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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화 4장. 비워지는 만큼 채워지기 마련이다(1)
담호와 방진보는 각자 말고삐를 쥔 채 천천히 걷고 있었다. 말 위에서는 황혜령과 묵일광이 각자 운공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입은 내상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특히 묵일광이 입은 내상은 무척이나 심각한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가 익힌 내공이 흔들리는 말 위에서 운공해도 될 만큼 안정적인 것이라서, 길을 가는 내내 스스로 운기요상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덕에 묵일광의 상태는 급속도로 호전되고 있었다.
황혜령도 처음보다 한결 편해진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흑귀 위에 탄 채 담호를 내려다보았다.
말고삐를 쥔 채 묵묵히 길을 걷고 있는 담호의 뒷모습이 든든하게 느껴졌다.
이유는 몰랐지만 그를 보고 있자면 마음이 절로 따뜻해지고 보호를 받고 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이런 기분은 난생 처음이었기에 당혹스러움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 당혹스러운 기분조차 싫지 않았다.
황혜령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담호는 묵묵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던 담호가 갑자기 걸음을 멈춰 섰다.
그들이 가는 산길을 막고 서 있는 한 남자 때문이었다.
“형!”
방진보가 대번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욘석! 그새 더 살이 찐 것 같네.”
웃으며 방진보를 구박하는 남자는 바로 초연운이었다.
“쳇! 어디 살이 쪘어요? 빠지기만 했구만.”
“흐흐! 욘석아. 네 볼살이 얼마나 투실투실한지 모르지? 거울 좀 보고 이야기하거라.”
“정말, 오랜만에 만나서 구박할 거예요?”
“반가워서 그렇지.”
초연운이 방진보의 머리를 거칠게 헝큰 후 담호에게 다가왔다.
담호가 물었다.
“어떻게 찾았지?”
“친구가 가는 길이야 뻔하지. 조금만 머리를 쓰면 금방 알 수 있어.”
“그런가?”
“걱정하지 않아도 돼. 더 이상 추적자는 없을 테니까.”
“왜지?”
“아주 난리가 났거든. 자네가 일으킨 소란 따윈 아무것도 아니게 만들…….”
“…….”
“마교가 드디어 전면에 나섰어. 자네를 추적하기 위해 나섰던 무인들 중 삼백 명이 단 한 명에게 몰살당했어.”
“삼백 명?”
“그래! 십 리 안에 있던 모든 인물들이 죽었지. 그것도 단 한 명에게.”
담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쉽게 믿기 힘든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단 한 명에게 몰살당했다고?”
“믿기 힘들겠지만 사실이야. 상대는 음공의 고수일세. 예상치 못한 음공에 삼백여 명이 일순간에 씨 몰살을 당했어.”
“음공…….”
“실로 무시무시한 고수일세. 십 리 안에 있던 이들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어.”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소천산은 홀연히 사라졌다. 하지만 그가 사라지기 직전, 십 리 밖에 있어 화를 면한 무인 한 명이 목격을 했다.
소천산은 웃으며 그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강자로서의 여유를 보인 것이지만, 무림맹은 능욕을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때문에 무림맹이 난리가 났네. 단 한 명에게 무림맹 전체가 농락당하고 만 셈이니까.”
담호의 눈빛이 깊이 가라앉았다.
음유경과 신무월의 전음으로 나눈 대화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분명 그들의 전음에서 소천산이라는 단어가 언급이 되었었다.
‘그들은 분명 교주의 독주를 막아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마교 내에 내분이 있는 건가?’
아직 확실한 것이 아니었다.
“무림맹에 자네를 쫓기 위해 보냈던 추적조들을 모조리 불러들였어. 마교의 침공이 현실화되었으니 당분간은 자네에게까지 신경을 쓰지 못할 거야.”
“그런가?”
“다행이야. 자네에게도, 무림맹에도.”
사실 가장 곤란했던 이는 바로 초연운이었다.
담호를 쫓기 위해 만들어진 이십여 개의 추적조. 초연운은 그중 하나를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이끌어야 했다.
십여 개의 추적조가 소천산에게 몰살을 당했을 당시, 그는 그곳에서 불과 수백여 장 밖에 있었다.
만일 조금만 더 가까이 있었다면 그도 소천산의 음공에 큰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목숨은 건졌지만 그가 받은 충격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 숨 쉬고 대화를 나누었던 이들이 음공 한 번에 몰살을 당했다는 것은 그에게도 큰 두려움을 안겨 주었다.
“수십 년 전 마교의 일차 침공 때도 정의맹에 가장 많은 피해를 입힌 자는 바로 음공을 익힌 괴물이었어. 아마 십리무생이라는 자도 그와 똑같은 음공을 익혔을 거야.”
“…….”
“아무튼 난 이만 돌아가 봐야 해.”
“마교와 싸우려는가?”
“백전문의 제자이니까. 지금쯤 사부도 제자들을 이끌고 무림맹으로 오고 계실 거야.”
장일산의 마교에 대한 증오심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그는 마교가 등장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백전전승기를 내세운 채 남하하고 있었다.
일단 백전전승기가 세상에 나온 이상 백전문의 제자들은 반드시 깃발 아래 모여야 했다. 그것은 소문주인 초연운도 예외는 아니었다.
담호는 말없이 초연운을 바라봤다. 그러자 초연운이 피식 웃었다.
“거, 눈길 한번 뜨겁구만.”
“…….”
“조심해! 마교 때문에 자네에 대한 관심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무림 공적이니까.”
초연운의 얼굴에는 진심으로 걱정하는 빛이 담겨 있었다.
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잘 가.”
“조심하도록.”
순간 초연운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설마 담호에게서 조심하라는 이야기를 들을 줄은 몰랐다.
“하하! 걱정하지 말라고. 난 초연운이야.”
초연운이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호언장담을 했다. 담호는 그런 초연운의 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그럼 잘가라구. 뚱보도 몸조심해라.”
“뚱보 아니라니까요.”
“하하!”
초연운이 손을 흔들며 멀어졌다.
담호와 방진보는 초연운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봤다.
마침내 초연운이 사라지자 황혜령이 입을 열었다.
“정말 좋으신 분 같아요.”
“그래!”
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만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초연운은 늘 진심으로 대했다. 강호에 그런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친구라…….’
담호가 움직인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였다.
초연운의 말처럼 더 이상 그들을 추격하는 자는 없었다. 방진보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더 이상 담호에게 죽는 사람이 없을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다.
아무리 담호에게 익숙해져 있는 방진보라지만 눈앞에서 사람이 계속 죽어 나가는 것을 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헤헤!”
방진보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초연운과 헤어진 후 담호와 방진보 등은 빠른 속도로 야산을 빠져나와 마침내 호북성에 입성할 수 있었다.
호북성에 들어와 가장 먼저 들은 소문은 역시 마교에 관한 것이었다.
십리무생 소천산이 남긴 충격은 그야말로 엄청난 것이었다. 그 한 명으로 인해 중인들은 마교의 무서움을 실감하게 되었다.
중원 어디를 가나 마교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이뤘고, 사람들은 언제 마교의 본격적으로 침공을 해 올 줄 몰라 두려워했다.
“마교라니.”
황혜령이 고개를 내저었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그녀 역시 마교가 얼마나 무서운지는 잘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황경문이 귀 아프게 이야기해 주었기 때문이다.
세상 두려울 것 없다는 황경문도 마교라는 단어를 이야기할 때면 자신도 모르게 두려운 빛을 하곤 했다. 그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황혜령의 가슴에도 어느새 두려움이 싹 텄다.
‘이번에는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을까?’
상상하는 것만으로 가슴이 암담해졌다.
황혜령이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쉴 때였다.
“오늘은 이곳에서 노숙을 하자.”
담호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전에 울려 퍼졌다.
정신을 차린 황혜령이 주위를 둘러봤다.
담호가 멈춰 선 곳은 이름 모를 강가의 갈대숲 근처 공터였다. 갈대가 주위를 에워싸고 있어 꽤나 아늑해 보이는 곳이었다.
노숙을 하기로 결정하자 방진보가 묵일광을 향해 다가갔다.
“형!”
“으응?”
묵일광이 영문을 몰라 눈을 끔뻑거렸다.
보기만 해도 험상궂은 묵일광이었다. 평범한 사람은 묵일광의 얼굴만 봐도 오줌을 지리기 일쑤였는데 방진보는 너무 편히 그를 대하고 있었다.
‘이 아이는 내가 두렵지 않나?’
그런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묵일광은 몰랐다. 방진보가 담호를 따라다니면서 얼마나 신경이 두터워졌는지.
외모가 아무리 험상궂어도 담호의 무서움에 비할 수는 없었다. 담호는 방진보가 아는 가장 무서운 사람임과 동시에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묵일광이 아무리 무서워도 담호에는 비할 수 없었다. 그러니 묵일광 앞에서도 편히 행동할 수 있었다.
“모닥불은 피우실 줄 알죠?”
“그럼!”
“잘됐네요. 형이 모닥불 좀 피워 주세요.”
“너는?”
“저는 저녁거리 좀 잡으려구요.”
“저녁거리?”
“예! 강도 크고 하니 먹을 만한 고기들이 제법 있을 거예요.”
방진보는 낚시를 할 생각이었다.
악양에 있을 때 낚시를 할 만한 실과 바늘을 사 두었다.
방진보는 기다란 막대기를 주어와 실과 바늘을 달았다. 이곳에 오기 전 들렀던 마을에서 산 돼지비계를 곡물에 묻혀 바늘에 끼웠다.
황혜령은 능숙하게 낚시 준비를 하는 방진보를 신기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나도 낚시하는 데 같이 가도 돼?”
“그럼요.”
방진보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함께 강기슭으로 걸어갔다.
졸지에 담호와 둘만 남게 된 묵일광의 표정이 어색하게 변했다.
등룡대의 무인으로 두려울 것이 없었던 묵일광이었다. 하지만 담호는 그가 이제까지 보아 온 그 어떤 무인들과도 달랐다. 그는 묵일광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유일한 무인이었다.
묵일광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혀, 형님.”
담호가 말없이 빤히 바라봤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새까만 눈동자. 그 속엔 그 어떤 감정의 편린도 존재하지 않았다.
“자, 잠깐 나무 좀 주워 오겠습니다.”
묵일광이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담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묵일광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급히 자리를 떴다.
홀로 남게 된 담호가 강가를 바라봤다.
방진보와 황혜령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낚시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담호의 눈에 감정의 편린이 떠올랐다.
거의 이십여 년 만에 만나는 동생이었다. 하지만 동생은 그의 존재조차 몰랐다.
어쩌면 그것이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담호와 헤어졌을 당시 황혜령은 겨우 두세 살에 불과했다.
담호는 물론이거니와 부모의 얼굴도 기억 못 하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담호는 황혜령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미와 아비가 그녀를 얼마나 아꼈는지도.
아비는 담호에게 황혜령을 잘 돌보라면서 항상 이렇게 말했다.
‘내가 없으면 네가 집안의 가장이다. 으하하!’
아비는 항상 그렇게 말하곤 했었다.
이제는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 얼굴도 잘 떠오르진 않지만, 아비의 호탕한 웃음과 땀이 섞인 체취는 이상하리만큼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이제 와서 황혜령에게 오빠라고 밝힐 생각은 없었다.
그러기에는 너무 다른 삶을 살아왔다. 그저 이제까지 그래 왔듯이 앞으로도 각자의 삶을 잘 살길 바랄 뿐이었다.
‘가령.’
지금은 황혜령이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는 담가령. 그녀에겐 낯선 오빠의 존재는 필요가 없을 듯했다.
담호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묵일광이 나뭇가지를 한 아름 안고 돌아왔다.
묵일광은 능숙하게 나뭇가지에 불을 붙였다. 묵일광이 모닥불을 피웠을 때 방진보가 황혜령과 함께 돌아왔다.
방진보의 손에는 제법 큼직한 잉어가 들려 있었다.
잡자마자 강가에서 비늘을 벗기고, 배를 가르고 내장을 긁어냈다.
“오늘은 잉어구이에요.”
방진보가 잉어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는 각종 향신료와 말린 곡물들을 꺼내 잉어의 뱃속에 꽉꽉 채웠다. 그런 후 강가의 진흙을 긁어모아 잉어의 표면에 두텁게 발라 모닥불 위에 올려놓았다.
방진보는 잠시도 시간을 허투로 소비하지 않았다. 잉어구이가 익기를 기다리면서 곡물 가루로 죽을 끓였다.
순식간에 완성되는 요리를 보면서 황혜령과 묵일광이 입을 떡 벌렸다.
“소형제는 진정한 천재군.”
묵일광이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황혜령도 그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입안에 침이 가득 고였다.
잠시 후 두 사람의 탄성이 갈대숲에 울려 퍼졌다.
“와아! 정말 끝내주는걸.”
“맛있어.”
담호는 잉어구이를 오물거리면서 행복해하는 황혜령의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