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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124화 (12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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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화 8장. 나비의 날갯짓이 폭풍을 부른다(3)

남자의 웃음엔 기품이 담겨 있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할 정도였다. 하지만 입은 웃고 있었지만, 날카롭게 빛나는 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웃고 있지만, 전혀 웃지 않는 남자.

그의 등장에 음유경이 검을 거두며 뒤로 물러났다.

“휴!”

그제야 그녀는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만큼 담호에게서 느껴진 압박감은 만근의 무게로 그녀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사제!”

“여기서 드잡이를 하는 줄도 모르고 한참을 기다렸네. 하하!”

남자가 넉살 좋게 웃었다.

“너?”

담호가 남자를 향해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이 소형제는 어디가 아픈가? 왜 이렇게 땀을 흘리는지.”

남자가 소매로 방진보의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을 닦아 주었다. 그 모습이 무척 자연스러워 오래된 친구처럼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그의 팔에 어깨를 잡힌 방진보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마치 뱀 앞에 선 개구리가 그러한 것처럼.

꼼꼼하게 방진보의 땀을 닦아 주던 남자가 문득 고개를 들어 담호를 바라봤다.

그가 히죽 웃었다.

“안녕하십니까? 우리 사저가 왜 이렇게 늦나 했더니, 이렇게 잘생기신 분이 발목을 붙잡고 있었구려. 그런데 이걸 어찌하나? 우리 사저는 이미 선약이 있는데.”

“당신도 마교의 무인인가?”

“정확히는 신교 출신이죠. 신무월이라고 합니다. 당신은?”

“담호.”

“아! 권마!”

스스로를 신무월이라고 밝힌 남자가 탄성을 터트렸다. 하지만 순수하다기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비아냥거리는 느낌이 더 강했다.

“반갑습니다.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권마 담호 대협을 직접 보게 되다니. 우와!”

신무월이 연신 감탄사를 터트렸다.

겉보기엔 철없는 어린아이 같았다. 하지만 그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신무월의 별호는 공작귀검(孔雀鬼劍)이었다.

공작처럼 화려해 보이지만, 귀신처럼 음험하게 검을 쓰기 때문이다.

등에 짊어진 목갑의 이름이 공작검갑이라 불리는 것도 그와 같은 이유에서였다.

공작검갑에 들어 있는 다섯 자루의 검은 묘용이 제각기 달랐다. 그리고 신무월은 각기 형태가 다른 검을 능숙하게 사용할 줄 알았다.

그중 한 자루가 신무월의 손에 들려 있었고, 그가 말할 때마다 방진보의 눈앞에서 어지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명백한 위협이었다. 그러면서도 신무월은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담호가 그런 신무월을 보며 말했다.

“그 아이가 다치면 넌 죽어.”

“아, 알고 있습니다. 저도 이 아이를 죽일 생각은 없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신무월은 검을 거두지 않았다.

그에 담호의 표정이 더욱 차가워졌다.

보통 사람이라면 심장이 멎을 만큼 섬뜩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신무월은 전혀 긴장을 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진정하시지요. 여기서 굳이 당신과 척을 지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요. 저는 그저 사저와 함께 이곳을 조용히 나가고 싶을 뿐입니다. 안 그런가요? 사저.”

“맞아요.”

음유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신무월의 곁으로 다가갔다.

담호는 그 모습을 빤히 바라만 봤다.

지금 움직이면 방진보는 죽는다. 그 후 두 사람을 죽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방진보는 되살릴 수 없다.

“오늘은 보내 주지. 진보는 두고 가.”

“감사합니다. 이거 조금 긴장했는데, 그래도 대화가 통하는 분이였군요. 말이 통하지 않는 꼴통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하하!”

신무월은 웃으며 남의 속을 긁어 놓는 재주를 가지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의 비아냥거림에도 담호는 표정의 변화 하나 없었다.

마침내 음유경이 신무월의 곁에 섰다.

그녀가 전음으로 물었다.

―금마사자는?

―놓쳤어요.

―사제가?

―생각보다 교활한 놈이더군요. 사저의 도움이 필요해요.

―으음!

―성물은요?

―아직이야. 하지만 단서는 찾았어.

―어서 빨리 성물을 구해야 해요. 그래야 교주의 독주를 막을 수 있어요. 교주가 소천산을 파견했다는 정보가 들어왔어요.

―십리무생(十里無生), 그 괴물을?

―예!

두 사람의 대화는 순식간에 이뤄져서 누구도 그들이 전음을 나눴다는 사실을 알 수는 없었다.

단 한 명 담호만 빼고.

그들 딴에는 은밀하게 한다고 전음으로 대화를 나누었지만 담호의 귀에는 선명하게 들리고 있었다.

‘성물? 교주의 독주?’

낯선 단어들의 조합이었다.

의문이 들었지만 담호는 내색하지 않았다.

신무월이 고개를 돌려 담호를 바라봤다.

“약속은 지키시겠죠?”

“한 입으로 두말하진 않아.”

“알고 있습니다. 그냥 요즘 세상이 하도 흉흉하고 말을 바꾸는 사람이 많아서 확인하는 것뿐입니다.”

신무월이 방진보의 어깨에 걸친 팔을 거뒀다. 그제야 방진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가 보라구, 어린 친구. 그런데 건강을 위해서라도 살은 좀 빼야 할 것 같네. 하하!”

신무월이 방진보의 널찍한 등을 손바닥으로 팡팡 두들겼다.

방진보가 인상을 쓰면서도 담호를 향해 걸어왔다.

그사이 음유경과 신무월은 전장을 떠나갔다.

담호는 그들이 멀어지는 모습을 끝까지 바라봤다. 그것은 음유경과 신무월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마침내 담호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그들은 경공을 펼쳐 장내를 빠져나갔다.

“미안해요, 형.”

방진보가 담호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괜히 자신이 담호에게 짐이 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괜찮다.”

“하지만…….”

“네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비록 방진보를 인질로 삼긴 했지만, 신무월의 실력은 진짜였다.

웃음 속에 칼날을 감출 줄 아는 소리장도(笑裏藏刀)의 전형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음유경보다 상대하기 더 까다로운 존재일지도 몰랐다.

담호는 미련을 갖지 않았다.

어차피 흘러간 일이다. 그리고 강호에서 살아가는 한 언젠가는 그들과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가자.”

“예!”

두 사람은 다시 길을 떠났다.

무림맹을 건립하는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금마사자의 등장은 역설적으로 무림맹 창설의 기폭제가 되었다. 마교의 침공이 현실화되자 각 문파들은 무림맹이 만들어지고 있는 악양에 많은 무인들을 보내 왔다.

무림맹의 건물들은 이제 어느 정도 완성된 상태였다.

남은 것은 세부 조직을 만들고, 수뇌부를 뽑는 일이었다.

구대문파와 오대세가의 수뇌부들은 이를 두고 치열한 갑론을박을 펼쳤다.

마교의 침공 앞에 전 무림의 힘을 하나로 응집시켜야 하는 데는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들의 이권을 하나라도 놓치긴 싫었다.

특히 구대문파와 오대세가처럼 많은 것을 투자한 거대 문파일수록 집착은 더욱 심했다.

연일 고성이 오갔고,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무림맹의 구성이 가닥 잡혔다.

우선 무림맹을 이끌어 갈 맹주는 구대문파와 오대세가가 아닌 외부에서 명망 높은 무인을 초빙해 맡기기로 했다.

무림맹의 요직을 구대문파와 오대세가에서 독점한다는 세간의 비판을 피하기 위한 조치였다.

맹주의 권한은 실로 막강했다.

비상시 각 문파에 무인들을 파견할 수 있는 권한과 무림맹의 주요 별동대의 대주를 직접 임명할 수 있는 권리. 그리고 비상시 전 무림 동원령을 내릴 수 있는 초월적인 권한까지.

하지만 그렇다고 무림 맹주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소유하는 것은 아니었다. 맹주의 독선을 견제하기 위해 장로원이 만들어졌다.

장로원의 구성원은 모두 스무 명이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구대문파와 오대세가의 구성원들이 차지했다.

장로원은 맹주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었고, 구성원의 삼분지 이가 동의하면 맹주직을 해제할 권한을 갖고 있었다.

여기까지가 이제까지 합의된 주요 골자였다.

“휴!”

남궁창이 한숨을 내쉬었다.

불과 며칠 동안 족히 몇 년은 늙은 것 같았다, 그만큼 많은 심력을 소모한 것이다.

지난 며칠은 그에게 전쟁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디 그뿐일까? 무림맹의 기본 골격을 의논하는 데 모인 대부분의 무인들이 그랬다.

각 문파의 이익을 대표해서 온 사람들이었다.

자파의 이익이 조금이라도 침해를 당할라치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발언을 해 대니 회의가 제대로 진행이 될 리 없었다.

그래도 그나마 이 정도의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은 남궁창의 덕이 컸다.

남궁창은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해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조율했다. 물론 순수한 의도를 가지고 그 모든 일을 진행한 것은 아니었다.

최대한 실리를 챙기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눈에 거슬리지 않게 해야 했다. 특히 담호에 의해서 남궁세가의 호위 무인들을 잃은 그로서는 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절묘한 줄다리기 끝에 그는 소기의 목적을 대부분 이룰 수 있었다. 그사이 남궁세가에서도 몰살당한 병력을 대신할 자들을 보내 왔다.

이전에 그를 호위해 왔던 금검대보다 몇 배나 더 많은 전력이었다. 그중에는 무림맹에 차출되어서 생활할 무인들도 있었다.

이제야 남궁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이제 그들을 믿고 무림맹에서 발언권을 높여 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권마만 아니었어도…….”

남궁창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담호에게 수모를 당한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날의 기억은 전혀 잊히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담호에 대한 두려움은 커져만 가고 있었다.

문제는 그런 내색을 전혀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결코 흔들려서는 안 될 사람이었으니까.

남궁창이 고개를 저어 애써 상념을 쫓았다.

“술이나 한잔해야겠구나.”

남궁창이 탁자 위에 올려진 술병으로 손을 가져갈 때였다.

“숙부님.”

큰 목소리와 함께 오른손에 흰 천을 동여맨 젊은 남자가 뛰어 들어왔다.

남궁창의 조카인 남궁수였다.

“무슨 일이냐?”

“중요한 정보가 입수되었습니다.”

“중요 정보?”

“그렇습니다.”

남궁수의 대답에 남궁창이 미간을 잠시 찌푸렸다. 지금은 혼자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불편한 감정을 수습하고 물었다.

“무엇이더냐?”

“녹림십팔채에 관한 것입니다.”

“녹림?”

“예! 현재 악양에 녹림십팔채의 총채주인 황경문의 딸이 들어와 있다고 합니다.”

“무어라?”

남궁창의 안색이 싹 변했다.

녹림의 총채주인 황경문은 강호에서 이미 유명 인사였다.

그가 있기에 지금의 강력한 녹림이 존재한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지금이라도 황경문이 명령을 내리면 수만 명의 녹림도가 목숨을 버릴 각오로 움직일 것이다.

황경문에게 끔찍이도 아끼는 여식이 있다는 첩보를 들은 적이 있었다. 어찌나 아끼고 도는지 쉽게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그것이 사실이냐?”

“확인된 곳에서 들어온 정보입니다.”

“으음!”

“악양 거리에서 그녀를 보았다는 목격자도 있습니다.”

“도대체 그녀가 왜?”

남궁창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황경문이 이곳에서 무림맹을 만들기 위한 회합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무림맹과 녹림은 상극이었다.

그런데도 무남독녀 외동딸을 이곳으로 보냈다니 그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생각을 거듭하던 남궁창의 결론이 한곳에 다다랐다.

“설마 녹림에서 무림맹을 와해하려는 것인가?”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무림맹같이 강력한 초법 집단이 만들어지면 마교뿐 아니라 녹림도도 타격을 받게 된다.

하나로 뭉쳐진 힘은 분출할 곳을 찾기 마련이고, 녹림은 본보기를 보일 만한 좋은 대상이었다. 실제로 남궁창 역시 무림맹이 결성되고, 어느 정도 안정이 되면 녹림의 산채 몇 곳을 시범적으로 토벌할 생각이었다.

일단 그렇게 생각하자 여러 가지 정황이 맞아떨어졌다.

“우선 그녀의 소재를 파악하라. 자세한 사정은 그 후에 알아보겠다.”

“알겠습니다.”

“명심하거라. 소재만 파악하고, 지켜만 보거라. 절대로 함부로 접촉해서는 안 된다.”

“그리하겠습니다.”

남궁수가 고개를 숙였다.

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담호에게 손목이 부러진 후 체면이 바닥에 떨어진 남궁수였다. 그 때문에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없었다.

체면을 회복할 절호의 기회였다. 그는 절대로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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