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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138화 (138/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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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화 5장. 바람은 끊임없이 거목의 가지를 흔든다(1)

운남성 애뇌산(哀牢山)은 험산이었다.

산세가 깊고 험해서 사람의 발길이 닿기 쉽지 않은 데다 봉우리엔 사시사철 운무와 구름이 끼어 그 실체를 확인하기가 쉽지 않았다.

천화궁(天華宮)은 애뇌산 정상에 자리를 잡은 신비지문이었다. 평소 강호의 일엔 그리 나서지 않는 편이지만, 그래도 지닌바 저력이 대단해서 누구도 쉽게 보지 않았다.

천화궁은 구대문파 중 하나이자 같이 운남성에 적을 두고 있는 점창파와는 꾸준히 교류를 해 왔기에 정도의 문파로 인식되고 있었다.

천화궁은 전통적으로 남자 문도보다 여자 문도가 훨씬 더 많았다. 때문에 궁주도 대부분 여인이 차지했다.

천화궁의 당대 궁주는 장화경이었다.

장화경은 육십이 넘은 나이에도 사십 초반으로 보일 정도로 고강한 내공의 소유자였다.

천화궁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운조각(雲造閣)은 그녀의 거처나 마찬가지였다.

기쁜 일이 있을 때도, 슬픈 일이 있을 때도 장화경은 운조각에서 생각을 정리하곤 했다. 그만큼 장화경에게 운조각은 익숙한 곳이었다.

장화경은 오늘도 운조각 앞의 정원을 걷고 있었다.

아름다운 장원은 그녀가 평생을 가꿔 온 곳이었다. 운남성에서도 보기 힘든 각종 기화요초가 가득해서 천상의 화려함을 자랑했다.

장화경이 허리를 숙이고 바위틈에 홀로 나 있는 조그만 난을 바라보았다.

“조금 있으면 천상화가 꽃을 피우겠구나.”

이 조그만 난초가 하늘에 내린 꽃이라 불리는 귀물이었다. 그녀는 이 난을 저 멀리 천산의 험한 산속에서 힘겹게 구했다.

차가운 곳에서만 자라던 천상화가 사시사철 따뜻한 기후인 운남성에서 뿌리를 내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장화경은 그야말로 지극정성으로 난을 키웠다. 그렇게 몇 년을 노력한 끝에야 결실을 맺게 되었으니 그녀의 기분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천상화는 하늘이 내려 주는 꽃이라고 했다. 그리고 천상화가 피면 큰 행운을 가져온다는 전설이 있었다.

“어떤 행운을 내려 주려나?”

장화경이 미소를 지으며 천상화를 어루만졌다. 그러자 천상화의 잎이 수줍은 듯이 파르르 떨었다.

그녀가 그렇게 한참 천상화의 잎을 감상하고 있을 때였다.

쿠웅!

갑자기 강렬한 기파가 느껴졌다.

천화궁의 정문이 있는 방향이었다.

“무슨?”

장화경의 안색이 싹 변했다.

심장을 옥죄어 올 만큼 살벌한 기파에 전신의 소름이 다 올라오고 있었다.

댕댕댕!

이어 비상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대적이 쳐들어올 때만 울리는 종이었다.

“누군가? 감히 천화궁에 침입하다니.”

그녀가 서둘러 정문을 향해 달려갔다.

“궁주님!”

천화궁의 제자들이 속속 그녀에게 합류했다.

수명이 수십 명이 되었고, 종내에는 수백 명으로 불어났다.

그들의 전신에서는 실로 살벌한 기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천화궁의 정문에 도착했다.

정문을 보는 순간 장화경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평상시 천화궁을 지켜야 할 무인들이 모조리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바닥엔 선혈이 낭자했고, 거대한 정문은 산산조각 부서져 형태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평상시라면 경계를 서는 무인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 붉은 피풍의를 걸친 무인들이 서 있었다.

그들의 수는 겨우 백여 명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들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도는 숨이 턱 막힐 정도로 강력했다.

그 중심에 붉은 안광을 흩뿌리는 남자가 있었다.

그의 손에는 용이 휘감는 문양이 양각된 창이 들려 있었는데, 창에서는 실로 살벌한 예기가 흘러나왔다.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꿰뚫릴 것 같은 압도적인 존재감. 가히 신창이라 불릴 만한 무기였다. 그런 신창의 주인이 범상할 리 없었다.

장화경은 끓어오르는 노기를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그대는 누구이기에 감히 천화궁에서 난동을 피우는 건가?”

“내 이름은 운두광이라고 한다.”

“운두광.”

“그렇다. 아마 들어 보지 못했을 거야. 세상에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니까.”

장화경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우리가 원한이 있던가?”

“전혀!”

“그런데 왜?”

“출사표엔 어울리는 제물이 필요한 법이니까.”

“출사표?”

“그래야 한다고 교주께서 말씀하시더군.”

“교주?”

순간 장화경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세상에 수많은 문파들이 존재하지만, 문파의 수장을 교주라고 부르는 단체는 거의 없었다.

교주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는 단체는 단 하나.

바로 마교뿐이었다.

“마, 마교에서 나왔는가?”

“눈치가 아예 없는 건 아니군.”

“마교가 왜?”

“말했잖은가? 출사표를 던지기 위해선 제물이 필요하다고.”

운두광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그러자 찐득한 살기가 흘러나와 일대를 잠식했다.

“헉!”

“으음!”

무방비로 살기에 노출된 천화궁 무인들이 흠칫 몸을 떨었다.

“마교가 기어이 야욕을 드러낸 것인가?”

“먼저 건드린 것은 너희들이야.”

“그게 무슨?”

“너희들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이제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조용히 살았을 텐데.”

운두광이 힘주어 창을 잡았다. 창을 꼬나 잡은 손등 위로 지렁이 같은 굵은 힘줄이 툭툭 불거져 나왔다.

“흥! 비겁하게 핑계를 대는 건가? 마교가 왜 본궁을 제물로 노렸는지 모르지만, 본궁이 그리 녹록한 상대가 아니란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장화경이 손을 치켜 올렸다. 그러자 천화궁의 무인들이 무기를 빼 들며 운두광과 마교의 무인들을 겨눴다.

운두광이 창을 든 채 포권을 취했다.

“본인은 신교의 은룡전주(隱龍殿主) 운두광, 교주님을 대신해 천화궁을 세상에서 멸하겠다.”

“어림없다. 본궁의 저력을 우습게 보지 마라. 전 문도는 마교도를 멸하라.”

장화경이 코웃음을 치며 명했다.

“와아아!”

“마교도를 물리쳐라.”

천화궁의 무인들이 기세를 올리며 마교의 무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때까지도 운두광의 등 뒤에 도열해 있던 마교의 무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이 움직인 것은 운두광의 명령이 떨어진 직후였다.

“신교의 이름으로 천화궁을 멸한다. 성전을 치러라.”

“존명!”

쉬쉭!

이제까지 숨소리 하나 내지 않던 무인들이 붉은 피풍의를 휘날리며 천화궁의 무인들을 향해 달려 나갔다.

촤학!

양손이 피풍의 밖으로 뻗쳐 나왔다. 그들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세 개의 검 날이 발톱처럼 달려 있는 추혼조(追魂爪)라는 기문병기였다.

근거리의 접전에서 막대한 위력을 발휘하지만 익히기가 쉽지 않고, 실전에서 사용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워 강호에서 자주 접하기 힘든 무기였다.

마교의 무인들은 추혼조를 능숙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쉬가악!

“크억!”

“아악!”

추혼조가 허공을 가를 때마다 천화궁의 무인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족족 죽어 나가는 것은 천화궁의 무인들이었고, 마교의 무인들은 별반 상처도 입지 않았다.

마치 양 떼 속에 뛰어든 늑대 무리처럼 그들은 압도적인 무위를 발휘하고 있었다.

“이익!”

장화경이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질겅 깨물었다.

그녀의 눈앞에서 제자들이 죽어 나가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그녀가 노성을 터트렸다.

“가만두지 않겠다. 마교의 주구여.”

그녀의 새하얀 손이 허공을 갈랐다.

제마현현수(制魔現玄手). 천화궁의 궁주만이 익힐 수 있는 절학이 펼쳐진 것이다.

슈와악!

그녀의 수영(手影)이 허공을 온통 뒤덮었다.

절정에 달한 제마현현수는 집채만 한 바위도 가루로 만들 만한 위력을 갖고 있었다.

그 순간 운두광이 손에 들고 있던 창을 허공으로 내질렀다.

창신을 타고 일어난 붉은 빛 무리가 창날을 통해 뻗어 나왔다.

창기(槍氣)가 발출된 것이다.

멸화창(滅火槍) 제오식 혈화우(血花雨), 운두광의 절학이었다.

콰아아아!

두 거대한 기운이 허공에서 격돌했다.

눈부신 빛이 터져 나오고, 사방으로 후폭풍이 몰아쳤다.

몇몇 이들은 후폭풍에 휩쓸려 바닥을 나뒹굴었고, 간신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담벼락이 송두리째 무너져 내렸다.

쿵!

뒤이어 누군가 둔중한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추락했다.

“끄으으!”

신음을 흘리며 간헐적으로 꿈틀거리는 여인은 바로 천화궁주 장화경이었다.

그녀의 오른팔은 어깨에서부터 잘려 나가 보이지 않았고, 전신은 피투성이여서 본래의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아아!”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제자들이 죽어 가고 있었다.

수백 년 역사의 천화궁이 무너지고 있었다.

운두광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싸늘히 중얼거렸다.

“그리 억울해 하지 않아도 될 게야. 많은 문파들이 천화궁처럼 무너질 테니까.”

“아, 악마들!”

“우린 모든 것을 잃고 세상 끝에 숨어 살았다. 그곳이 마지막으로 남은 우리의 안식처였지. 그런데 너희들은 기어이 그곳까지 따라왔어. 그리고 우리의 마지막 안식처마저 빼앗아 갔지. 우리에게 남은 것은 마지막 자존심과 독기 하나뿐. 누구라도 그런 상황이 되면 악마가 될 수밖에 없을 거야.”

“크으!”

“악마라고 해도 좋고, 강호를 혈난으로 몰아넣었다고 매도해도 좋아. 우리에게도 싸워야 할 절실한 이유가 있으니까.”

생존을 위한 싸움이다.

수많은 이들이 이 땅에 피를 흘릴 것이다.

그로 인해 신교가 마교라는 오명을 영원히 뒤집어쓰더라도 말이다.

“한 명도 살려 두지 마라. 신교에 반하는 자, 모두가 이렇게 될 것이라는 본보기를 보여 줘라.”

운두광의 지상 명령이 떨어졌고, 그날 천화궁은 단 한 명의 생존자도 남기지 못하고 멸문당했다.

***

운무에 휩싸인 연화봉 정상의 상궁에는 지금 화산파의 수뇌부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수많은 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지만 누구 한 명 숨소리 크게 내지 않고 있었다.

천화궁의 멸문은 천하에 큰 충격을 던져 줬다.

비록 세상사에는 잘 관여하지 않아 신비지문으로 분류되었지만 그들의 전력은 중원의 어지간한 문파들을 능가했다.

그런 천화궁이 단 하룻밤 만에 멸문을 당했다. 살아남은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주춧돌 하나까지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그 때문에 천하 각 문파들은 초비상이 걸린 상태였다. 화산파도 마찬가지였다.

수십 년 전에 마교와의 싸움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었기에 그들이 느끼는 두려움과 분노는 더욱 컸다.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던 현천 진인이 입을 열었다.

“마침내 마교의 침공이 현실화되었네. 오늘은 천화궁이지만, 내일은 누가 그들의 먹잇감이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네. 어쩌면 우리 화산파가 될 수도 있겠지.”

“으음!”

장로들은 입을 열지 못했다.

말은 안 했지만 사태의 심각성은 그들이 제일 잘 느끼고 있었다.

현천 진인이 그런 장로들을 둘러보며 명을 내렸다.

“무림맹에 파견한 제자들을 제외한 전 제자들을 화산으로 불러들이게.”

“알겠습니다.”

“그리고 현검 사제에게도 전하게. 이제 폐관을 그만 끝내야 할 때라고.”

“예!”

현검 진인은 화산 제일의 검객. 화산을 마교의 침공에서 지키기 위해선 반드시 그의 힘이 필요했다.

그때 누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뭔가?”

“천경은 어쩌시렵니까?”

입을 연 이는 화산 제일 아래에 있는 태평궁의 궁주인 현경 진인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현경 진인에게 집중됐다. 그가 언급한 천경은 다름 아닌 담호이기에.

권마 담호.

현 강호를 가장 뜨겁게 달구는 이름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떠안기에 부담스러운 존재이기도 했다.

더군다나 얼마 전 호기롭게 강호에 나갔던 명경이 돌아왔다. 명경은 스스로 담호에게 패했음을 알리고 폐관 수련에 들어갔다.

일련의 사건이 화산파에 던져 준 충격은 그야말로 엄청난 것이었다. 그 때문에 두 사람 이상만 모이면 갑론을박이 오갔다.

어떤 이들은 담호를 화산파의 제자로 인정해야 한다고 했고, 또 어떤 이들은 강호의 공적으로 지목된 담호를 떠안을 수 없다고 했다.

그들의 의견은 모두 일리가 있어 화산파의 수뇌부들도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떠안기엔 너무 뜨겁고, 없으니 아쉬운 존재.

지금 화산에서 담호의 위치가 그랬다.

화산파의 수뇌부들은 담호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의 거취에 대해 의논했다. 하지만 회의가 끝날 때까지도 어떤 결론도 나오지 않았다.

회의를 주재하는 현천 진인의 눈빛이 깊이 가라앉았다.

‘운경이 부디 현소 사제를 찾아와야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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