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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화 5장. 바람은 끊임없이 거목의 가지를 흔든다(3)
화산에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동부가 여럿 있었다. 그중 몇몇은 화산파 제자들조차 알지 못하는 은밀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자미동(紫薇洞) 역시 그런 곳 중의 하나였다.
자미동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화산파 내에서도 몇 명 되지 않았다. 그만큼 은밀한 곳에 위치해 있었고, 무척이나 중요한 곳이었다.
자미동은 오래전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동부였다. 하지만 수많은 세월이 흐르면서 인공적인 요소들이 가미가 되었다.
어떤 이들은 이곳에서 자신의 무공을 펼쳤고, 어떤 이들은 심득을 남겼다.
자미동의 벽에는 그런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오랫동안 비어 있던 자미동에는 지금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남자의 이름은 명경.
화산파에서 가장 촉망받는 무인이자, 구무룡의 일원이었다.
그가 다시 화산에 돌아온 것은 불과 며칠 전의 일이었다. 호기롭게 화산을 나섰던 것과는 반대로 어깨가 축 처져 돌아왔다.
사람들은 명경이 초라하게 돌아온 데 놀랐고, 그가 담호에게 패했다는 것에 더욱 크게 놀랐다.
명경은 단순한 후기지수가 아니었다. 그는 화산의 희망이자 미래였다. 향후 최소 삼십 년 이상 화산을 이끌어 갈 인재가 담호의 주먹 아래 꺾였다는 사실이 주는 충격은 그야말로 엄청난 것이었다.
하지만 누구보다 충격을 받은 이는 당사자인 명경이었다.
명경은 화산파에 돌아오자마자 자미동에 틀어박혀 폐관 수련에 들어갔다.
명경은 좌선을 한 채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사부가 전수해 준 혈매화검(血梅花劍)은 완벽했다. 그리고 그는 혈매화검을 극에 달하도록 익혔다.
명경은 그런 혈매화검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펼쳤다. 혈매화검을 익힌 이래 이 정도로 완벽하게 펼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완벽한 혈매화검을 펼치고도 명경은 철저하게 패했다. 변명의 여지도 없이 완벽하게.
만일 담호가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면 그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직접 상대한 담호는 실로 무서웠다.
무공도 그랬지만, 담호라는 인간 자체가 치가 떨릴 정도로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명경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와 나의 차이는 절박함. 반드시 상대를 죽여야 한다는 살의.’
담호의 주먹이 무서운 것은 살의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와 겨루면서 명경은 그와 같은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지?’
명경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담호를 떠올릴수록 높은 벽만 느껴졌다. 마치 화산처럼 높고 거대한 벽이.
그때였다.
“명경.”
나지막한 목소리가 그의 귀를 파고들었다.
명경이 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마치 잘 벼려진 명검처럼 날카로운 기도를 발산하는 중년의 검객이.
“사부님!”
그는 바로 명경의 사부인 현검 진인이었다.
지난 십이 년 동안 현검 진인의 기세는 더욱 예리해져서, 바로 앞에 서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만큼 칼날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명경이 급히 고개를 숙였다. 현검 진인은 그의 인사를 받는 대신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이야기는 들었다.”
“사부님!”
“패배하였다면서?”
“죄송합니다.”
“천경…… 그 아이가 그렇게 대단하더냐?”
현검 진인의 목소리는 마치 서리가 내린 것처럼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는 심혈을 기울여 키워 낸 제자에게 실망을 한 상태였다.
담호가 얼마나 강하건, 또 얼마나 큰 명성을 날리고 있는지는 상관없었다.
자신이 키운 제자가 담호에게 졌다는 것.
그로 인해 자신의 명성이 바닥에 떨어졌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울 뿐이다.
‘겨우 절름발이 따위에게 지다니.’
그는 아직도 십이 년 전의 다리를 절던 소년의 모습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절름발이는 결코 대성할 수 없다는 그의 선입견에 정면으로 대들던 소년.
현검 진인은 무정하게 그를 쳐 냈다. 절름발이가 그의 무공을 대성한다는 것은 그의 신념에 관한 도전이기에.
그는 이제까지 그때 내린 결정을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그것은 제자가 패하고 돌아온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분노하고 있었다.
“말해 보거라. 천경의 무공이 그렇게 대단하더냐? 네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그는…… 강합니다. 무공도 강하지만 그라는 인간 자체가 소름 끼치게 강합니다.”
“그 정도더냐?”
반문하는 현검 진인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뭐가 말이냐?”
“왜 그때 그를 제자로 뽑지 않으셨습니까? 왜 그가 아닌 저를 선택하셨습니까?”
명경의 목소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현검 진인의 눈매가 좁아졌다.
자신의 제자는 완전무결해야 했다. 그래야만 자신의 뒤를 이어 화산파를 외세로부터 지킬 수 있었다.
그런 제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십이 년 전 그가 버린 담호로 인해.
‘감히!’
그의 단단한 마음 한가운데 살짝 균열이 갔다.
***
황산의 험지에 위치한 패왕채는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완벽한 성이었다. 대부분의 산채들이 커다란 나무로 울타리를 만드는데 반해 패왕채는 커다란 돌로 성채를 쌓았다.
성채 위로 드러나는 건물 역시 나무로 얼기설기 엮어 만든 모옥이 아니라 제대로 된 전각들이었다. 녹림의 총본산에 어울리는 위용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패왕채에 들어서자마자 윤충이 반가이 그들을 맞이했다.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윤충의 모습은 무척이나 푸근해 보였다.
“윤 숙!”
황혜령이 윤충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하하! 혜령이 왔구나.”
윤충이 반색을 했다.
황혜령은 단순히 황경문의 딸이 아니었다. 이곳 패왕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녀를 친딸처럼 대했고, 윤충도 예외는 아니었다.
황혜령은 특히 윤충을 숙부라 부르며 따랐고, 어리광도 곧잘 부렸다. 그 때문에 윤충을 대하는 그녀의 모습은 살갑기 그지없었다.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구나. 그래, 강호행은 재미있었느냐?”
“재미는요.”
“왜?”
“그냥 이것저것 일이 많았어요.”
“그래? 고생이 많았나 보구나. 이제 집에 돌아왔으니 안심하고 쉬거라.”
“예!”
황혜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길 기다렸다가 황경문이 말했다.
“이 두 분에게도 거처를 내주게. 귀한 분들이니 특별히 신경을 쓰게나.”
“알겠습니다.”
윤충이 공손히 대답할 때 갑자기 방진보가 앞으로 나섰다.
“도축하는 것 곁에서 구경해도 되나요?”
“되기야 하지만, 왜 그러느냐?”
“제가 요리에 관심이 좀 있어서요.”
방진보가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말했다. 그러자 윤충이 황경문을 바라봤다. 황경문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에 윤충이 한쪽에 서 있는 녹림도들을 가리켰다.
“알겠다. 저들을 따라가면 될 것이다.”
“감사합니다.”
방진보가 인사를 한후 윤충이 가리킨 사람들을 향해 달려갔다.
운충의 시선이 담호를 향했다.
“대협은 저를 따라오시지요.”
담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윤충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의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황경문이 황혜령에게 말했다.
“너는 나를 따라오거라. 할 말이 매우 많으니까.”
“예!”
황혜령이 대답과 함께 순순히 황경문을 따랐다.
두 사람의 눈빛은 더 이상 애틋한 부녀의 것이 아니었다.
이제까지 사적인 만남과 해후를 나눴다면 지금부터는 공적인 대화를 나눠야 할 시간이었다.
두 사람은 황경문의 거처로 자리를 옮겼다.
마침내 단둘만 있게 되자, 황경문의 표정이 침중하게 변했다.
“어떻게 된 일이냐?”
아비로서 묻는 게 아니라 녹림십팔채의 총채주로 묻는 말이다,
황혜령도 그 사실을 알기에 자신이 동정호와 악양에서 겪었던 일을 자세히 말했다.
그녀의 말을 모두 들은 황경문의 표정이 눈에 띄게 경직됐다.
“무림맹과 마교……. 좋지 않은 소식뿐이구나. 그나마 다행이라면 마교 때문에 무림맹이 우리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다는 것 정도.”
“하지만 언젠가는 무림맹의 검은 우리를 향할 거예요.”
“그렇겠지. 이미 몇 번이나 반복된 일이니. 그들은 희생양이 필요하고, 녹림은 그들의 입맛에 맞는 먹잇감에 불과하니까.”
황경문이 몸을 일으켰다.
창을 열자 패왕채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곳에 그의 한평생 땀과 열정이 녹아 있었다.
패왕채뿐만이 아니었다. 녹림십팔채를 지키기 위해 평생을 노력해 왔다. 그 결과 지금의 성세를 이뤄 냈지만, 그것이 얼마나 위태로운 것인지는 황경문이 더 잘 알고 있었다.
황경문은 황혜령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고생했다. 그래도 마냥 놀러간 것이 아니라서 기쁘구나.”
“제가 언제까지 어린아이인 줄 아세요?”
“아무리 커도 아비의 눈에는 어린아이로 보이는 법이야.”
“칫!”
황혜령이 코끝을 찡그렸다. 하지만 황경문의 눈에는 그마저도 예쁘게 보이는 듯했다.
“그나저나 권마라니, 거물을 데려왔구나.”
황경문이 담호의 거처가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피를 부르는 운명을 타고 태어난 것인가? 아니면 피가 흐르는 곳을 본능적으로 찾아가는 것인가?”
그의 눈빛이 깊이 침잠되어 갔다.
윤충이 안내해 준 거처는 패왕채 안쪽에 있는 조그만 전각이었다. 쓸데없는 장식이라곤 하나도 없는 수수한 곳이었지만, 그래도 꽤나 신경 쓴 흔적이 역력했다.
패왕채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성곽의 모양, 전각의 배치, 그리고 무인들의 배치까지도.
황경문은 그 모든 것을 외인에 불과한 담호에게 가감 없이 내보이고 있었다.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뜻인가?”
담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직접 본 황경문은 꽤나 그릇이 커보였다. 그리고 황혜령을 무척이나 아끼는 듯했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정감 어린 표정만 봐도 그런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윤충이 웃으며 말했다.
“이곳에서 쉬시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혜령의 손님이면 저에게도 귀한 손님이니까요.”
한없이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윤충이었다. 그의 미소엔 한 점의 가식도 없어 보였다.
담호를 앞에 두고서도 웃을 수 있는 배포는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담호는 윤충을 빤히 바라봤다. 그러자 윤충이 슬그머니 그의 시선을 피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럼 저는 가 보겠습니다.”
윤충이 미소를 지으며 밖으로 나갔다.
그가 사라진 문을 바라보는 담호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패여 있었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형님.”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묵일광이었다.
“들어와.”
담호의 허락이 떨어지자 묵일광이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그의 등에는 새로운 도끼 두 자루가 걸려 있었다. 산채에 있던 여분의 도끼를 꺼내 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험악한 인상이 도끼까지 차자 더욱 무서워 보였다. 하지만 묵일광 딴에는 최대한 조심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지?”
“혼자 적적하실까 봐 찾아왔습니다.”
“내가?”
“귀찮으시면 나가겠습니다.”
담호는 잠시 묵일광을 바라봤다. 묵일광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꾸욱!
묵일광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담호의 눈빛을 견디기 위한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세상 두려울 것이 없는 묵일광이었지만, 담호 앞에 서면 이상하리만큼 위축이 되었다.
담호가 문득 물었다.
“혜령을 좋아하나?”
“예?”
순간 묵일광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너무 놀라서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담호는 개의치 않았다.
묵일광의 반응이 가장 확실한 대답이었기 때문이다.
“그 마음 변하지 말도록.”
“무, 물론입니다.”
묵일광이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로 대답했다.
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담호는 그런 묵일광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외모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이었다.
묵일광은 흔들림 없는 굳건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래! 충분하고도 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