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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133화 (13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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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화 3장. 피는 물보다 진하다(2)

곽거철은 이를 악물고 버티려 했다. 정말 그러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의지가 얼마나 약한지 이번 기회에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리고 폭력 앞에 견딜 장사가 없다는 사실도.

담호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차근차근, 그러면서도 집요하게 곽거철의 육체와 정신을 무너트렸다.

결국 곽거철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털어놨다.

담호의 얼굴에 처음으로 인간의 표정이라 할 만한 변화가 나타났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혜령이 너희들이 납치했던 아이란 말이지?”

“그렇소! 노비로 팔아 버리려 했는데…… 총채주의 눈에 들어서 그만 빼앗기고 말았소.”

그렇게 빼앗긴 아이는 황경문의 딸이 되었고, 황혜령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우리는 두려웠소. 그 계집이 후에라도 자신의 진정한 신분내력을 기억하고 복수를 할 것이.”

“그래서 죽이려고 했다?”

“그렇소! 후환은 완전히 제거해야 하는 법이니까.”

“혜령을 납치해 온 곳은?”

겉으로는 담담히 묻고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 담호의 심장은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고동치고 있었다.

“섬서성 태백산 자락에 있는 외딴 마을이었소. 백여 명 정도가 사는 조그만 마을이었소. 그곳에서 독종을 만났기에 똑똑히 기억하고 있소. 그놈이 동료의 목을 물어 죽였거든. 크으으!”

쿵!

순간 담호는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턱 근육이 씰룩거렸다.

‘그래서였나?’

처음 봤을 때부터 남 같지 않았던 아이, 어쩌면 핏줄의 끌림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납치되었을 당시 황혜령은 겨우 두세 살에 불과했다. 담호가 변한만큼 황혜령 얼굴 역시 많이 변했다. 첫눈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무엇보다 황혜령은 어린 시절의 기억이 전혀 없었다. 너무 어린 시절에 납치를 당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몰라봐도 상관없었다.

황혜령은 모든 것을 잊어버렸을지 모르지만, 담호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담호는 격동을 억누르며 물었다.

“흑수채의 위치는?”

“강서성 옥화산(玉化山)에 있소.”

“옥화산.”

담호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런 담호를 보며 곽거철이 애원했다.

“내가 아는 사실을 모두 이야기했소. 그러니 살려 주시오. 그러면 은혜는 잊지 않겠소.”

곽거철은 죽고 싶지 않았다.

나쁜 짓도 많이 하고 살았지만, 그것이 자신이 죽을 이유는 못된다고 생각했다.

살고 싶었다.

정말 미치도록 살고 싶었다.

그 순간 담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아이의 이름은 황혜령이 아니야.”

“무슨?”

“담가령이지. 너희들이 빼앗아갔던 내 동생의 이름이야.”

“그, 그럼?”

곽거철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담호의 얼굴과 이십여 년 전 태백산 자락의 조그만 마을에서 조우했던 소년의 얼굴이 겹쳐 보이고 있었다.

“서, 설마 당신이?”

“그래! 이제 네가 왜 죽어야 하는지 알겠지?”

“으으!”

곽거철의 눈에 절망의 빛이 드리워졌다.

그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아니오. 모두 조윤산이 시켜서 한 짓이오. 나는 시키는 대로 따른 것뿐 아무런 죄도 없소. 부디 살려 주시오.”

곽거철이 담호의 다리를 붙잡고 애원했다. 하지만 그를 내려다보는 담호의 눈빛은 여전히 서늘했다.

“내 부모도 그랬지. 살려 달라고 애원했지. 그때 너희들은 어떻게 했지?”

“그, 그건…….”

“죽였지. 마치 쥐를 갖고 놀듯 그렇게 한참을 능욕하며.”

“살려 줘! 잘못했어. 제발……으아악!”

콰지직!

순간 담호가 곽거철의 오른팔을 잡아 비틀었다.

근육다발이 찢어지고, 뼈가 부러졌다. 멀쩡하던 어깨가 통째로 뜯겨져 나갔다.

눈앞에서 자신의 팔이 생으로 떨어져 나가는 모습을 본 곽거철이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담호의 응징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곽거철의 왼쪽 팔을 잡았다.

“아, 안 돼!”

곽거철이 애원했다.

쫘아악!

“으아악!”

하지만 담호는 가차 없었다. 곽거철의 왼쪽 팔마저 잡아 뜯었다.

양쪽 팔이 뜯겨져 나간 곽거철의 어깨에서 피가 비 오듯 쏟아졌다. 순식간에 너무 많은 피를 흘렸기에 곽거철의 얼굴에는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곽거철의 눈에서 생명의 빛이 사라지고 있었다.

담호는 그 모습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이…… 악귀 같은 놈! 너도 곱게 죽진 못할 거다. 너도 반드시…….”

곽거철이 마지막 힘을 끌어 모아 담호를 저주했다. 그것이 그가 살아생전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담호가 무심히 뒤돌아섰다.

곽거철의 저주 따윈 그의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았다.

이미 수많은 이들을 죽였고, 그들에게서 원독 어린 말을 들었던 담호였다. 거기에 곽거철의 저주 하나가 더 추가된다고 해도 티도 나지 않았다.

담호가 황혜령을 숨겨 둔 동굴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겉으로는 여전히 무심한 표정이었지만, 그의 머릿속은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어서 빨리 입장을 정리해야 했다.

어떤 것이 황혜령을 위해 최선인지.

문득 담호가 자신의 양 주먹을 바라봤다.

타인의 피로 붉게 물든 주먹에서 짙은 혈향이 느껴졌다. 역한 피비린내는 담호의 정신마저 혼미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담호는 자신의 어딘가가 고장 났다고 생각했다.

이제까지는 별 신경 쓰지 않았는데, 다시 동생을 만나고 보니 그 사실이 크게 다가왔다.

담호가 눈을 감았다. 그래도 걷는 덴 문제가 없었다.

잠시 후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갈등의 빛 따윈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그 어떤 감정도 보이지 않는 무심한 눈빛이 확고히 자리하고 있었다.

마침내 동굴이 있는 절벽가에 도착했다. 우거진 수풀을 치우자 은밀하게 숨겨져 있던 동굴이 드러났다.

그곳에 황혜령이 있었다.

“형!”

동굴에 들어가자 제일 먼저 방진보가 그를 반겼다. 담호가 방진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안쪽을 바라봤다.

“오라버니.”

황혜령이 말을 걸어왔다.

어젯밤보다 안색이 한결 나아보였다.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는?”

“정신을 차렸어요. 오라버니 덕분이에요.”

“도움에 감사합니다.”

묵일광이 인사를 해 왔다.

담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황혜령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이제까지 남으로 살아왔다. 자신의 삶이 존재하듯 황혜령 또한 그녀만의 삶이 있었다.

피로 점철된 자신의 인생에 황혜령을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그냥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타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그녀를 위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가령.’

황혜령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 보였다.

그거면 됐다.

네 사람은 동굴을 나왔다.

현재 그들이 있는 곳은 악양 외곽에 있는 야산이었다. 불과 며칠 전 담호와 방진보가 넘었던 그 산이었다.

한번 넘어 본 곳이기에 두 번 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무림맹의 추적이었다.

그들이 결코 추적을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건 세 살 먹은 아이도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황혜령과 묵일광은 둘째치고 담호는 강호의 공적으로 찍힌 상태였다. 그에게 청구 진인이 중상을 입고, 남궁수가 목숨을 잃었다.

이대로 그를 놓친다면 무림맹의 위신에 큰 금이 가게 된다.

이제 막 발족한 무림맹엔 큰 타격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담호가 황혜령과 묵일광에게 말했다.

“말에 타도록.”

“하지만…….”

“걸을 수 있다면 말리지 않지.”

담호의 말에 묵일광이 입을 다물었다.

현재 그의 몸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경공은 펼칠 수도 없고, 걷는 것도 쉽지 않았다.

황혜령을 지키기 위해 입은 내상 때문이었다. 그의 얼굴은 아직도 창백했다. 내상이 나으려면 족히 며칠은 운공을 해야 할 터였다.

담호가 황혜령을 바라봤다.

“너도 말을 타거라.”

“예!”

황혜령은 바로 대답했다.

담호를 바라보는 황혜령의 눈에는 신뢰의 빛이 가득했다.

단순히 자신과 묵일광의 목숨을 구해 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상하게 담호에겐 신뢰가 갔다.

이 사람이면 믿을 수 있다.

처음 본 그 순간부터 황혜령의 머릿속에는 그런 생각이 싹텄다.

왜인지 이유는 몰랐다. 하지만 황혜령은 자신의 직감을 믿을 뿐이다.

그녀에게 있어 담호는 믿고 신뢰할 수 있는 존재였다.

무엇보다 그를 보고 있자면 왠지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울컥 치솟아 올랐다.

그것이 어떤 감정인지는 황혜령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낯선 감정이 싫지 않았다.

담호는 황혜령을 흑귀에 태웠다. 묵일광은 방진보의 말에 탔다.

졸지에 걷게 되었지만 방진보는 전혀 기분 나쁜 표정이 아니었다. 담호와 오랜 시간을 함께하다 보니 걷고 뛰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체력도 부쩍 늘어나 오랜 시간을 걸어도 끄떡없었다.

묵일광이 방진보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네, 소형제.”

“아니에요.”

“나중에 이 은혜는 반드시 갚겠네.”

“헤헤!”

대답하기가 뭐해 방진보는 그냥 웃기만 했다.

“가자!”

담호가 흑귀의 고삐를 쥔 채 걸음을 옮겼다. 방진보가 묵일광이 탄 말의 고삐를 쥐고 그 뒤를 따랐다.

흑귀에 타고 있던 황혜령이 물었다.

“우리 어디로 가는 건가요?”

“황산.”

“황산이라면? 패왕채에 데려다주겠다는 건가요?”

“그래!”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그래도 된다.”

“오……라버니.”

담호의 무뚝뚝한 대답에 황혜령이 잠시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악양만 무사히 벗어나게 해 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인데 이곳에서 수천 리나 떨어진 패왕채에 데려다주겠다니. 사정을 모르는 황혜령으로서는 담호의 호의가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차마 거절할 용기가 없었다. 묵일광도 저렇게 심각한 내상을 입었고, 그녀 역시 운신이 불편했다.

“고마워요.”

담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앞만 보고 걸어갈 뿐이다.

“형!”

방진보가 옆으로 다가왔다.

그도 돌아가는 사정을 모르진 않았다. 담호가 강호의 공적으로 몰린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담호의 곁을 떠날 생각 따윈 없었다.

죽든 살든 끝까지 담호와 함께 갈 생각이었다.

“헤헤!”

방진보가 웃었다.

이젠 웃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황혜령이 의아한 듯 물었다.

“뭐가 그렇게 좋니?”

“그냥 형하고 같이 있는 게 좋아요.”

“그래?”

황혜령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떠올랐다. 왠지 방진보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담호는 무서운 사람이었다.

그가 적이라고 규정한 자에게 얼마나 무자비할 수 있는지 이미 두 눈으로 똑똑히 봐서 잘 알고 있었다.

그와 적이 된다는 것은 너무나 무서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가 한편이라고 생각하자 그렇게 든든할 수 없었다.

살면서 이렇게 안온한 기분이 든 것은 처음이었다. 상황은 최악이었지만 왠지 두렵지가 않았다.

그녀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어렸다.

황혜령은 한참 동안이나 담호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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