었다.

명경은 막연히 상상만 하던 절대 강자의 모습을 담호에게서 보았다. 강대한 무공과 사위를 압도하던 강력한 존재감.

명경이 꿈에서나 그리던 그런 모습을 담호는 수많은 고수들 앞에서 보여 주었다. 그런 담호의 모습은 명경에게 큰 자극이 되었다.

담호와 싸우고 싶었다. 그래서 사부의 무공이 최고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다.

담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명경의 투지를 느꼈기 때문이다.

“뭐하자는 거지?”

“한 수 가르쳐주십시오, 사형.”

“…….”

“사형도 궁금하지 않습니까? 현검 사부의 검이.”

“궁금하지 않아.”

“사형!”

“말했지. 나는 네 사형이 아니라고.”

“뭐, 상관없지 않습니까? 제가 어떻게 부르든. 중요한 것은 싸우겠다는 의지 아닐까요?”

명경이 투지를 불태웠다.

후웅!

그의 허리에 찬 검이 미약한 울음을 터트렸다. 검명(劍鳴)이었다.

검신일체(劍身一體)를 이뤘을 때 나타나는 현상, 즉 명경이 투지만 불태우는 애송이가 아니라는 증거였다.

담호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렇게 싸우고 싶나?”

“전 사부의 무공을 증명해야 합니다.”

스릉!

명경이 검을 뽑아 들었다.

담호의 눈빛이 더할 수 없이 차가워진 그 순간 명경이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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