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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화 8장. 나비의 날갯짓이 폭풍을 부른다(2)
면사 속에 가려진 음유경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상대의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자신을 알고 있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현 강호에 그녀를 알고 있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가 강호에 나온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그의 진정한 정체를 알고 있는 이는 몇 되지 않았고, 그들은 모두 이곳에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녀가 단호히 외쳤다.
그에 담호가 무심히 대답했다.
“마교, 아니 신교라고 해야 하나?”
“…….”
순간 그녀의 어깨에 잔 경련이 일었다.
담호를 바라보는 음유경의 눈빛에 한기가 맺혔다. 그러거나 말거나 담호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당신의 이름은 음유경이지. 아닌가?”
“당신…… 누군가요?”
“기억이 나지 않는 모양이군.”
담호가 흑귀에서 내렸다.
그때까지도 음유경은 담호를 알아보지 못했다.
담호가 그녀를 향해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그동안 사람을 많이 죽여 본 모양이군.”
“무슨?”
“그때 그랬잖아. 내가 당신이 죽이는 최초의 사람이 될 거라고. 그러니까 이름이라도 기억해 두겠다고.”
“그건…… 설마?”
음유경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이제는 희미해진 아주 오래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천금마옥.
마교의 마지막 피난처, 그곳까지 추적해 왔던 정파의 무인들. 그리고 그 속에 섞여 있던 소년.
그도 눈앞의 사내처럼 왼쪽 다리를 조금씩 절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펼쳤던 무공은 아직도 낙인처럼 강렬한 인상으로 뇌리에 남아 있었다.
“당신은 화산파의…… 담호군요.”
“이제 기억이 났나 보군.”
“어떻게 당신이?”
“살아 있냔 말인가?”
“그래요.”
음유경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만큼 그녀는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천금마옥을 붕괴시키기 위해 사용된 벽력탄만 수십 개에 달했다. 백여 리 밖에서 보일 만큼 폭발은 대단했고, 일대를 완전히 매몰시켰다.
‘그런데 거기서 살아남았다고?’
음유경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상식으로는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하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기억 속에 있는 담호의 모습과 지금 눈앞에 있는 담호의 모습이 어느 정도는 겹쳐 보였으니까.
하지만 지금 담호의 모습에서 과거의 모습을 완전히 떠올리는 것은 무리였다.
겉모습은 그렇다 치지만, 기질이 문제였다.
마치 폭발 직전의 화산이 눈앞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겉으로는 고요해 보이지만, 언제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가슴에 용암이 들끓고 있었다.
“악착같이 버텼어.”
“그게…….”
“끝까지 버티니까 살아남더라고.”
담호가 웃었다. 아니, 웃는 것처럼 보였다.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간 모습이.
음유경이 문득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땀이 촉촉이 배어 있다.
‘긴장하고 있는 건가? 이 내가?’
세상에 나온 이후 단 한 번도 긴장을 해 본 적이 없는 음유경이었다. 그만큼 뛰어난 일신 실력을 가지고 있을뿐더러 지옥 밑바닥에서 기어 올라온 근성이 있기 때문이다.
중원의 무인들은 오랫동안 지속된 평화에 길들여져 있었다.
무공은 강할지 모르지만, 투쟁심이 결여된 것이다. 그런 무인들은 그녀를 긴장하게 만들 수 없었다.
반면 담호는 달랐다.
바짝 날이 서 있었다. 그 앞에서 잘못 움직였다가는 순식간에 베일 것 같았다.
음유경 같은 절대강자조차도 숨 막히게 만드는 존재가 바로 담호였다.
온통 검은 일색에 왼발을 살짝 저는 남자.
음유경은 최근에 그런 무인이 있다는 소문을 들은 기억을 떠올렸다.
“당신이 권마였군요. 어떻게…….”
‘그렇게 강해진 거죠?’라는 마지막 말은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궁금한 것은 많았지만, 아무리 질문해 봐야 담호가 답해 주지 않을 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뭔가요?”
“당신은 마교에서 무슨 위치에 있지?”
“그건 말해 줄 수 없어요. 기밀 사항이니까요.”
“그런가? 그렇게 말하니 더 궁금하군.”
음유경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담호의 말속에 숨겨진 적의를 읽었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는 게 좋아요.”
“뭐가?”
“난 당신과 척을 지기 싫거든요.”
“그런 것은 당신이 결정하는 게 아니야.”
“그럼요?”
“당신의 대답이 결정하는 거지.”
담호의 대답에 음유경은 전신의 피가 싸늘히 식는 것을 느꼈다. 그녀를 보는 담호의 눈빛에 담긴 살의를 읽었기 때문이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은 사나운 눈빛 속엔 가공할 살기가 담겨 있었다.
그녀가 몸을 담고 있는 신교에서도 이 정도의 살기를 가진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담호의 모습은 그녀에게 한 남자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율천과 비슷할지도…….’
하지만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은 비슷한 듯 보이지만 완전히 달랐다.
담호가 포악한 야수라면, 그는 절제된 사냥꾼이었다.
누가 더 강하고 약할지는 섣불리 재단할 수 없지만, 적어도 완벽하게 다른 종류의 사람임은 분명했다.
음유경의 손이 검병을 잡아 갔다. 그에 담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것이 당신의 결정인가?”
“개인적으로는 당신에게 일어난 일은 유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말해 줄 이유가 되지는 않아요.”
음유경은 단호했다.
그런 음유경의 모습에 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럴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음유경의 전신에서는 서릿발 같은 기세가 발산되고 있었다. 이전까지 그가 봐 온 그 어떤 무인들보다 날카로운 예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스릉!
그녀가 검을 뽑아 들었다.
더 이상 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그녀의 의지였다.
음유경은 이유 없는 싸움은 싫어했지만, 그렇다고 싸움을 피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철관 진인을 비롯해 수많은 도사들의 생명을 빼앗은 음유경의 검이었다. 그녀의 검에는 자연스럽게 살기가 배어 있었다.
십이 년 전 담호를 만나기 전에 그녀는 단 한 명도 죽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그때와 달랐다.
지옥을 헤쳐 나오며 많은 것이 변했고, 사람을 죽이는 데 어떤 머뭇거림도 없어졌다.
낙월신검(落月神劍).
마교 내에서 일인전승(一人傳承)으로 이어져 오는 비전의 검공이었다.
낙월신검을 대성한 자는 야공에 떠 있는 달마저 떨어트릴 수 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었다.
후웅!
음유경의 검이 검명을 토해 냈다.
피부가 송곳으로 찌르는 것처럼 따가웠다. 무형의 기파가 자극하는 것이다.
담호의 눈빛이 깊이 침잠됐다.
음유경의 기도는 이제까지 담호가 만난 그 어떤 무인들보다 확실히 날카로웠다.
팟!
음유경이 담호를 향해 달려들었다.
순류보(順流步).
마교의 비전 보법 중 하나로 이 역시 일인전승의 보법이었다. 마치 흐르는 물처럼 음유경이 순식간에 흐름을 타고 담호에게 접근해 왔다.
캉!
담호의 코앞에서 쇳소리가 터져 나왔다.
음유경의 검과 담호의 은망수가 부딪치는 소성이었다.
불꽃이 튀고 두 사람의 몸이 동시에 흔들렸다.
예상치 못한 충격에 음유경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하지만 음유경은 물러서는 대신 전진했다.
싸움은 흐름이다.
첫 기세 싸움에서 밀리는 자는 결코 승기를 잡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이유 없이 싸우는 것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일단 싸움을 시작한 이상 반드시 승자가 되어야 했다.
그것이 그녀가 마교의 밑바닥에서 터득한 생존의 법칙이었다.
카카캉!
음유경의 검과 담호의 은망수가 연이어 격돌했다. 음유경이 펼치는 낙월신검은 무서웠다.
약간이라도 허점이 보이면 담호의 요혈을 독사처럼 파고들었다.
중원의 여타 무인들처럼 쓸데없이 검기를 펼쳐 내공을 허비하는 게 아니라, 격돌할 때만 내공을 응집시키는 신기를 보였다.
물처럼 자연스러우면서도 바위처럼 단단한 검.
그것이 음유경의 낙월신검이었다.
단월비검(斷月飛劍)과 낙월혈산하(落月血山下)의 초식이 연이어 펼쳐졌다.
숨 쉴 틈도 없이 이어지는 연계 공격이었다.
보통의 무인이었다면 이쯤에서 벌써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상대는 담호였다.
정(釘)같은 주먹에 공력이 모였다.
눈앞에 음유경의 얼굴이 보였다. 파성추가 그녀의 얼굴을 향해 내리꽂혔다.
음유경이 검을 들어 급히 전면을 막았다.
쾅!
“흐윽!”
음유경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쩌적!
그녀의 검 표면에 거미줄 같은 실금이 생겨났다.
음유경의 안색이 싹 변했다.
담호의 주먹 한 방에 공기가 바뀌었다. 그리고 그의 분위기도 바뀌었다.
오싹!
음유경이 위기감을 느낀 그 순간이었다.
기이잉!
담호의 발이 기이한 곡선을 그리며 채찍처럼 그녀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탄마각(彈魔脚)이었다.
음유경이 역류보(逆流步)를 펼쳐 뒤로 물러났다.
순류와 반대되는 역류.
물러나면서도 검을 휘두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콰쾅!
두 줄기 검격이 담호의 탄마각과 격돌하며 폭음이 터져 나왔다.
두 사람의 몸이 동시에 들썩였다.
음유경의 입가에 한 줄기 선혈이 내비쳤다.
‘강해!’
그녀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고수는 단 한 번만 손속을 교환해도 상대의 수준을 알 수 있는 법이다.
검을 쥔 손아귀가 아려 왔다.
악력이 조금만 약했어도 검을 떨어트릴 뻔했다. 담호의 권에는 태산 같은 무거움이 담겨 있었다. 그 때문에 일격을 교환할 때마다 내장이 다 진탕 될 정도였다.
‘이 정도면 가히 율천에 비견될 정도…….’
그는 그녀가 아는 가장 강한 사람이었다.
그 어떤 태풍에도 흔들리지 않을 굳건한 의지, 태산과 같은 강함을 가졌다.
그는 그들의 정신적인 의지처였고, 믿고 신뢰할 수 있는 동료이자 우두머리였다.
그가 있기에 지금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
음유경은 두 번 다시 그와 같은 사람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만큼 그는 독보적인 존재였기에.
하지만 눈앞에 있는 담호는 그녀의 편견을 깨부수며 가공할 무력을 선보이고 있었다.
이 정도라면 전력을 다하기 전에는 승부를 장담할 수 없다.
그렇게 판단을 내린 순간 음유경의 눈빛이 변했다. 그에 담호가 미소를 지었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차가운 미소를.
“진작 그랬어야지.”
그들 때문에 십이 년이나 빛 한 점 없는 지하에 갇혀 있었다. 누군가는 그 빚을 갚아야 했다.
담호가 두 주먹을 쥔 채 음유경을 향해 달려드는 순간이었다.
쐐액!
소름끼치는 파공성이 울려 퍼졌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가공할 살기에 담호의 몸이 팽이처럼 돌며 팔꿈치와 주먹을 채찍처럼 뻗어 냈다.
단양타의 일격이었다.
쩌엉!
순간 쇳소리와 함께 검 한 자루가 튕겨 나갔다. 튕겨 나간 검은 팽그르 돌아 누군가의 손에 잡혔다.
검의 주인을 확인하던 담호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평범한 체구에 복장 또한 수수했지만 결코 평범해 보이지 않는 남자가 튕겨져 나온 검을 잡고 있었다.
그는 조각을 깎아 놓은 것처럼 반듯한 얼굴에 우수가 드리워진 새까만 눈동자를 가진 미남이었다. 등 뒤엔 커다란 목갑을 짊어지고 있었는데, 목갑 위로 검의 손잡이가 네 개가 삐져나와 있었다.
들고 있는 검까지 합하면 총 다섯 자루의 검이 들어갈 목갑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담호의 안색이 변한 것은 그런 남자의 겉모습 때문이 아니었다. 남자가 방진보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형!”
방진보의 어깨에 팔을 걸친 남자가 음유경을 향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사저, 한참을 기다렸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