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132화 3장. 피는 물보다 진하다(1)
“으음!”
묵일광이 신음성과 함께 눈을 떴다.
눈이 흐릿해서 초점이 잡히지 않았다. 묵일광은 눈을 몇 번 끔뻑거렸다.
그사이 정신이 돌아왔다.
“아가씨!”
묵일광이 소리를 지르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의 손은 어느새 도끼를 찾고 있었다.
그 순간 바로 곁에서 따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괜찮아, 일광.”
“아가씨!”
고개를 돌리니 쪼그리고 앉아 자신을 바라보는 황혜령의 모습이 보였다.
“괜찮으십니까? 아가씨.”
“난 괜찮아. 그보다 일광은 어때?”
“전…….”
괜찮다고 대답하려던 묵일광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전신 기혈이 꼬이고 막힌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워낙 몸뚱이가 튼튼하다 보니 부러진 곳은 없었는데, 내상은 심상치 않았다. 그나마 누군가 제대로 응급조치를 했는지 더 이상 악화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어……떻게 된 겁니까?”
묵일광은 영문을 알 수 없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황혜령이 그런 묵일광에게 희미한 미소를 보여 주었다.
“오라버니가 도와줬어.”
“오라버니요? 그럼…….”
“응!”
황혜령이 고개를 끄덕이며 밖을 바라봤다.
밝은 빛이 동굴의 입구로 쏟아지고 있었다. 그들은 동굴 안에 있었던 것이다.
그때 누군가 동굴 안으로 들어왔다.
“어, 일어나셨네요.”
통통한 체구에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이는 바로 방진보였다. 방진보의 손에는 커다란 솥이 들려 있었다.
솥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죽이 담겨 있었다.
“몸이 많이 상하신 것 같아서 보양죽을 만들어 봤어요.”
“고마워.”
“에이! 뭐, 힘든 것도 아닌데요.”
방진보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솥을 내려놨다.
“오라버니는?”
“형은…….”
방진보가 말끝을 흐리며 동굴 밖을 바라봤다.
“끄으으!”
공소추의 입술을 비집고 신음이 흘러나왔다.
마치 피웅덩이에 빠졌던 것처럼 그의 전신은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공소추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의지로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마치 거대한 망치로 수백, 수천 번을 얻어맞은 것처럼 그의 전신이 짓이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로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기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지난밤은 공소추에게 악몽이나 다름없었다. 그에게 악몽을 선사한 이는 다름 아닌 담호였다.
‘놈은 악마야.’
부르르!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오줌을 싸고 말았다.
바지춤이 축축했지만 부끄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보다 무서웠다.
담호라는 이름 두 글자는 그의 뇌리에 공포로 각인이 되었다.
그는 밤새도록 공소추를 고문했다.
첫 번째로 손가락을 바스러트렸다. 두 번째로 발가락이었고, 부서지는 뼈의 개수는 순식간에 늘어났다.
고통은 둘째치고 정말 미치겠는 것은, 그런 중상을 입고도 아직 숨이 붙어 있다는 것이다.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조치한 것인지 몰라도 죽을 수조차 없었다.
고통의 시간은 영원처럼 지속되었다.
처음엔 영문을 몰랐다. 담호가 왜 자신을 고문하는 것인지.
하지만 시간이 흐른 후에 알게 되었다.
그는 자신들이 약탈했던 마을의 유일한 생존자였던 것이다. 그때도 동료의 목덜미를 물어뜯어 죽였던 담호였다. 그 악귀 같던 꼬마가 이젠 괴물이 되어 나타났다.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도 않았다. 끝없이 떠들었다. 그렇게 하면 혹시라도 담호가 봐줄까 봐.
그렇게 한참을 떠들고 난후 잠시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다시 깨어나니 전혀 낯선 곳에 이렇게 홀로 덩그라니 버려져 있었다.
‘그냥 보내준 건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그런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문제는 지금 그가 스스로의 힘으로는 운신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기어가는 것은커녕 손가락 하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 상태로 있다가는 짐승의 밥이 되기 십상이었다.
‘크윽! 동생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그 인간은 대체 뭐하는 거야?’
그는 부채주인 곽거철을 원망했다.
그래도 이십 년이나 따랐다. 그의 명령이라면 죽는 시늉까지 했다. 목숨을 걸고 무림맹 무인들 사이에 숨어들어가 선동을 한 것도 모두 그의 명령 때문이었다.
그가 그렇게 곽거철을 원망할 때였다.
“소추!”
갑자기 낯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순간 그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꿈에도 그리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부, 부채주?”
꿈결처럼 눈앞에 곽거철이 서 있었다.
곽거철과 부하들이 급히 달려왔다.
“소추, 맞느냐?”
“흐, 흐윽!”
공소추가 대답대신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된 거냐?”
곽거철이 물었지만 공소추는 대답하지 못했다. 턱관절이 부서졌기 때문이다.
공소추가 담호에게 납치된 후 곽거철은 수하들과 함께 조심스럽게 추적했다. 공소추와 달리 곽거철은 전장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너무나 쉽게 눈에 띄는 외모 때문에 정체를 들킬까 우려해서였다.
그 때문에 공소추 한 명만 보냈지만 걱정하지 않았다. 공소추가 워낙 눈치가 빠르고 판단력이 좋아 별 위험이 없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머리 나쁜 무림맹의 무인들은 약간의 선동만으로도 쉽게 넘어갔다. 그런 그들을 보며 멍청한 놈들이라고 비웃었다.
그런데 담호가 나타나면서 모든 것이 변했다.
담호는 그가 이제까지 알고 있던 그 어떤 인물들과도 달랐다.
곽거철은 살면서 담호처럼 공포스러우면서도 압도적인 무위를 갖고 있는 무인을 본 적이 없었다.
그 역시 강호를 살아가고 있는 존재였다.
무공이 강한 자는 수없이 봤다.
개중에는 당금 강호를 쩌렁쩌렁 울리는 절대의 무인도 있었다. 순수한 무공만 따진다면 그들이 오히려 담호보다 강할지 몰랐다.
하지만 담호에게선 그들에게 존재하지 않는 원초적인 공포가 존재했다.
포악함과 냉철한 광기.
다른 무인들과 구별되는 담호만의 특징이었다. 그리고 담호는 그 두 가지를 적절히 활용할 줄 알았다.
‘설마 체면만 차릴 줄 아는 정파의 무인들 중에 그런 별종이 있을 줄이야.’
담호는 그만큼 곽거철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괴물이었다. 그런데 그런 괴물이 공소추를 납치해 갔다.
비록 무림맹의 무인들을 선동하는 데 이용하긴 했지만, 공을 들여 납치할 만큼 공소추는 그리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다.
‘도대체 소추를 어디로 데려간 거지?’
만일 담호가 아닌 다른 이가 공소추를 데려갔다면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담호처럼 강호 전체에 영향력을 끼칠 만한 자가 데려갔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녹림에도 악영향이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곽거철은 조심스럽게 담호의 행적을 추적해 왔다. 담호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최대한 조심하면서.
그런 그 앞에 뜻밖에도 공소추가 나타났다. 제 의지로는 말도 못하고,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는 만신창이가 된 채 .
도대체 왜?
그런 의문이 머릿속을 맴돌 때였다.
“역시 찾아왔군.”
갑자기 낯선 음성이 귓전에 울려 퍼졌다.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무미건조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곽거철의 전신의 털이란 털이 모조리 쭈삣 곤두섰다.
“누구냐?”
그가 급히 뒤돌아봤다. 그러자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커다란 바위 위에 홀로 앉아 있는 남자가 보였다.
검은 일색의 남자였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검은 안광이 일렁이고 있는 모습에 소름이 다 끼쳤다.
“헉!”
곽거철은 단번에 남자를 알아봤다.
어찌 모를 수 있을까? 악양에서 한바탕 혈겁을 일으킨 남자인데.
그는 바로 담호였다.
담호가 바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흑수채의 부채주 곽거철 맞지?”
“그걸 어떻게?”
무심코 대답하던 곽거철이 공소추를 노려봤다. 공소추가 발설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공소추는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었다. 담호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이성이 마비되었기 때문이다.
문득 간밤의 일이 떠올랐다.
잊고 있던 공포가 되살아나면서 심장이 쿵쾅 뛰었다.
부들! 부들!
마치 풍을 맞은 것처럼 온몸이 펄떡펄떡 뛰었다.
“그, 그극!”
게거품을 흘리던 공소추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 심장이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멈춘 것이다.
공소추는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했다. 흰자를 드러낸 채 허공을 바라보는 공소추의 모습은 추적해 온 녹림의 무인들을 소름 끼치게 만들기 충분했다.
“크윽! 소추는 미끼였던 건가?”
곽거철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똑똑한 두뇌의 소유자답게 그는 금세 진실을 추측해 냈다. 그리고 그의 추측은 사실이었다.
공소추는 곽거철과 수하들을 낚기 위한 담호의 미끼였다.
비록 기억은 못 했지만, 공소추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털어놨다. 조윤산과 곽거철의 관계, 그리고 그들이 악양에 온 이유까지도.
담호가 바위를 내려왔다. 그러자 곽거철과 수하들이 움찔 뒤로 물러나왔다.
그들이 물러나는 만큼 담호가 다가왔다.
여전히 그는 발을 절고 있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담호를 보고 웃지 않았다. 아니, 웃을 수가 없었다.
마치 도살장에 끌려온 소처럼 미칠 듯한 공포가 그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제까지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생소한 느낌에 그들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렸다.
그나마 곽거철만 이를 악물고 대항할 뿐이다.
담호가 물었다.
“왜지?”
“뭐, 뭐가 말이냐?”
“왜 그렇게 집요하게 그 아이를 쫓는 거지?”
담호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순간 곽거철은 예리한 칼로 가슴을 후비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크윽!”
곽거철이 급히 뒤로 물러나며 주위를 둘러봤다.
평상시 든든하던 수하들이 하나같이 겁을 집어먹고 비루먹은 강아지처럼 벌벌 떨고 있었다.
곽거철이 소리쳤다.
“뭐하고 있어. 어서 놈을 막지 않고.”
“하지만…….”
“어서 막으라고. 놈을 막지 못하면 어차피 다 죽은 목숨이야.”
“제, 제기랄!”
그제야 현실을 깨달은 부하들이 무기를 꼬나 쥐고 담호에게 덤벼들었다.
“이야아!”
“조져!”
부하들이 함성을 지르며 담호에게 덤벼드는 사이 곽거철은 급히 몸을 돌려 달아났다.
‘젠장! 무림맹을 이용해 저 계집을 제거하려는 계획은 실패다. 저런 괴물이 지키고 있는데 어떻게 죽인단 말인가?’
곽거철은 다리가 두 개뿐이라서 더 빠르게 달릴 수가 없는 사실이 한탄스러울 뿐이었다.
쾅! 쾅!
등 뒤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비명 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곽거철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방패막이로 세운 부하들이 모조리 죽었다는 사실을.
후웅!
거센 풍압이 등 뒤에서 느껴졌다.
“으아아!”
곽거철이 비명을 지르며 뒤돌아서 발작적으로 무기를 휘둘렀다.
후웅!
낭아도가 횡으로 공기를 갈랐다. 하지만 손에 걸리는 느낌이 없었다.
“젠장!”
곽거철이 욕설을 내뱉는 그 순간 목덜미가 덥석 잡혔다.
숨도 쉬지 못하게 목을 조여 오는 강한 악력에 곽거철이 자신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렸다.
콰직!
그 순간 담호의 주먹이 곽거철의 옆구리에 틀어박혔다. 곽거철이 울컥 피를 토해 냈다.
갈비뼈가 전병처럼 와그작 부서졌다.
생전 처음 느껴 보는 끔찍한 극통에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으으!”
이제껏 수많은 약탈을 하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타인의 생명을 빼앗은 그였지만,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목숨의 위협을 받은 적이 없는 곽거철이었다.
“끄으으! 아, 안 돼!”
곽거철은 눈물을 흘리면서 바닥을 기어갈 때였다. 담호의 오른발이 그의 다리를 향해 내리꽂혔다.
콰드득!
“으아악!”
곽거철의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다리가 부러져 덜렁거리고 있었다.
고개를 들자 담호가 곽거철을 내려다보았다.
“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