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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화 4장. 비워지는 만큼 채워지기 마련이다(2)
황산(黃山)은 중원에서도 손에 꼽히는 명산이었다.
태산, 화산, 형산, 항산, 숭산 등 오악(五嶽)을 모두 합쳐도 황산 하나만 못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황산의 풍경은 압도적이었다.
일 년에 반 이상은 산봉우리에 구름이 걸쳐져 있어 운산(雲山)이라고 불리는 황산은 금방이라도 신선이 내려와 구름 위를 걸을 듯 신비로웠다.
험하기로는 천하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고, 아름답기로는 천하의 수많은 산들 주 으뜸인 황산. 그곳에 녹림십팔채의 총본산인 패왕채가 있었다.
황산의 안방을 차지하는 자는 곧 녹림의 정상에 군림한다.
오랜 기간 동안 이어져 내려온 녹림의 불문율이었다.
패왕채의 당대 주인은 패왕도 황경문이었다.
녹림이 배출한 가장 완벽한 무인. 수만 녹림의 정점에 선 지배자. 그가 바로 황경문이었다.
황경문은 칠 척에 이르는 건장한 체구의 소유자였다. 육십이 넘은 나이에도 젊은이와 다름없는 탄탄한 근육을 자랑했고, 수만 녹림의 지배자다운 굴강한 기도를 가지고 있었다.
황경문의 거처는 패왕채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창문을 활짝 열면 황산의 운해가 한눈에 들어왔다.
“허! 장관이구나.”
끝없이 펼쳐진 구름의 바다에 황경문이 탄성을 토해 냈다.
패왕채의 주인이 된 이후 늘 보는 풍경이었지만, 볼 때마다 새롭게 느껴지는 운해였다.
특히 해가 질 때면 운해가 붉게 물들어서 장관을 연출했다. 황경문이 가장 좋아하는 광경이기도 했다.
한참이나 운해를 바라보던 황경문이 문득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나저나 이 말괄량이는 잘 있는지 모르겠구나.”
허락도 없이 산을 내려간 그의 외동딸.
호위로 묵일광을 붙여 두었으니 그리 걱정할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마음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세상 구경은 대충하고 어서 돌아올 것이지. 계집이 겁도 없이……. 쯧!”
수만 녹림도의 생사여탈권을 한 손에 쥐고 패왕도라는 무시무시한 별호로 불리고 있었지만 그도 결국 피와 살로 이뤄진 인간이었다. 혈육의 정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황혜령을 떠올릴 때면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늘그막에 얻은 딸 황혜령은 그가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였다.
“어서 좋은 짝이 나타나야 할 텐데.”
그가 중얼거릴 때였다.
“형님.”
밖에서 심복 윤충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게.”
황경문은 순식간에 절대자로서의 위엄을 되찾았다.
윤충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황경문과 삼십 년을 함께해 온 윤충이었다. 비록 황경문만큼은 아니었지만 그 역시 녹림에서 잔뼈가 굵은 무인이었다.
그는 황경문의 좋은 조력자임과 동시에 훌륭한 견제자였다. 그가 있기에 황경문은 균형감 있게 녹림을 이끌어 올 수 있었다.
윤충을 보자 황경문이 미소를 지었다.
“무슨 일인가? 충.”
공적으로는 총채주와 부채주였지만, 사적으로는 가장 믿을 수 있는 의형제 사이였다. 둘 사이에는 허물이 없었다.
“흑수채를 비롯한 다섯 명의 채주들이 면담을 청했습니다. 형님.”
“흑수채라면 역시 그녀석인가?”
“예! 조윤산입니다.”
“흠! 기어이 일을 저지르려는 건가?”
황경문이 미간을 찌푸렸다.
흑수채는 녹림십팔채 내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전력을 보유한 거대 산채였다. 당연히 그들의 동향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조윤산의 야망이 크다는 것은 진즉에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능력도 인정하고 있었다.
맨 밑바닥에서 시작해 흑수채의 채주 자리까지 오른 조윤산이었다. 그 집요함과 능력만큼은 인정해 줄 만했다.
“그래, 어디까지 왔는가?”
“한 사나흘이면 도착할 듯싶습니다.”
“명분은?”
“마교입니다.”
“적절하군. 명분을 잘 잡았어.”
“마교에 대응할 방법을 찾자는 건데 거절할 명분이 없지요.”
“확실히 똑똑한 녀석이야. 그렇지 않은가?”
“아까울 정도입니다.”
“그래!”
황경문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그의 전신에서는 절대자다운 묵직한 기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조윤산……. 반골만 아니었어도 진즉에 후계자로 지목했을 텐데.”
“어떻게 할까요?”
“마교에 대항할 방법을 찾자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안으로 들이게.”
“알겠습니다. 만반의 준비를 해 두겠습니다.”
“혹시 모르니 등룡대도 소집하게.”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윤충이 대답과 함께 물러났다.
홀로 남은 황경문이 다시 운해에 시선을 던졌다.
해가 지고 있었다.
온 세상이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아름답구나. 마지막을 불태우는 것은 뭐든지 아름다운 법이지.”
***
타닥! 타닥!
타오르는 모닥불 주위로 담호와 방진보, 황혜령과 묵일광이 둘러앉아 있었다.
황혜령과 묵일광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빛이 가득했다.
방진보가 내놓은 잉어구이와 죽은 그야말로 황홀경, 그 자체였다. 잉어 살점은 입에 들어가자 살살 녹았으며, 갓 만든 죽은 큰 포만감을 주었다.
더불어 손상되었던 원기가 많이 회복이 되었다.
“대단하네, 소형제.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
“뭘요.”
방진보가 손가락으로 코를 문질렀다. 그러면서도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사실 굳이 낚시까지 하면서 잉어를 잡은 이유는 황혜령과 묵일광의 원기를 회복시켜 주기 위함이었다.
잉어는 예로부터 보양식으로 유명했고, 거기에 아비 방우광의 비법을 첨가했다.
“헤헤!”
칭찬을 듣자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기분 좋은 것은 두 사람의 원기가 많이 회복한 듯한 모습이었다.
‘음식보양(飮食補陽)이야말로 앞으로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야.’
방진보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방진보는 목표를 세우고 착실히 혼자만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담호는 그렇게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방진보를 존중했다. 방진보는 충분히 존중받을 만한 자격을 가지고 있었다.
담호는 타오르는 모닥불을 조용히 바라봤다. 불빛이 일렁이며 그의 얼굴에 강렬한 음영을 만들어냈다.
그때였다.
“오라……버니.”
황혜령이 담호를 불렀다.
담호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자 황혜령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 가지만 물어봐도 돼요?”
“말하거라.”
“저희를 왜 도와주시는지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
“아무리 생각해도 오라버니가 저희를 도와줄 이유가 없어서 그래요. 위험도 너무 크고.”
그녀의 목소리엔 미안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담호가 그런 황혜령을 빤히 바라봤다.
여전히 무감각한 눈빛이다. 그런 담호의 눈빛이 부담스러울 만도 하건만 황혜령은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는 너는 왜 나를 오라버니라고 부르느냐?”
“그거야…… 왠지 남 같지 않아서…….”
“나도 그렇다.”
“예!”
황혜령이 대답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그다지 친절한 답변은 아니었지만, 왠지 이해가 되었다. 이상하게도…….
“밤이 늦었다. 내일도 먼 길을 걸어가야 할 테니 어서 잠을 자거라.”
“예!”
황혜령이 조그만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배가 부르니 잠이 밀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자리에 눕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담호는 그런 황혜령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방진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담호의 행동이 평상시와 다르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다른 것인지는 그도 확실히 알지 못했다.
담호가 고개를 돌려 묵일광을 바라봤다. 그러자 묵일광이 바짝 허리를 곧추세웠다. 담호의 눈빛을 보는 것만으로 절로 긴장상태가 된 것이다.
“말해 봐.”
“무, 무얼 말입니까?”
“다.”
“예?”
“전부! 네가 아는 모든 것을.”
담호의 나직한 목소리에 묵일광은 전신의 솜털이란 솜털이 송두리째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살의와 적의로 범벅이 된 거친 숨결을 흘리는 거대한 짐승이 그의 코앞에 웅크리고 있었다.
살아 있는 생명을 잡아먹고 난 후에야 흘러나오는 역한 비린내가 담호의 숨결에 녹아 있는 듯했다. 그래서 더욱 소름이 끼쳤고,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현재 녹림의 상황은…….”
묵일광은 정신없이 자신이 아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두서도 없었고, 이야기가 정돈되지도 않았다. 그만큼 묵일광은 심한 압박감을 받고 있었다.
이제까지 묵일광은 지금처럼 누군가에게 압박감을 받을 거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녹림의 지배자인 황경문을 존경하지만, 그에게서도 이 정도의 압박감을 받은 적은 없었다.
무공은 누가 더 강할지 모르지만 사람의 심혼을 욱죄어 오는 존재감만큼은 담호가 훨씬 우위였다.
인간의 껍질을 쓰고 있었지만, 그를 똑같은 인간으로 봐야 할지 의문이 들었다.
묵일광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계속해서 떠들었다. 담호는 팔짱을 낀 채 묵일광의 이야기를 들었다.
중구난방에 그 어떤 개연성도 없는 설명이 대다수였지만, 담호는 그중에서도 쓸 만한 정보를 추려내고 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묵일광이 마침내 맘을 멈췄다. 그런 그의 전신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담호가 입을 열었다.
“그만 쉬도록 해.”
“예! 감사합니다, 형님!”
묵일광이 자신도 모르게 소리 높여 외쳤다.
“…….”
“형……님이라고 부르면 안 될까요?”
묵일광의 목소리가 끝으로 갈수록 모기소리처럼 조그맣게 줄어들었다.
담호가 묵일광을 빤히 바라봤다. 순간 묵일광은 등 뒤로 한 줄기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험상궂은 얼굴을 소유하고 있었다. 오죽했으면 갓 태어난 그를 본 어미가 그 자리에서 졸도했을까.
성장하면서 외모는 더욱 험악해졌다. 누구도 감히 눈을 마주칠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위압감이 흘러나왔다.
그런 그가 담호 앞에서는 꼬리를 만 개처럼 순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성격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봤다면 경악할 만한 광경이었다.
담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알아서 불러.”
허락의 뜻으로 알아들은 묵일광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감사합니다, 형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그런 묵일광의 순수한 모습에 방진보가 ‘풋’ 웃음을 터트렸다.
담호가 강 쪽으로 걸어갔다. 날이 더워 세수라도 하려는 것이다.
담호가 강물에 고개를 처박았다.
찬물이 얼굴에 닿으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담호는 강가에 앉아 어둠이 내려앉은 수면을 바라봤다. 흔한 불빛조차 없이 오직 깜깜하기만 한 강을 바라보는 담호의 눈빛도 그만큼 깊어졌다.
‘조윤산……. 단순한 도적이 아니었단 말이지?’
그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조윤산은 꽤나 큰 야심가였다.
그는 애초부터 한낱 도적에 안주할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도적으로 수많은 약탈과 살육을 자행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정에 불과할 뿐이다.
그의 최종목적은 녹림의 총채주가 되어 수만 명의 녹림도 정점에 서는 것이었다.
그는 현재도 자신의 목표를 위해 충실히 나아가고 있었다.
혼자의 힘으로 기어이 흑수채의 채주가 되었고, 많은 녹림의 산채를 자신의 영향력하에 두었다.
아예 모르는 남이었다면 차라리 존경스러웠을 만큼의 집요함과 불같은 추진력이었다.
‘그래! 그 정도는 되어야지.’
담호는 웃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그의 이빨이 유독 새하얗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