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142화 6장. 과거를 잊은 자, 잊지 못하는 자(2)
잔치가 벌어졌다.
커다란 공터에 거대한 모닥불이 지펴지고 돗자리와 평상 수백 개가 깔렸다. 돗자리와 평상마다 산더미 같은 음식이 깔렸다.
“우하하!”
“좋구나!”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이 어렸다.
오랜만의 잔치였기에 사람들이 느끼는 기쁨은 더 컸다.
담호와 묵일광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모닥불 근처에 있는 평상이었다.
“형님, 제가 한잔 올리겠습니다.”
묵일광이 담호의 잔에 술을 가득 채웠다. 묵일광은 담호를 형님으로 모시기로 한 날부터 극진히 대했다.
담호는 묵일광의 잔에도 술을 따랐다.
“감사합니다, 형님.”
묵일광이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담호는 잠시 묵일광을 바라보다가 술잔을 들이켰다.
산채에서 담근 독하디독한 술이 식도를 강렬하게 자극했다. 하지만 담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묵일광도 담호를 따라 술잔을 비웠다.
“크으!”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독한 술을 마시자 패왕채에 돌아왔다는 것이 실감났다.
그때였다.
“와아아!”
“채주님이시다.”
사람들의 환호성과 함께 황경문이 등장했다. 그의 뒤를 황혜령과 윤충이 따르고 있었다.
사람들이 환호를 하자 황경문이 손을 들어 제지시켰다.
“모두 즐거운가?”
“그렇습니다.”
“술과 음식은 얼마든지 있다. 오늘을 마음껏 즐기도록.”
“와아아!”
엄청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황경문은 그들에게 한차례 손을 흔들어준 후 단상에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황혜령과 윤충 같은 패왕채의 수뇌부들이 황경문을 중심으로 모여 앉았다.
황경문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이제 그것을 내오도록 하거라.”
“알겠습니다.”
수하 한 명이 재빠르게 어디론가 달려갔다. 그리고 잠시 후 일단의 사람들이 공터에 모습을 드러냈다.
“우와아!”
“저게 뭐야?”
그들을 본 사람들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네 명의 남자가 커다란 나무에 꿰인 통돼지를 어깨에 짊어진 채 공터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 뒤를 광주리를 든 아낙들과 방진보가 따르고 있었다.
“웃차!”
남자들이 돼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돼지는 배가 갈라져 텅 비어 있었다. 아낙들이 광주리에 들어 있던 각종 약초와 과일, 야채를 돼지의 뱃속에 채워 넣었다.
내장을 긁어내 홀쭉하기만 했던 돼지의 배가 금세 빵빵하게 부풀었다. 그러자 아낙들이 돼지의 배를 실로 꽁꽁 묶었다.
“웃차!”
남자들이 다시 돼지를 들어 모닥불에 올려놓았다.
“우와!”
곁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방진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런 식의 요리법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방진보였다.
타닥! 타닥!
돼지 껍질이 거센 불길에 노릇노릇 익어 가면서 맛있는 냄새가 풍겼다.
아낙 중 가장 나이 많은 이가 방진보에게 말했다.
“자,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되니까 자리에 가서 기다리거라.”
“얼마나 기다려야 하나요?”
“글쎄! 돼지가 워낙 크니 두 시진은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
“두 시진이나요?”
“호호! 자리에 앉아 이것저것 먹다 보면 금방 시간이 흘러갈 게다.”
“알았어요. 오늘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너야말로 수고 많았다, 진보야. 덕분에 한결 일이 쉬워졌다.”
“제가 한 일이 뭐 있다구요?”
“우리 진보, 여자 친구 없으면 아줌마 딸을 소개해 줄까?”
“예?”
아낙의 엉뚱한 말에 방진보가 눈을 크게 떴다.
“에이! 아줌마 딸은 이제 다섯 살이잖아요?”
“다섯 살이 어때서 그래? 몇 년 만 눈 감고 기다리면 돼. 어때?”
“됐거든요.”
방진보가 뒷말을 듣지도 않고 담호가 있는 평상을 향해 달려갔다.
아낙이 그런 방진보의 뒷모습을 보며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반 농담식으로 이야기했지만, 그녀는 방진보가 마음에 들었다.
방진보는 요리도 잘했고, 성격도 좋았다. 그 덕에 그와 함께 요리를 하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아깝네! 사위로 삼으면 좋을 텐데.”
그사이 방진보는 평상에 도착했다.
“형!”
방진보가 활짝 웃으며 담호의 앞에 앉았다. 그의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방진보의 웃음은 보는 이의 기분까지 좋게 만들었다.
“여긴 정말 대단해요. 요리를 하는 것도 그렇고 규모가 장난 아니에요. 전 이렇게 엄청난 양의 요리를 하는 것은 처음 봤어요. 황산에서만 나는 약초도 끝내주고요. 조금만 넣어도 음식의 풍미가 달라져요. 아주머니들이 저 쓰라고 조금 챙겨 줬어요. 헤헤!”
방진보가 손에 들고 있는 죽통을 흔들어 보였다. 잘 밀봉된 죽통에는 이곳에서만 나는 약초가 곱게 갈려 들어 있었다.
방진보가 신이 나서 떠들 때 황혜령이 다가왔다.
“진보가 기분이 좋은 모양이네.”
“그럼요! 아주 끝내줘요.”
방진보가 엄지를 척 치켜 올렸다. 황혜령이 그에 ‘풋’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가 평상에 앉으며 담호를 바라봤다.
“오라버니는 어떠세요? 지내기 불편하지 않으세요?”
“괜찮다.”
“그럼 다행이구요.”
황혜령이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열리는 잔치라서 그런지 다들 흥겨워 보이네요. 다행이에요.”
“…….”
“오라버니도 이런 잔치 많이 참석해 보셨나요?”
“어렸을 적에 한 번 있었다.”
“그래요? 어디에서요? 그 고향 마을에서요?”
“그렇다.”
“오라버니 마을은 어떤 식으로 잔치를 했나요? 저희처럼 이렇게 소와 돼지를 많이 잡나요?”
황혜령이 붉게 상기된 얼굴로 꼬치꼬치 캐물었다.
담호가 잠시 눈을 감았다. 황혜령이 그런 담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담호가 눈을 감은 채 입을 열었다.
“내가 살던 곳은 무척이나 궁벽한 곳이었다. 소는커녕 돼지 한 마리 잡는 것도 버거웠지.”
“그럼 어떻게 잔치를 하나요?”
“아버지가 사냥을 할 줄 아셨다. 바쁜 농사일 중에도 잠시 틈이 나면 사냥을 나가셨지. 대부분은 토끼 같은 조그만 짐승을 잡아 왔는데, 한번은 커다란 멧돼지를 잡아 오신 적이 있다. 그때 마을 잔치가 벌어졌었지.”
항상 궁핍하던 벽촌이었다. 고기를 먹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만큼 가난한 삶이 지배하고 있었다. 자신의 가족 먹이는 것만으로도 힘이 부치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런데도 그의 아비는 남에게 베푸는 데 결코 인색하지 않았다. 자신의 가족만 먹여도 누구 한 명 비난하지 않으련만, 그는 마을 사람들을 위해 흔쾌히 멧돼지를 내놨다.
잔뜩 굶주려 있던 마을에 잔치가 벌어졌다. 사람들의 얼굴엔 오랜만에 웃음꽃이 피었고, 구수한 냄새가 온 마을을 진동했다.
아비, 어미는 멧돼지를 조리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어린 담호는 더 어린 가령을 돌봐야 했다.
그래도 좋았다. 난생 처음 고기를 배불리 먹어 봤으니까.
어린 가령을 위해 고기를 잘게 찢어 먹였다.
고기를 입에 넣고 오물거리던 가령의 빨간 뺨, 그리고 자신을 보고 웃던 그 눈웃음.
그 모든 기억들이 이제는 색이 바란 벽지처럼 아스라하게만 느껴졌다.
눈을 뜨자 동그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황혜령의 얼굴이 보였다. 거의 이십 년이나 흘렀건만 기억 속 가령의 얼굴이 황혜령의 이목구비에 그대로 녹아 있었다.
‘다행이다.’
담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만일 황혜령이 불행한 삶을 살고 있었다면, 그는 결코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오라버니.”
“음!”
“진짜 우리 예전에도 본 적 없나요?”
“왜?”
“그냥 눈빛이 낯설지 않아서요.”
황혜령이 손을 뻗어 담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녀의 조그만 손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온기. 그 느낌이 낯설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앞으로도 황혜령을 근처에서 보고 싶었다.
하지만 담호는 냉정하게 말했다.
“착각이겠지.”
“그런가요?”
“그래!”
이제 담가령이 아닌 황혜령의 삶을 살아야 하는 동생이었다. 담호는 그것이 동생을 위한 길이라 생각했다.
황혜령이 손을 거뒀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 어려 있는 의혹의 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모두가 살인마라고 부르는 담호다.
오죽했으면 권마라는 무시무시한 별호가 붙었을까? 별호만큼이나 성격도 무자비해서 모든 이들이 담호를 무서워했다.
하지만 황혜령은 이상하리만큼 그가 무섭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도리어 이상하다고 생각됐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걸까?’
담호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다. 하지만 담호는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라버…….”
황혜령이 다시 담호를 부르려 할 때였다.
“사람들이 올라온다.”
갑자기 입구를 지키고 있던 도적들이 소리쳤다.
잔치를 즐기고 있던 황경문이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냐?”
“산채 쪽으로 사람들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사람들? 정체부터 파악하거라.”
“예!”
산채의 문이 열리고 일단의 도적들이 빠져나갔다.
방금 전까지 흥겹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도적들의 얼굴에 긴장의 빛이 떠올랐다.
그들은 패왕채의 정예들이었다. 황경문의 혹독한 조련을 받은 그들은 언제라도 싸울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흑수채의 형제들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산채 밖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경문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흑수채?”
“예! 금호채와 백록채, 그리고 청강채의 형제들도 함께 올라오고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흠!”
황경문의 눈이 날카롭게 반짝였다.
‘그 녀석!’
흑수채, 금호채와 백록채, 청강채 모두 녹림십팔채 중에서도 상위의 전력을 소유한 산채들이었다. 비록 하나하나는 패왕채에 미치지 못하지만, 네 산채의 힘이라면 나머지 녹림십팔채를 합친 힘을 압도할 만했다.
‘청강채까지 끌어들인 건가? 수완이 대단하군.’
어차피 예정되어 있던 만남이었다.
비록 시기가 좋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물리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잔치가 벌어지는 줄 알고 온 모양이구나. 그들을 위해 자리를 마련하거라.”
“예!”
황경문의 명이 떨어지자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여 손님을 맞을 준비를 했다.
잠시 후 산채의 문이 열리고 수백 명의 도적들이 패왕채 안으로 입성했다.
“으하하!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구나.”
“우리가 올 줄 알고 총채주께서 잔치를 여신 것인가?”
장내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왁자지껄해졌다.
다 같은 녹림의 형제였다. 비록 산채가 달라 왕래가 뜸하다고 하지만, 같은 녹림인이라는 동질감 하나만으로도 금세 친해질 수 있었다.
수백 명의 녹림인들 중 유독 눈에 띄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하! 백록채의 채주 곽삼이 총채주를 뵙습니다.”
화려한 호피를 입은 거대한 덩치의 중년 남자가 큰 웃음과 함께 황경문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그 뒤를 붉은 옷을 입은 육십 대 초로의 노인과 삼십 대로 보이는 농염한 몸매의 여인이 따랐다.
“금호채의 채주 오종삼이 총채주를 뵙소이다.”
“청강채의 채주 이가흔이 총채주를 뵈어요.”
그들은 모두 녹림십팔채의 채주들이었다.
녹림에서도 열여덟 명밖에 없는 지고한 위치에 있는 자들.
그들의 방문에 황경문이 몸을 일으켰다.
“다들 오랜만이군.”
“호호! 총채주는 더 건강해지신 것 같네요. 뭐, 좋은 거라도 드시나요?”
“그런 게 있으면 자네들에게도 나눠 줬겠지. 다들 얼굴이 좋아 보이는군.”
황경문의 시선이 그들을 하나하나 훑고 지나가 마지막 남자에게서 멈췄다.
이제 오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허리엔 커다란 낭아도를 차고 있었고, 왼쪽 뺨에는 칼로 그은 것 같은 긴 흉터를 가진 남자.
그가 황경문을 보며 입을 열었다.
“조윤산이 총채주를 뵙습니다.”
남자의 이름은 조윤산, 흑수채의 채주였다.
그의 입가에 한 줄기 미소가 걸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