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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127화 (127/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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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화 1장. 재앙은 예고도 없이 찾아오기 마련이다(2)

쾅!

남궁창이 탁자를 힘껏 내리쳤다.

탁자 위에 있던 물건들이 충격에 다 튕겨져 나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무어라? 충돌했다고? 내가 소재만 파악하라고 하지 않았더냐?”

“그게…… 남궁수 공자님이 계속 직접 잡아야 한다고 우기셔서…….”

“수가…….”

남궁창의 어깨에 잔 경련이 일었다.

비록 녹림의 대부분이 하잘것없는 도적들의 집단이라고 하지만, 구성원만 수만 명이 넘었다.

그 수만 명의 생사여탈권을 한 손에 쥔 자가 바로 패왕도 황경문이었다. 황혜령은 그런 황경문의 무남독녀였다.

자칫 잘못해서 녹림과 정면으로 충돌했다가는 무림맹이 기반을 잡기도 전에 흔들릴 수가 있었다.

“수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황혜령을 추적 중에 있습니다.”

“크윽!”

남궁창이 이를 꽉 깨물었다.

이렇게 되면 녹림과의 충돌은 기정사실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잘못했어. 수를 보내는 것이 아니었는데.’

담호에게 오른팔이 부러진 후 의기소침해 있던 남궁수였다. 그래서 그의 기를 살려 주기 위해 임무를 준 것이었는데, 설마 이런 사고를 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사람을 보내서 어서 수에게 철수하라고 전해.”

“그게…….”

“왜 그러냐?”

불길한 느낌에 남궁창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남궁수 공자님이 다른 세가의 무인들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셔서.”

“다른 세가의 무인들도 끌어들였단 말이냐?”

“아무래도 상대의 무위가 예상을 뛰어넘는지라…….”

황혜령을 지키는 묵일광의 무위는 남궁수의 예상을 훌쩍 웃돌았다. 그는 혼자만의 힘으로 남궁세가의 포위망을 뚫고 도주했다.

만일 남궁수의 오른팔이 멀쩡했다면, 또는 담호와 싸우기 전이었다면 어떻게든 남궁세가의 힘만으로 사건을 처리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담호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부상을 입은 후 굳건하던 그의 마음엔 균열이 갔다.

묵일광의 가공할 무위에 겁을 집어먹은 남궁수는 평소 친분이 있던 오대세가의 무인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렇지 않아도 무림맹의 창설로 들떠 있던 일부 무인들이 동조를 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가고 있었다.

“내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구나.”

남궁창이 급히 몸을 일으켰다.

사태가 더 커지기 전에 어서 수습해야 했다.

그의 얼굴에 다급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헉헉!”

황혜령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는 무척이나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곁을 든든히 지키고 있는 묵일광을 바라봤다.

묵일광의 전신에는 자잘한 상처가 가득했다. 치명적인 상처는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꽤나 고통스러울 텐데도 묵일광은 표정의 변화 하나 없었다.

“괜찮으십니까? 아가씨.”

그는 오히려 황혜령을 걱정했다.

“난 괜찮아.”

“다행입니다.”

“그런데 악양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이미 저들의 전력이 쫙 깔렸잖아?”

“최선을 다해 봐야지요.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저보다 아가씨가 먼저 다치거나 죽는 일은 없을 거란 겁니다.”

“일광!”

“악양을 빠져나가려면 조력자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조력자?”

“현재 악양엔 수많은 문파들의 무인들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들이 천라지망을 구축하면 절대 빠져나가지 못할 겁니다. 그전에 조력자를 구해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소청에게 가자.”

“은가보의 은소청 아가씨 말입니까?”

“그래! 소청이라면 우리를 도와줄 거야.”

“알겠습니다.”

묵일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혜령과 은소청이 얼마나 돈독한 사이인지는 그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현재로서는 은소청의 도움을 받는 것 외에는 뾰족한 수가 없어 보였다.

그 순간 골목 바깥쪽에서 거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이쪽을 막고 경계를 세워.”

“연놈이 결코 악양을 빠져나가서는 안 돼.”

두 사람의 안색이 변했다.

우려처럼 벌써 악양 전체에 천라지망이 펼쳐지고 있었다.

“어서 가시지요.”

“응!”

황혜령이 묵일광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문득 그녀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지금 이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이는 아버지 황경문도 아니었고, 절친한 동생인 은소청도 아니었다.

너무나 낯선 얼굴의 사내였다.

***

무한에 올 때 담호는 말을 타고 산을 넘었지만, 악양으로 돌아갈 때는 배를 탔다. 무한과 악양은 장강으로 연결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탄 배는 일반적인 운마도강선이 아니었다. 하오문에서 마련해 준 조그만 선박이었다.

운마도강선처럼 크지는 않았지만 대신 속도가 빨랐다. 배를 모는 선장 역시 하오문에 소속된 자로 장강의 운항만 수백 번 이상을 한 능숙한 뱃사람이었다.

선장이 장소출에게 받은 명령은 단 하나였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담호를 악양으로 데려다주는 것.

선장이 흘깃 담호를 바라봤다.

‘대체 저 남자가 누구기에?’

그가 아는 장소출은 대가 무척 센 사람이었다.

장소출은 어떤 무인 앞에서도 기가 죽은 적이 없었다. 심지어는 구대문파의 장로를 만난 자리에서도 할 말을 다한 사람이었다.

그런 장소출이 담호를 만난 후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 찾아왔다. 무조건 담호를 악양으로 데려다주라던 그 모습과 음성이 잊히지가 않았다.

―절대 그를 화나게 하지 말게. 어떠한 경우에도…….

도대체 담호의 어떤 모습이 장소출을 그렇게 겁먹게 했는지 몰랐다.

선장이 살짝 고개를 저으며 배의 운항에 집중했다.

담호는 배의 선수에 서서 장강의 도도한 물결을 바라보았다.

‘조윤산.’

드디어 그가 원하던 답을 얻었다.

그런데도 하나도 흥분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가슴과 머리는 그 어느 때보다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흑수채에 숨어 있었단 말이지?’

도적이 녹림에 투신해 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인지 몰랐다.

원래 첫발을 디디는 게 힘들지, 일단 한 번 그와 같은 세계에 몸을 담은 자는 두 번 다시 평범한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 담호 자신처럼.

“형!”

방진보가 다가왔다.

“말들은 선저에 잘 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

“형?”

“왜 그러느냐?”

“그냥요.”

사실은 너무 무서웠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담호는 여전히 평상시와 똑같은 표정, 모습이었다. 하지만 달랐다.

담호와 오랜 시간 함께해 온 방진보는 그 미묘한 차이를 알 수 있었다.

‘무……서워!’

이제는 담호에 대해 어느 정도 내성이 생겼다고 자신했었다. 하지만 지금 담호의 모습은 그런 방진보의 내성을 송두리째 날려 버릴 만큼 무서웠다.

벌써부터 숨이 턱턱 막히고, 온몸의 솜털이 모조리 곤두섰다. 그래서 이 이상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휴!”

방진보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물러섰다.

배 중간까지 물러나서야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다. 방진보가 그럴 정도였으니 다른 선원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조그만 배라고 해도 거의 십여 명의 선원이 타고 있었다. 하지만 선원들은 감히 담호의 주위에 접근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배는 빠른 속도로 남하했다.

악양을 떠날 때보다 몇 배는 빠른 속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호의 성에는 차지 않았다.

담호는 해가 뜨고, 지는 모습을 모두 갑판에서 바라봤다. 간혹 방진보가 음식을 갖다 줄 때를 제외하고는 그는 단 한 발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사흘이 지났다.

담호가 탄 배는 드디어 동정호에 들어왔다.

불과 보름 정도 떠나 있었을 뿐이지만 주위의 풍경이 묘하게 낯설어 보였다.

“아!”

방진보가 악양과 인접한 동정호변을 보며 탄성을 내뱉었다.

그곳에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웅장한 전각군이 보였다. 바로 무림맹이었다.

‘미친!’

믿을 수 없는 공사 속도에 방진보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저 정도면 거의 하루에 하나 꼴로 전각을 만든 셈이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인적, 물적 자원이 투자되었는지 짐작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직도 소소히 손을 봐야 할 부분은 많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라면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모양새는 만들어진 셈이다.

쿵!

마침내 배가 선착장에 닿았다.

담호와 방진보는 각자 말을 끌고 배에서 내렸다.

“휴!”

“악몽이 끝났구나.”

그제야 녹초가 된 선장과 선원들이 뱃전에 널브러졌다.

그들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닷새 거리를 사흘로 줄였으니.

그동안 그들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식사도 서서 해야 했다. 담호의 숨 막히는 존재감은 그들을 말없이 압박했고,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미친 듯이 배를 몰아야 했다.

선장은 초점이 풀린 눈으로 멀어지는 담호와 방진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검은 일색의 복장과 검은 말.

그제야 선장은 뒤늦게 그의 정체를 떠올릴 수 있었다.

“권마, 저자는 권마였구나.”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강호에 알려진 권마의 악행은 그야말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흉악한 것들뿐이었다.

수가 틀리면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물론이고, 피를 빨아먹고, 인육도 즐긴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그런 무시무시한 대마인이 자신이 몰고 온 배에 타고 있었다니, 그야말로 간담이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한바탕 피바람이 불겠구나.’

이곳으로 담호를 태우고 오는 내내 마음을 졸였던 선장이었다. 그만큼 담호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화산을 보는 듯한 아슬아슬한 기분은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알지 못했다.

“모르겠다. 이젠 내가 알 바 아니니까.”

선장은 그냥 바닥에 누운 채 거친 숨만 몰아쉬었다.

한편 배를 떠난 담호는 곧장 천상루로 향했다.

“대협!”

천상루에 도착하자마자 운정이 그를 맞이했다.

“지부장님께서 안에서 기다리셔요.”

담호는 운정의 안내도 기다리지 않고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담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운정의 안색이 파리하게 질렸다.

“헉!”

담호는 처음 보았을 때 그 모습 그대로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무언가 달랐다.

그 알 수 없는 섬뜩함이 운정의 가슴을 칼로 저미는 듯했다.

‘무, 무슨 눈빛이…….’

운정이 망연한 눈빛으로 멀어지는 담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녀의 곁에서 방진보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담호는 복도를 지나 기예화의 거처로 바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기예화가 그를 조심스럽게 맞았다.

담호는 자리에 앉지도 않고 물었다.

“그들은?”

“악양에 있어요. 이미 저희가 위치를 확보하고 있으니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기예화는 차분히 말했다.

담호의 눈빛이 깊이 가라앉았다.

“원하는 게 있군.”

“맞아요.”

“뭐지?”

“한 사람만 구해 줘요. 그럼 그들의 행방을 알려 드릴게요.”

“…….”

“그게 현재 악양에 들어와 있는 흑수채 도적들의 행방을 알려 드리는 조건이에요. 이건 전에 합의된 사항이니까 결코 계약 위반이 아니에요.”

그녀는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자칫 잘못해서 담호가 저번처럼 실력 행사에 나설까 우려해서였다.

“누구지?”

“황혜령……. 녹림십팔채의 총채주인 황경문의 외동딸이에요. 그녀가 이곳에서 목숨을 잃으면 악양 전체가 전쟁터가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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