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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139화 (139/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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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화 5장. 바람은 끊임없이 거목의 가지를 흔든다(2)

황산엔 칠십이 개의 봉우리가 존재했고, 두 개의 커다란 호수가 있었다. 세 개의 커다란 폭포와 열여섯 개의 내천을 품고 있으니 그 규모가 실로 어마어마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곳이 바로 비취곡(翡翠谷)이었다. 물이 비췻빛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 비취곡이었고, 그 이름이 부끄럽지 않게 옥빛의 물은 커다란 소를 이루며 끝없이 이어졌다.

담호와 일행들은 비취곡이 끝나는 곳에 있는 조그만 마을에 들어와 있었다. 마을이라고 해 봐야 겨우 오십여 가구 이백여명 정도의 인원이 살고 있는 조그만 곳이었다.

그래도 마을에는 작은 객잔이 있어 나그네들이 쉬어 가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담호와 일행은 이름조차 없는 조그만 객잔에서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황산에 도착하자 황혜령과 묵일광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가까이 황산이 보이고 있었다. 이곳은 황산의 안마당이나 다름없었다.

“아가씨!”

객잔의 주인이 살갑게 웃으며 황혜령에게 인사를 해 왔다.

겉보기엔 언뜻 평범한 객잔으로 보이지만, 이곳의 주인은 패왕채와 연관이 있는 자였다.

황산 주위엔 이런 객잔들이 많이 존재했다. 그들은 패왕채의 눈과 귀가 되어 수상한 사람들이 나타나면 제일 먼저 알려 왔다.

담호와 황혜령이 잠시 쉬어 가는 객잔도 그런 곳 중 하나였다. 당연히 객잔의 주인과 황혜령은 친분이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아저씨.”

“하하! 또 가출했다고 들었습니다. 괜찮으십니까?”

“그런 이야기는 또 누구한테 들었데요?”

“황산 인근에 소문이 자자합니다.”

“피!”

객잔 주인의 농담에 황혜령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엔 여전히 미소가 어려 있었다.

“패왕채엔 별일 없죠?”

“하하! 물론이지요. 누가 감히 패왕채를 건들겠습니까? 채주님도 건강하시니 걱정하실 것 하나 없습니다.”

“그런가요?”

“채주님께서 걱정 많이 하신다 들었습니다. 어서 올라가십시오.”

“그럴게요. 아저씨가 맛있는 점심만 주신다면요.”

“하하! 어느 분의 명이라고 거부할까요? 당연히 내드려야죠.”

객잔 주인이 호탕하게 웃으며 주방으로 걸어갔다.

황혜령이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두발을 까닥거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엔 여유가 넘쳐흘렀다.

열린 창문 너머로 웅장한 황산이 보였다. 비록 운무에 가려 정상은 보이지 않았지만, 황혜령의 눈에는 선명히 보이는 듯했다.

근 이십여 년을 살아온 곳이었다. 조그만 돌멩이 하나, 풀 한포기 위치까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고향에 돌아오는 것은 좋은 거구나.”

황혜령의 목소리에 생기가 넘쳐흘렀다.

담호는 황혜령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췻빛 물이 빛의 편린을 반사하며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그 때문에 담호의 눈에도 비췻빛이 감돌았다.

마교가 전면에 나서면서 세상은 혼돈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제껏 강호를 지탱해 오던 수많은 문파들이 전쟁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물자를 모으고, 외부에 나가 있던 제자들을 소집하면서 강호 전체에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그 때문에 일반 백성들의 삶도 크게 고단해진 것이 사실이었다. 무림인들의 신경이 바짝 곤두서 있기에 자칫 잘못했다가는 치도곤을 당하기 십상이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백성들은 외부의 출입을 극도로 꺼려했고, 거리는 한산하게 변했다.

그나마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도 앞으로 강호가 어떻게 될지 걱정했다.

그들이 보는 미래는 암울했고, 오직 어둠만이 가득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담호는 많은 것을 보고, 수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강호는 어지럽고, 혼란스럽기만 했다.

담호는 그 모든 것을 냉정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무작정 차갑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날 밤 담호의 내면에서 무언가 변했다.

확실히 무엇이 변했다고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변한 것은 분명했다.

담호는 그런 자신의 변화가 약간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마음속에 깊은 한마디는 새겨 두었다.

‘거센 풍파가 닥쳐와도 단단한 마음 하나면 족할 터. 나는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담호는 이제야 현소 진인을 만날 자신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황산의 일이 끝나면 화산으로 찾아갈 생각이었다.

현소 진인을 만나 이야기하고 싶었다.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묻고 싶었다.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현소 진인과 더불어 술 한 잔을 나누고 싶었다. 이제야 비로소 스승이 왜 그렇게 술을 마셨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형!”

담호의 상념은 방진보의 목소리가 들리면서 깨졌다.

“무슨 일이냐?”

“식사 나왔어요. 좀 드셔 보세요.”

“그래!”

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방진보는 담호가 젓가락을 집는 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아니요. 그냥 조금 변한 것 같아서요. 헤헤! 그냥 착각인가 봐요.”

방진보가 특유의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옆에서 황혜령이 한마디를 했다.

“가만 보면 진보는 정말 오라버니를 좋아하는 것 같아.”

“네?”

“오라버니의 일거수일투족에 잔뜩 관심을 가지고 있잖아.”

“그……런가요?”

방진보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진짜 친동생 같아.”

“정말요?”

“그래!”

“헤헤!”

“그렇게 좋을까? 풋!”

결국 황혜령도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때였다.

“뭐가 그리 좋은 것이냐?”

갑자기 창노한 음성이 객잔 안에 울려 퍼졌다.

황혜령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객잔 문 앞에 서 있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황혜령의 얼굴 전체에 환한 미소가 물결처럼 퍼져 나갔다.

“아빠!”

“쯧쯧! 이 말썽쟁이 같으니라구.”

황혜령을 보며 혀를 차는 육십 대의 노인. 황혼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칠 척 거구에 암벽처럼 단단한 분위기를 발산하는 노인은 바로 패왕채의 채주이자, 녹림십팔채의 정점에 서 있는 패왕도 황경문이었다.

황경문이 양팔을 활짝 펼쳤다. 그러자 황혜령이 나비처럼 사뿐히 뛰어 그의 품에 안겼다.

“욘석!”

“아빠!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어떻게 오긴? 산채 아래에 도착했다는 녀석이 한참을 기다려도 올라오지 않기에 직접 모시러 나왔지.”

“헤헤!”

황경문이 큰 손으로 황혜령의 머리를 슥슥 문질렀다. 곱게 단장한 머리가 헝클어지는데도 황혜령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부녀의 해후는 보는 이들의 얼굴에도 미소가 어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단 한 명 담호는 달랐다.

그의 눈빛은 더욱 깊어졌다.

‘너는 담가령이 아닌 황혜령이구나.’

이제야 그 사실을 완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자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황경문의 시선이 담호를 향했다.

“그쪽은?”

“아! 이분은 권마 담호 오라버니예요.”

“권마?”

순간 황경문의 눈빛이 일렁였다.

담호라는 이름은 모르지만, 권마라는 별호는 그도 알고 있었다. 아니, 모르는 것이 더 이상했다.

그만큼 담호는 강호의 유명 인사였다.

사람들은 그를 구무룡보다 훨씬 윗길의 무인으로 생각했다. 단순한 후기지수를 뛰어넘어 강호의 최고수 중 한 명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황경문이 담호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이거 귀한 손님이 오신 것도 몰랐구려. 본인은 녹림의 황경문이라 하오.”

“담호요.”

담호도 마주 포권을 취했다.

“하하! 반갑소이다. 강호에 명성이 자자한 담 대협을 뵙게 되어 영광이오. 우리 딸아이를 이렇게 무사히 집으로 데려다주셨으니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구려.”

황경문이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눈빛은 날카롭게 빛내고 있었다.

‘권마라더니 명불허전이구나.’

높은 산봉우리에 오른 자는 다른 산봉우리도 쉽게 볼 수 있는 법이다.

일명 등봉조극(登峰造極)의 경지.

패왕도 황경문의 무공은 커다란 산봉우리 정상에 서서 다른 산을 바라보는 경지에 올라 있었다.

황경문의 눈에 비친 담호는 또 다른 산봉우리에 서 있는 존재였다. 거대한 암반으로 이뤄진 단단한 산.

그런 산봉우리에 올라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담호는 존경을 받기 충분했다.

“우리 딸아이가 담 대협에게 폐를 끼친 것이 아닌지 모르겠소이다.”

“아빠는…….”

황혜령이 눈을 흘겼다.

그 모습마저 어여쁘게 보이는지 황경문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영락없는 팔불출의 모습이었다.

“자자,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산채에 올라갑시다. 작년에 담근 좋은 술이 있으니 먹을 만할 거요.”

황경문이 담호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의 모습은 무척이나 소탈해서 도저히 녹림의 절대자라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담호는 그의 행동을 이해했다.

그만큼 자신의 무력에 자신이 있다는 뜻, 강하기에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밖으로 나오자 녹림의 무인 수십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황경문을 호위하는 무인들이었다.

“아가씨!”

그들이 황혜령을 보고 반색을 했다. 황혜령도 웃음으로 그들을 맞이했다.

“송 아저씨, 윤 아저씨도 왔네요.”

“하하! 아가씨가 보고 싶어서 단번에 왔습니다.”

녹림의 무인들이 왁자지껄 떠들었다. 그들의 목소리가 시끄러울 만도 하건만 황혜령은 하나하나 응수하며 미소를 잃지 않았다.

억지로 웃는 모습이 아닌 자연스러움이 그대로 묻어나는 모습이었다. 그녀가 얼마나 산채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알 수 있었다.

황경문이 그들을 향해 눈살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산채에 있을 것이지, 뭐 좋은 구경거리 있다고 다 뛰쳐나온 게야.”

“에이! 그러지 마십쇼. 아가씨가 왔다는데 당연히 우리가 나와 봐야지.”

“맞습니다, 채주. 아가씨는 우리들의 딸이기도 합니다. 너무 혼자서만 독점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녹림의 무인들이 황경문에게 야유를 보냈다.

일반적인 문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유로운 녹림의 무인들이었다.

녹림의 지배자인 총채주와도 자유롭게 대화를 하고, 농담도 격의 없이 했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잘 어울려 보였다.

황경문이 혀를 찼다.

“큿! 썩을 놈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하나도 기분 나쁜 표정이 아니었다.

“자, 올라가자. 귀한 손님이 오셨으니 돼지도 잡고, 소도 잡자꾸나.”

“정말입니까?”

“어디 속고만 살았냐? 썩을 놈들아!”

“와아아!”

황경문의 외침에 엄청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잔치다, 잔치!”

“오랜만에 고기로 포식하겠구나. 이게 웬 횡재야. 저 짠돌이 채주가 잔치를 다 열다니.”

장내는 금세 왁자지껄한 목소리로 가득 찼다.

사람들을 바라보는 황경문의 입가에도 미소가 살짝 걸렸다.

그렇지 않아도 사기 진작을 위해서 떠들썩하게 잔치를 벌여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딸의 귀환은 좋은 핑계가 돼 주었다.

‘고기라도 든든히 먹여야 힘을 쓸 수 있는 법이지.’

황경문이 황산 정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때 누군가의 흥분한 목소리가 그의 귓전에 울려 퍼졌다. 고개를 돌리니 딸 아이 곁에 있는 뚱보 소년이 두 주먹을 꾹 움켜쥔 채 중얼거리고 있었다.

“고기, 고기다.”

방진보는 눈물마저 글썽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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