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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화 8장. 나비의 날갯짓이 폭풍을 부른다(4)
황혜령과 묵일광은 동정호를 떠나는 운마도강선에 타고 있었다.
동정호로 들어오는 운마도강선에는 사람들이 꽉 차 있었지만, 반대로 떠나는 배는 한가롭기 그지없었다. 나가는 사람보다 들어오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증거였다.
동정호와 악양은 굶주린 아귀(餓鬼)의 입과 같아서 천하의 모든 것을 게걸스럽게 빨아들이고 있었다.
수많은 인력과 물자가 일시에 몰려들면서 악양은 유래 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었고, 무림맹에는 한자리를 차지하려는 무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반대로 악양을 벗어나려는 사람들은 거의 없는 형편이었다. 덕분에 운마도강선에 여유롭게 자리를 잡고 쉴 수 있었다.
황혜령이 중얼거렸다.
“무림맹이 대단하긴 한 모양이네. 전 무림인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 같으니. 거대 문파들뿐만 아니라 중소 문파에서도 엄청난 인력을 보내오다니.”
“그래도 핵심 전력은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을 겁니다.”
“그렇겠지.”
묵일광의 말에 황혜령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구대문파나 오대세가 정도 되는 거대 문파들이 전력을 조금 파견했다고 해서 전력이 약화되지는 않는다.
“짧은 시간 동안 많은 것을 보고 배웠어.”
“다행입니다.”
황혜령의 눈이 햇볕이 부서지는 수면을 향했다.
무림맹의 면면을 두 눈으로 확인한 것은 큰 수확이었다. 무림맹이 결성되면 제일 먼저 토벌 대상으로 녹림을 택할 것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모난 돌이 정을 먼저 맞기 마련이었다.
‘당분간은 활동을 멈추고 무림맹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어야 해.’
녹림도의 대부분은 일자무식인 자들이 차지하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의 힘을 과신해서 종종 도에 넘치는 일을 저지르곤 했다.
약탈을 하더라도 무림의 공분을 사지 않을 정도로 해야 했다. 자칫 잘못해서 무림의 공분을 사게 된다면 많은 산채들이 무너지고, 그보다 훨씬 많은 녹림인들이 죽임을 당할 것이다.
소기의 목적을 이루고 돌아가는 길이었지만 황혜령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흑수채의 움직임은?”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정말 그가 움직일까?”
“확률은 반반입니다.”
묵일광의 대답에 황혜령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조윤산은 기분 나쁜 자였다.
문득 그를 처음 봤을 때가 떠올랐다.
황경문의 생일을 맞아 녹림십팔채의 채주 전원이 패왕채로 초대되었다. 조윤산도 그때 초대를 받고 패왕채를 방문했다.
황혜령을 처음 보는 자리에서 그는 말했다.
“많이 컸군.”
분명 첫 만남이었는데도 말이다.
의문을 표하는 황혜령에게 조윤산은 자신이 착각했다고 변명했다. 하지만 그의 두 눈은 지극히 냉철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후로 벌써 수년이나 지났지만 당시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분명 무언가 있는데.”
“뭐가 말입니까?”
묵일광이 의문을 표했다.
“그냥 영 께름칙해서 하는 말이야.”
“뭐가 그렇게 마음에 걸리시는 겁니까?”
“이것저것 여러 가지. 그냥 좀 복잡해.”
황혜령이 난간에 등을 기대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묵일광은 그런 황혜령을 말없이 지켜봤다.
평소 황혜령은 무척이나 쾌활한 모습을 보였지만, 간혹 이렇게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들 때가 있었다. 묵일광은 그럴 때면 말없이 황혜령을 지켜보았다.
사색에 잠긴 황혜령은 아름다웠다.
산채를 주 무대로 살아가는 거친 여인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고귀한 기품도 있었다. 그래서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아가씨.’
처음 본 순간부터 황혜령을 좋아했다.
악착같이 등룡대에 든 것도 따지고 보면 황혜령의 곁에 있기 위해서였다. 묵일광은 그녀와 함께 있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행복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각기 다른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뭐지?”
갑자기 갑판 위에 있는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소요에 황혜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이지?”
저 멀리 배 두 척이 보였다.
배 위에는 단단히 무장을 하고 있는 무인들이 보였다. 그들은 매우 살벌한 기세를 풍기고 있었다.
두 척의 배는 곧장 운마도강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황혜령과 묵일광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설마?’
그들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운마도강선에 탄 자들 중 무인들의 이목을 끌만큼 특별한 자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황혜령과 묵일광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 말은 곧 저들의 목적이 자신들일 확률이 크다는 뜻이었다.
“일광?”
“아무래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응!”
묵일광이 황혜령의 등 뒤에 버티고 섰다.
칠 척 거구에 커다란 도끼 두 자루를 등 뒤에 교차로 짊어지고 있는 묵일광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험악한 인상이 더욱 도드라질 수밖에 없었다.
두 척의 배는 운마도강선 앞을 가로막았다. 그 때문에 운마도강선은 급히 멈춰서야 했다.
운마도강선이 멈춰 서자 두 척의 배에 타고 있던 무인들이 몸을 날려 갑판으로 올라왔다.
운마도강선의 선장이 두려운 표정으로 물었다.
“제가 이 배의 선장입니다. 무슨 이유로 저희 배를 막으신 겁니까?”
한두 명도 아니고 무려 서른 명에 가까운 인원이 배에 올라탔다. 그들은 모두 높이 삼 장쯤은 가볍게 뛰어오를 수 있는 고수들이었다.
아무리 강호가 넓고, 고수가 많다고 하지만 그런 수준의 고수들을 그렇게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배에 올라선 고수들 중 한 명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우린 무림맹에서 나왔다.”
“무림맹?”
“그렇다. 이 배에 녹림의 간자가 숨어 있다는 첩보를 받고 나왔다.”
당당하게 나선 이는 바로 남궁수였다.
남궁수의 발언에 선장은 자라처럼 목을 움츠렸다.
동정호를 수차례 왔기 때문에 이곳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잘 알고 있는 선장이었다.
아직 정식으로 무림맹이 출범한 것은 아니었지만, 무림맹이란 이름이 가지는 영향력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특히 운마도강선처럼 동정호를 오가면서 손님을 태우는 이들에게 무림맹이란 이름은 저승사자와 다름없었다. 그들에게 밉보이면 아예 동정호에 들어올 수 없기 때문이다.
선장이 알아서 비켜섰다.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의 일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남궁수가 예리한 시선으로 갑판 위를 훑어봤다.
그의 눈에 황혜령과 묵일광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무리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해도 너무나 눈에 띄는 외모였다.
‘제보받은 것과 똑같은 모습이군.’
남궁수는 거침없이 황혜령과 묵일광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뒤를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따랐다.
마침내 남궁수가 황혜령 앞에 섰다.
“무림맹의 남궁수요. 소저의 방명을 알려 주시겠소?”
“왜 그러시죠?”
“첩보가 입수됐소.”
“무슨?”
“녹림의 간자가 이 배에 타고 있다는 첩보요.”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죠?”
“상관있지. 우리는 당신들이 녹림의 간자라고 생각하니까.”
“무슨 증거로요?”
“얼마 전에 누군가 제보를 했거든. 어여쁜 계집하고, 도끼를 등에 짊어진 사내가 무림맹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악양에 왔다고.”
“그게 무슨?”
“그리고 우리 앞에 그와 똑같은 인물들이 있군.”
남궁수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반대로 황혜령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누가 제보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들은 이미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남궁수가 손가락을 까닥거리자 남궁세가의 무사들이 황혜령과 묵일광을 포위했다.
“반항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뭐, 해도 상관없지만.”
남궁수가 씨익 웃었다.
숙부 남궁창은 절대 접촉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지만, 지금 이 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공을 세울 생각밖에 없었다.
그 순간 묵일광이 앞으로 나섰다.
칠 척에 달하는 거구에서 풍겨 나오는 엄청난 박력에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잠시 뒤로 물러났을 정도였다.
“내 허락 없이는 누구도 아가씨에게 다가갈 수 없다.”
스릉!
묵일광이 거대한 도끼 두 자루를 꺼내 들었다.
남궁세가의 무인들은 마치 거대한 곰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그 순간 남궁수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뭐하느냐? 연놈을 제압하지 않고.”
“이야아!”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묵일광을 향해 달려들었다.
***
“이게 사실인가요?”
기예화의 표정은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그녀의 앞에는 깔끔한 차림의 남자가 공손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는 바로 천상루의 총관이었다. 그리고 하오문 악양 지부의 부지부장이기도 했다.
“녹림에 들어가 있는 제자를 통해 들어온 정보니 확실할 겁니다.”
“으음!”
“녹림에서는 이미 모르는 자가 없는 유명 인사더군요. 이제까지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로요.”
“그 정도 야심가란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총관의 말에 기예화가 손으로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그녀의 앞에 놓인 종이에는 오늘 아침 지급으로 받은 정보가 적혀 있었다.
―녹림십팔채 중 하나인 흑수채의 주인이 조윤산으로 확인됨.
기예화조차 이렇게 빨리 조윤산에 관한 정보를 입수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는요?”
“현재 함녕 부근을 지나는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아직 그리 멀리 가지 못했군요.”
“어떡할까요?”
“알려 줘야죠. 거래는 거래니까요.”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지부장님.”
“말하세요.”
“계속 그와 인연을 이어 가는 것이 과연 하오문에 득이 될까요?”
“무슨 말인가요?”
“현재 돌아가는 상황으로 봐서 그는 무림맹과 척을 질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그와 계속 인연을 이어 갔다가는 무림맹에게 밉보일지도 모릅니다.”
총관의 걱정은 매우 당연한 것이었다.
하오문의 세력이 방대하긴 하지만, 그들의 무력까지 강한 것은 아니었다. 하오문은 어디까지나 빈민들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 낸 정보 단체에 불과했으니까.
무림맹은 절대강자였다. 그런 절대강자와는 척을 지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적어도 총관의 상식으로는 그랬다.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세상에는 간혹 상식을 뒤엎는 사람도 나오곤 해요. 그런 자들은 기존의 질서를 송두리째 박살 내곤 하죠.”
“권마가 그런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겁니까?”
“현재로서는 가장 가능성이 큰 사람이라는 거예요.”
“으음!”
“그에게 이 정보를 전해 줘요.”
“알겠습니다.”
결국 총관이 기예화의 말을 수긍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때였다.
“루주님!”
앳된 목소리와 함께 아직 어려 보이는 소녀가 방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기예화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일이니? 운정아.”
“지금 동정호에서 난리가 벌어졌다고 해요.”
“동정호에서? 왜?”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녹림십팔채의 주요 인사와 충돌했다고 해요.”
“녹림십팔채?”
기예화와 총관이 서로를 바라봤다.
무언가 감이 왔다.
그 순간에도 운정의 말은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천상루 내에서도 녹림의 움직임이 포착되었어요.”
“무슨 말이야?”
“천상루에 받은 손님 중 하나가 술에 취해 흑수채에서 왔다고 떠들었다고 하네요.”
“정말이야?”
“손님을 직접 받은 기녀가 들은 이야기에요.”
“으음!”
기예화의 표정이 굳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직감한 것이다.
그녀가 총관에게 말했다.
“이 사실을 그에게 전해요. 하나도 빠짐없이. 판단은 그가 할 거에요.”
“알겠습니다.”
총관이 대답과 함께 급히 밖으로 나갔다.
기예화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잠시 어둠이 찾아왔다. 하지만 이내 온 세상이 피로 붉게 물드는 환상이 보였다.
그곳에 담호가 홀로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