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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126화 (126/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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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화 1장. 재앙은 예고도 없이 찾아오기 마련이다(1)

사십 대 후반의 장한을 비롯해 십여 명의 남자들이 악양이 환히 내려다보이는 구층 거탑 꼭대기에 앉아 있었다.

“흐흐! 장관이구나.”

저 멀리 동정호에서 격렬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칠 척 체구의 거한과 야리야리한 몸매의 소녀가 남궁세가의 무인들을 상대로 격전을 벌이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그들이 싸우는 모습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보였다.

우두머리 장한의 이름은 곽거철이었다.

곽거철은 녹림십팔채 중 하나인 흑수채의 부채주였다. 채주인 조윤산을 제외하면 흑수채에서 가장 높은 신분이었다.

생긴 것은 험상궂고 무식하게 생겼지만, 사실 그는 눈치가 빠르고 모략에 능했다. 그 때문에 조윤산은 무척이나 그를 신뢰했다.

하지만 조윤산의 신뢰가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이렇게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처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곽거철이 악양에 들어온 것은 며칠 전이었다. 악양에 들어와서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천상루를 찾아 기녀를 품는 것이었다.

산채에도 계집은 있지만, 천상루의 기녀들처럼 속살이 하야면서도 야들야들한 여인은 없었다. 곽거철은 수하들과 함께 기녀들을 마음껏 탐하면서 열락을 만끽했다.

기녀들과 함께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몰랐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바닥에 술병이 수도 없이 굴러다녔고, 나체가 된 기녀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렇게 꿈결 같은 시간은 어제부로 끝났다.

“역시 저놈부터 제거해야 했어,”

곽거철이 남궁세가의 무인들을 상대로 가공할 무위를 뽐내는 거한을 보며 중얼거렸다.

거한은 바로 묵일광이었다. 묵일광은 황혜령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었다.

남궁세가에 황혜령이 있다는 것을 제보한 이는 바로 곽거철이었다. 남궁세가를 이용해서 황혜령을 제거하려는 것이다.

이제까지는 그의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역시 부채주님이십니다. 어떻게 그런 신묘한 계획을 생각해내셨습니까?”

곁에 있던 남자들 중 한 명이 손을 비비며 아부를 했다.

남자의 이름은 공소추, 보기엔 비리비리해 보여도 손속이 야무지고, 심성도 독해 곽거철의 쓸 만한 손발이 되어 주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공소추와의 인연도 벌써 이십여 년이 넘었다. 채주인 조윤산과의 인연만큼이나 오래된 인연이었다.

곽거철이 피식 웃었다.

“그렇게 아부해도 나오는 것 없다, 소추야.”

“헤헤! 제가 뭐 바라는 게 있어서 이러는 것 같습니까? 다 마음에서 우러나왔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큿! 녀석. 말이나 못하면.”

“채주님과 부채주님을 모신 지가 벌써 이십 년입니다. 척하면, 착 아닙니까. 흐흐!”

공소추가 넉살 좋게 웃음을 터트렸다.

곽거철은 그런 공소추의 넉살에 피식 미소를 지으며 다시 동정호로 시선을 돌렸다.

콰앙!

물보라가 높게 치솟아 오르며 이곳까지 굉음이 들려왔다. 묵일광이 전력으로 절초를 펼친 여파였다.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분분히 뒤로 물러나는 모습이 보였다.

묵일광의 무위에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포위망이 잠시 허물어졌다. 묵일광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황혜령을 안은 채 운마도강선을 탈출했다.

거대한 몸으로 수상비를 펼쳐 뭍에 도착한 묵일광은 바로 경공을 펼쳐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뒤늦게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추적한다고 난리법석을 피웠지만, 묵일광과 황혜령은 이미 모습을 감추고 난 뒤였다.

“저, 저?”

곽거철이 급히 몸을 일으켰다.

“다 차려 준 밥상도 떠먹지 못하다니.”

그가 분통을 터트렸다.

“부채주님?”

“어서 계집과 그 새끼의 행방을 추적해. 그것들이 악양을 빠져나가 패왕채에 합류하면 일이 골치 아파질 수도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병신들! 저런 것들이 무슨 오대세가의 무인이라고? 소추야!”

“예!”

“네가 애들 데리고 가서 저 연놈들의 퇴로를 파악해.”

“저희가 직접 칩니까?”

“우리가 왜 나서? 남궁세가 새끼들한테 제보하란 말이야. 자칫해서 우리가 개입된 것이 알려지면 총채주가 움직일 거야. 거사 전까지는 그 늙은이가 절대 알아선 안 돼.”

“알겠습니다. 그럼 정보만 알려 주겠습니다.”

“어서 가 봐.”

“예!”

공소추가 수하 몇 명을 데리고 탑을 내려갔다.

그가 데리고 간 이들은 모두 흑수채 내에서도 추적술이 뛰어난 자들이었다. 낙엽 속에 숨겨진 바늘마저 찾아내는 그들의 실력이라면 어렵지 않게 황혜령과 묵일광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큿! 차라리 그때 저 계집을 죽였어야 했는데. 그랬으면 이렇게 번거로운 일도 없었을 것 아닌가?”

곽거철이 입술을 질겅 깨물었다.

***

무한(武漢)은 호북성의 성도였다.

남쪽으로는 장강을 비롯한 수로가 잘 발달되어 있었고, 북쪽으로는 관도가 잘 닦여져 있어 예로부터 사통팔달의 교통 중심지로 유명했다.

특히 호북성에는 크고 넓은 호수가 많다 보니 내륙 지방임에도 각종 생선 요리가 잘 발달되어 있었다.

“와아!”

무한에 들어온 이후 방진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시장을 찾는 것이었다.

시장에는 좌판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좌판 위에는 인근의 장강과 동호에서 잡은 각종 생선이 배를 드러낸 채 올라와 있었다.

방진보는 신이 나서 시장을 돌아다녔다.

반면 담호는 별 감흥 없는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무심한 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지만, 그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음유경.’

그녀가 마교 출신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미 천금마옥에서도 만났고, 그녀 스스로도 인정을 했으니까.

음유경의 사제인 신무월도 마교도가 분명했다.

‘그렇다면 금마사자는?’

전음으로 신무월은 음유경에게 금마사자를 놓쳤다고 말했다.

금마사자는 스스로를 마교에 속했다고 밝혔었다. 그렇다면 세 사람은 같은 배를 탄 동료여야 했다. 하지만 신무월의 말투 속에는 금마사자에 대한 적개심이 담겨 있었다.

‘음유경은 성물을 찾고 있다고 했다.’

마교의 성물에 관한 이야기는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때문에 성물이 무엇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담호는 마교 내의 사정도 꽤나 복잡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더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제한적인 정보를 가지고 추론할 수 있는 덴 한계가 있긴 마련이었다. 벌써부터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때가 되면 만나게 되겠지.’

아무리 강호가 넓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만나게 되어 있다.

강호를 지탱하는 은(恩)과 원(怨)의 끈은 매우 질기고도 끈끈해서 한번 엮이면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담호와 그들은 이미 은원을 맺었다. 숨을 쉬고 살아가는 이상 언젠가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걸음을 옮기던 담호의 눈에 문득 허름한 고서점이 들어왔다. 수많은 책들이 가득한 고서점에서는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담호는 방진보에게 고서점에 있겠다고 말하고 들어갔다.

고서점 안은 서책이 가득 쌓여 있어 발을 디딜 공간조차 거의 없었다.

고서점의 주인은 칠십이 넘어 보이는 노인이었는데, 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담호는 주로 무서들이 꽂혀 있는 서가에서 책 한 권을 뽑아 들었다.

풍운신권(風雲神拳이)라는 이름의 비급이었다.

거창한 제목에 담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막상 펼쳐보니 안에 내용은 별 대단하게 없었다.

다른 책들도 마찬가지였다. 용호권(龍虎拳), 벽력신권(霹靂神拳)처럼 이름만 요란했지, 제대로 된 무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담호는 실망하지 않았다. 그도 이곳에 제대로 된 무서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담호는 빠른 속도로 서가에 꽂힌 무서들을 훑어보았다. 순식간에 스무 권의 무서들이 그의 손을 스쳐 지나갔다.

무심하게 책장을 넘기던 담호의 손길이 문득 멈췄다.

그의 눈길을 끄는 구절 때문이었다.

[독행자만이 오롯이 천하에 우뚝 설뿐이다.]

뜬금없이 나온 구절에 담호는 시선을 빼앗겼다.

무공의 구결도 아니고, 특별한 의미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한 줄의 구결은 담호의 마음을 온통 뒤흔들어 놓았다.

담호는 눈을 감았다.

독행자…… 독행류……. 그리고 자신…….

그의 상념이 무한의 날개를 활짝 펼쳤다.

상념이 상념을 부르고, 담호의 상상은 끝을 모르고 뻗어 나갔다.

담호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후웅!

순간 암혼심공이 움직였다.

한 줄기 내력이 일어나 그의 전신을 빠른 속도로 휘돌기 시작했다.

담호는 암혼심공을 딱히 의식하지 않았다. 아니, 의식조차 하지 못했다.

담호는 어둠 속에서 무한한 자유를 느꼈다.

독행자, 그 석 자 속에 담호가 원하던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담호는 그제야 자신의 본질을 깨달았다.

‘나는 원래부터 혼자였구나.’

담호의 상념이 더 뻗어 나갔다.

저 멀리 빛이 보였다.

칠흑처럼 어두운 빛.

한없이 어두운데 빛이 났다.

담호가 그곳을 향해 손을 뻗을 때였다.

―안 된다, 호야.

갑자기 한 줄기 목소리가 그의 상념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사부.’

담호가 뒤돌아봤다.

그러자 사부의 환상이 보였다.

꿈에도 그리던 사부 현소 진인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부!’

환상 속의 현소 진인은 십이 년 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현소 진인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안 된다.

‘사부!’

―아직은 안 된다. 호야.

담호가 뒤를 돌아봤다.

어두운 빛이 조금씩 사그라들고 있었다.

아직도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었다.

―호야!

그 순간 다시 한 번 현소 진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현소 진인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호야, 스스로를 지키거라.

‘사부, 나는…….’

담호는 어두운 빛에 미련을 거두고, 현소 진인을 향해 걸어갔다.

현소 진인의 모습이 조금씩 희미해지고 있었다.

담호가 현소 진인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의 손은 헛되이 지나가고 말았다.

현소 진인의 모습은 환상처럼 사라졌고, 오직 담호만이 홀로 남았다.

담호가 눈을 떴다.

순간 엄청난 신광이 폭사되어 나왔다가 사라졌다.

평소의 눈빛을 회복한 담호가 주위를 둘러보다가 살짝 놀랐다.

그의 주위에 있는 서가가 처참하게 무너지고, 서책들이 사방으로 널브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한쪽에서는 고서점의 늙은 주인이 겁을 집어먹은 모습으로 벌벌 떨고 있었다.

그제야 담호는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 깨달았다.

‘심마경(心魔境)에 빠졌던 것인가?’

암혼심공은 화산파의 심공인 중천심공과 마교의 잡다한 심법들, 그리고 담호의 깨달음이 한데 어우러진 결과물이었다.

중천심공이 든든하게 기둥이 되어 주었기에 이제까지 심마에 빠질 위험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독행자라는 단어에 빠져들면서 암혼심공 전체가 요동을 쳤다.

암혼심공은 완벽해지기 위해 스스로 움직였다. 하지만 너무 앞으로 나갔다.

걷고, 뛰어가야 할 길을 날아가려다 보니 곳곳에서 파탄이 생겼다.

만일 검은 빛을 잡았다면?

담호는 고개를 저었다.

자칫 잘못했으면 폭주를 할 뻔했다.

그가 심마경에 빠져들었다면 겨우 고서점 하나가 부서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영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비록 폭주할 뻔했지만, 그의 암혼심공은 한결 더 단단해져 있었다. 제때 멈춘 덕분이었다.

“사부.”

담호의 눈에 옅은 그리움이 떠오를 때였다.

“다, 담 대협?”

고서점 입구에서 누군가 그를 불렀다.

눈을 뜨고 바라보니 허름한 차림의 남자가 두려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지?”

“저, 저는 하오문 무한 지부의 장소출이라고 합니다.”

“하오문?”

“예! 악양지부에서 전서를 보내왔기에…….”

장소출의 목소리가 절로 떨려나왔다.

담호가 무한에 들어온 그 순간부터 하오문은 그의 행방을 파악하고 있었다. 요주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악양지부에서 서신이 도착하자마자 바로 그를 찾을 수 있었다.

서신을 전해 주기 위해 고서점으로 들어왔을 때 그가 본 광경은 그야말로 끔찍한 것이었다.

검은 기류가 담호를 중심으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짐승이 검은 날개를 펼치고 있는 것 같았다.

살기와 광기가 범벅이 된 검은 기류에 장소출은 심장이 멈출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이제까지 수많은 무인들을 보고, 경험했지만 이렇게 압도적인 광경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장소출이 손에 들고 있던 서신을 공손히 바쳤다.

담호는 봉투를 찢고 서신을 읽었다.

“조윤산…… 흑수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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