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119화 7장. 인연의 끈은 예측할 수 없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1)
“쿨럭!”
명경이 피를 토했다.
선혈이 그의 가슴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명경은 웃으려 했다. 하지만 웃을 수가 없었다. 마치 구겨진 인형처럼 그는 바위 잔해에 처참하게 처박혀 있었다.
사지는 기형적으로 뒤틀려 있었고, 시린 빛을 발하던 검은 산산이 부서져 손잡이만 남아 있었다.
그나마 담호가 사정을 봐줬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담호는 무서웠다.
곁에서 지켜만 봐서는 그의 진짜 무서움을 모른다. 직접 싸워 본 자만이 그의 무서움을 실감할 수 있었다.
마치 대여섯 살짜리 어린아이가 알몸으로 호랑이 앞에 선 것 같았다.
명경은 어린아이였고, 담호는 호랑이였다. 그것도 커다란 송곳니를 가진 커다란 호랑이.
담호의 다섯 번째 주먹질에 사부에게서 받은 애검이 박살 났다. 여섯 번째 주먹질에 왼쪽 어깨가 박살 났고, 열 번째 공격에서 멱살을 잡혀 바위에 곤두박질쳤다. 그리고 의식이 끊겼다.
그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담호는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그가 사정을 봐줬다는 것을 알았다.
“크흐흐! 꼴좋구나. 명경. 기고만장하더니 겨우 이런 꼴이라니.”
사부가 전수해 준 혈매화검(血梅花劍)을 전력으로 펼치고도 담호의 옷자락 하나 베지 못했다. 그런 주제에 구무룡을 제압해 만천하에 사부의 무공을 알리겠다고 호언장담한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다.
“정말 강하구나. 살 떨리게 강해.”
명경이 입술을 질겅 깨물었다.
완패다.
변명의 여지조차 없었다.
혈매화검을 전부 펼쳤음에도 담호의 진신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적어도 그의 사부와 동급의 무인이었다.
그가 가장 존경하는 사부와.
도대체 어떻게 그런 강함을 손에 넣을 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명경이 몸을 일으켰다.
“크윽!”
온몸이 해체되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그나마 다행히 왼쪽 어깨 외에 부러진 곳은 없었다.
“그래도 사형제간의 정리가 남아 있으셨던가? 죽이지 않은 것을 보면.”
명경이 절뚝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겠구나. 돌아가자, 화산으로.”
방진보가 의아한 표정으로 담호를 바라봤다.
“형, 밤에 어디 갔다 오셨어요?”
“왜?”
“잠깐 목말라서 일어났는데 형이 보이지 않더라구요.”
“잠이 오지 않아 산책을 갔다 왔다.”
“그렇게 늦은 시간에요?”
“그래!”
담호의 대답에 방진보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지만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담호가 창밖을 바라봤다.
저 멀리 그들이 넘어온 야산이 보였다. 아마 지금쯤이면 명경이 산을 넘고 있을 것이다.
명경은 분명 강했다. 하지만 어설펐다.
그의 강함은 스스로 쟁취한 것이 아닌 현검 진인이 만들어 준 것. 반면 담호는 스스로의 힘으로 강해졌다.
지옥 밑바닥에서 악착같이 살아 나와 지금의 강함을 손에 넣었다. 강함의 밀도와 집념의 크기가 달랐다.
‘화산으로 돌아가겠지?’
화산에는 그가 있었다. 화산제일검이라 불리는 현검 진인이.
현검 진인이 어떻게 반응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라면 명경을 통해 담호의 뜻을 알게 될 것이다.
명경은 담호가 보내는 전언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담호가 일어섰다.
“가자.”
“예!”
방진보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그들은 농부 부부에게 작별을 고하고 농가를 나섰다.
꼬박 반나절을 말을 달렸는데도 민가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두 사람은 조급해하지 않았다.
그들은 노숙에 이골이 난 사람들이었다. 민가가 없으면 노숙을 하면 그뿐이었다.
서두를 것도 없고, 조급해할 이유도 없었다.
“아! 좋다.”
방진보가 주위의 풍경을 둘러보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의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불어오는 바람 속에 짙은 혈향이 담겨 있었다.
담호를 오랫동안 따라다닌 덕분에 방진보도 이제는 혈향을 구별할 줄 알았다.
“무슨?”
방진보가 놀라서 담호를 바라봤다. 하지만 담호는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전방을 향해 있었다.
“형!”
방진보가 담호가 보고 있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저 멀리서 까마귀들이 무리를 지어 선회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담호와 방진보가 그곳으로 흑귀를 몰았다.
“아!”
현장에 도착한 방진보가 눈을 크게 치떴다.
까마귀들이 선회하는 곳에 수많은 시신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피 냄새를 맡고 몰려온 늑대들이 시신의 살점을 뜯어먹고 있었다.
“무슨?”
크르르!
늑대들이 방진보를 보며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담호를 본 순간 이내 꼬리를 말며 도망갔다. 본능적으로 담호의 무서움을 알아차린 것이다.
담호가 흑귀에서 내려 시신들을 향해 걸어갔다.
늑대에게 물어뜯긴 시신들의 상태는 무척이나 처참했다. 여기 저기 살점이 뜯겨나가고, 뼈가 드러났다. 어떤 시신은 내장이 모조리 흘러나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삼각형의 깃발이 찢겨져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사람들의 피와 살점으로 더럽혀져 있었지만 방진보는 어렵지 않게 깃발에 적혀 있는 글자를 알아볼 수 있었다.
“대운표국(大運鏢局)? 표사들인가 봐요?”
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는 표국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중원은 넓고, 표국은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았으니까.
“표사들이 늑대들에게 당한 건가요?”
“아니, 사람에게 당했다.”
늑대들이 물어뜯은 상처는 겨우 피륙에 생채기를 낸 것에 불과했다. 진짜 이들을 죽인 상처는 그 안에 숨겨져 있었다.
‘예리한 기운에 심맥이 모조리 잘려 나갔다.’
날붙이로는 이렇게 심맥만 정묘하게 잘라 낼 수 없었다.
고수였다. 그것도 자신의 기운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수준의.
이 정도 수준에 이른 무인은 결코 흔치 않았다.
담호가 일어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의 이십여 명이나 되는 표사들이 죽어 있었다. 담호는 그들의 위치와 누워 있는 자세, 그리고 상흔을 차례로 살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단 일 검에…… 죽인 건가?’
믿기 힘든 말이었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스무 명을 죽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담호도 마음만 먹으면 단숨에 죽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일 검에, 그것도 심맥만을 베어 죽인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이들을 죽인 자의 내공 운용은 상상 이상으로 정묘했다. 담호는 이 정도로 검기와 내공을 세밀하게 운용할 수 있는 무인을 아직 본 적이 없었다.
“이곳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방진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담호가 흑귀에 올라탔다.
“가자.”
“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그들과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굳이 관심을 가지고 파헤칠 이유가 없었다.
두 사람은 시신들이 널브러져 있는 곳을 떠나 말을 달렸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저 멀리 구궁산이 보였다.
구궁산은 통산현 경내에 위치한 산으로 높이가 오백여 장을 넘고, 풍경이 수려해 사시사철 사람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남송의 유명한 도사인 장도청이 이 산에 아홉 개의 궁전을 세웠고, 이로 인해 구궁산으로 불린다는 전설이 있었다. 그래서 구궁산은 도교의 성지로 추앙받았다.
구궁산에는 구궁문(九宮門)이라는 문파가 존재했다.
구궁문 역시 도가의 일맥이었다. 화산파나 무당파처럼 많이 알려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일대에서 그들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구궁문의 영향을 받은 듯 통산의 분위기는 매우 차분했다. 천하가 마교의 등장과 무림맹의 창건이라는 두 가지 사건으로 떠들썩한 것과는 대조되는 반응이었다.
통산현에 들어온 두 사람은 제일 먼저 객잔을 찾았다.
길 가는 사람에게 물어서 대로변에 있는 풍천객잔을 소개받았다. 크기도 작고 허름하지만, 그래도 음식 솜씨가 일품이라는 곳이었다.
소개해 준 사람의 말처럼 풍천객잔의 겉모습은 보잘것없었다. 하지만 객잔 안에 들어간 순간 후각을 자극하는 맛있는 냄새가 느껴졌다.
“우와!”
방진보의 입이 벌어졌다.
단지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 객잔의 숙수가 진짜 실력자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어서 오세요.”
객잔 안에 들어서자마자 사십 대 초반의 아낙이 그들을 맞이했다. 푸근한 인상에 약간은 통통한 체형의 아낙의 입가에는 보는 사람들을 기분 좋게 만드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방진보가 물었다.
“방 있나요?”
“물론이에요. 며칠이나 머물 건가요?”
“우선은 하루요.”
“이 층 오른쪽 복도 끝 방으로 가면 돼요. 식사도 하실 거죠?”
“네! 여기는 어떤 음식을 제일 잘하나요?”
“남편이 사천 사람이다 보니 회곽육 같은 매운 음식을 잘해요.”
“정말요? 그럼 회과육하고 홍유두화 부탁드려요.”
“어머! 사천요리를 잘 알고 있네요?”
“헤헤! 제가 요리에 관심이 많아서요.”
두 사람은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수다를 떨었다. 두 사람의 수다는 좀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담호는 그들을 두고 이 층의 방으로 올라갔다.
주인 아낙의 성품을 알려 주기라도 하듯이 방 안은 무척이나 정갈했다.
창문을 활짝 열자 대로가 한눈에 들어왔다.
거리를 오가는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일반인에 상인, 그리고 무인까지 골고루 섞여 있었다.
무인들 중에서는 단연 도사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구궁문 소속의 도사들도 있었고, 구궁산의 영기를 느끼기 위해 천하 곳곳에서 찾아온 도사들도 있었다.
구궁산이 도가의 성역이라는 사실이 실감 나는 풍경이었다.
담호는 팔짱을 낀 채 한동안 대로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형!”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방진보가 방으로 들어왔다. 방진보의 얼굴엔 환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알고 보니 이곳 주인이 굉장한 실력을 가진 숙수시더라구요. 밤에 한가하면 주방도 보여 준다고 하셨어요.”
“그렇게 좋으냐?”
“예!”
방진보는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요리에 관련된 것이라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방진보였다. 방진보는 등에 메고 있던 주구가 담긴 봇짐을 풀었다.
“어서 내려가요. 아마 지금쯤 요리가 완성되었을 거예요.”
“음!”
담호가 방진보와 함께 일 층에 있는 식당으로 내려갔다.
시간이 조금 흘렀을 뿐인데 식당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들어왔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띈 이는 단연 한 무리의 도사들이었다.
오십 대 초반의 늙은 도사를 중심으로 일곱 명의 젊은 도사들이 모여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늙은 도사의 눈매는 무척이나 날카로웠다. 가끔씩 신광이 번뜩이는 것으로 보아 지닌바 도력이 범상치 않아 보였다.
하지만 담호는 이내 그에 대한 관심을 껐다.
도사라면 화산파에서도 지긋지긋하게 만나 봤다. 그들이 어떤 부류의 인간인지는 담호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담호와 방진보는 비어 있는 자리에 앉았다.
잠시 기다리자 주인 아낙이 음식이 담긴 쟁반을 들고 나왔다.
“회과육과 홍유두화 나왔습니다. 목이라도 축이시라고 직접 담근 홍주도 한 병 가져왔어요.”
“고맙습니다.”
“별말씀을요. 그럼 맛있게 드세요.”
주인 아낙은 탁자에 음식이 담긴 접시와 술이 담긴 술병을 내려놓았다.
담호가 잠시 술병을 바라봤다.
그는 그렇게 술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호의로 건네는 술을 거절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있었으면 좋아했겠군.’
담호는 유난히도 술을 좋아하는 친구를 떠올리며 잔에 술을 따랐다.
“와아!”
향긋한 주향에 방진보가 먼저 반응했다.
아직 술을 한 번도 마셔 보지 못한 그가 느끼기에도 주향이 범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담호가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혀에 술이 닿는 순간 담호는 적잖이 놀랐다. 이제까지 그가 마셔 봤던 그 어떤 술보다 맛있었기 때문이다.
입안에서 술이 쩍쩍 달라붙는 느낌이 신기했다.
‘사부가 이래서 술을 마시는 건가?’
그렇게 담호가 술맛을 알아갈 때였다.
갑자기 객잔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 안으로 사뿐히 걸어 들어왔다. 순간적으로 객잔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아!”
누구의 입에서 먼저랄 것 없이 탄성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