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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화 6장. 과거를 잊은 자, 잊지 못하는 자(3)
황경문이 조윤산을 내려다보았다.
“오랜만이군, 조 채주.”
“제가 자주 찾아뵀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거리가 거리니만큼 어쩔 수 없지.”
“대신 이곳에 있는 동안이라도 잘 모시겠습니다.”
“고맙군!”
“그런데 어인 일로 잔치를 여시는 겁니까? 혹시 저희를 위해서 여시는 겁니까?”
“우연찮게 그렇게 됐군. 먼 길을 왔으니 피곤할 텐데 오늘은 푹 쉬면서 잔치를 즐기게나.”
“고맙습니다.”
조윤산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나머지 채주들이 뒤따라 고개를 숙였다.
조윤산이 미소를 지으며 뒤돌아섰다.
자신을 바라보는 수많은 시선들을 두고도 그는 무척이나 여유로웠다.
문득 그의 시선에 묘령의 여인이 들어왔다. 순간 그의 입가에 어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여인을 향해 걸음을 성큼성큼 옮겼다.
“오랜만이구나. 혜령아.”
“조 채주님.”
황혜령이 조윤산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젠 어엿한 숙녀 티가 나는구나. 시집가도 되겠어.”
“채주님은 여전히 정정하시네요.”
“그렇게 보이느냐?”
“네!”
“고맙구나.”
조윤산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말은 따뜻하게 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갑고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그간 악양에 가 있었다고 들었다. 맞느냐?”
“맞아요.”
“그렇다면 혹시 거철을 보지 못했느냐?”
“곽 부채주님 말씀이신가요?”
“그렇다.”
“보지 못했어요.”
“정말이냐?”
“정말이에요. 그걸 왜 저에게 물어보시죠?”
“거철이 악양에 간 후 소식이 끊겨서 그런다.”
“곽 부채주님이 왜 악양에?”
“지인이 있어 만나러 간다고 하더구나. 네가 악양에 있었으니 혹시 알까 해서 물어본 것이다. 신경 쓰지 말거라.”
“예!”
조윤산이 대답을 하는 황혜령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훑어보았다.
‘정말 모른단 말인가?’
황혜령은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곽거철은 그의 명령을 받아 황혜령의 존재를 무림맹에 알렸다.
그 결과 남궁세가와 무림맹 무인들이 그녀를 잡기 위해 나섰다. 하지만 담호 단 한 명에 의해 그들의 의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그것까지는 괜찮았다. 살다 보면 심혈을 기울여 펼친 계략이 수포로 돌아가는 경우도 다반사였으니까.
문제는 그의 충실한 수족이자 흑수채의 부채주인 곽거철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것이다.
곽거철은 단순한 수하가 아니었다. 그의 복심까지 읽을 수 있는 충실한 심복이었으며, 그가 원한다면 불구덩이에도 망설이지 않고 뛰어들 정도로 충성스러웠다.
무엇보다 곽거철은 그를 이십 년 이상 따랐다. 그간 쌓인 정은 친혈육 이상이었다.
그런 곽거철의 소식이 딱 끊겼다. 마치 이 세상에서 사라진 것처럼.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조윤산이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낀 것은.
황혜령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조윤산의 시선이 이내 옆으로 옮겨 갔다.
묵일광이 보이고, 뚱뚱한 소년이 보였다.
그리고 생전 처음 보는 젊은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칠흑 같은 검은 가죽 장포, 늑대처럼 헝클어진 검은 머리카락과 그 사이로 보이는 한없이 검은 눈동자.
조윤산이 미간을 찌푸렸다. 담호와 눈이 마주치는 그 순간 정체를 알 수 없는 섬뜩한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다.
마치 수많은 개미 떼가 달라붙은 것처럼 전신이 가려웠다. 이런 기분은 난생처음이었다.
조윤산이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네놈은 누구냐?”
남자, 담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조윤산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검은 눈동자 가득 조윤산의 얼굴이 맺혀 있었다.
순간 담호의 입꼬리를 타고 미소가 번져 갔다. 마치 들불처럼 서서히 번져 가는 그의 미소에 조윤산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네놈! 누구냐?”
그의 목소리가 순간적으로 높아졌다.
조윤산을 빤히 바라보던 담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기억하지 못하나 보군.”
“뭐?”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
“우리가 본 적이 있던가?”
조윤산의 물음에 담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담호의 모습에 조윤산의 곁에 있던 심복 좌신충이 발끈했다.
“채주님께서 묻지 않느냐. 어서 대답하지 못하겠느냐?”
좌신충은 키가 무려 칠 척에 달하는 데다 천생 신력을 지니고 있어 흑수채 안에서도 당할 장사가 없었다.
좌신충이 목소리를 높이자 장내의 시선이 일제히 이쪽으로 집중됐다. 그러자 난감해진 이는 황혜령이었다.
담호의 성격을 잘 아는 황혜령이 급히 나섰다.
“이분은 권마 담호 대협이에요.”
“권마?”
기세 좋게 나섰던 좌신충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도 권마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당금 강호에서 그 어떤 무인보다 악명을 날리는 무인이 바로 담호였으니까.
“네가 정말 권마냐?”
담호의 시선이 좌신충을 향했다.
“헛!”
어떤 감정도 비치지 않는 새까만 눈동자를 본 순간 좌신충이 자신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켰다.
그는 뱀 앞에 선 개구리의 심정이 어떤지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움직이는 그 순간 잡아먹힐 것 같은 공포심이 밀려왔다.
“또 한 번 끼어들면 두 번 다시 네 이빨로 밥을 씹어 먹을 수 없게 만들어 주지.”
“…….”
좌신충이 자신도 모르게 입을 꾹 다물었다.
강호에 알려진 담호는 입 밖으로 내뱉은 자신의 말을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와 척을 지고 살아남은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소문을 증명했다.
조윤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정말 권마인가?”
담호는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엔 누구도 무례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정말 저자가 권마라면 엄청난 거물이다.’
‘저런 거물이 왜 이곳에?’
그런 의혹이 사람들의 뇌리에 떠올랐지만, 감히 누구 한 명 나서서 묻지 못했다.
조윤산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정말 권마인 모양이군. 권마가 뭐 얻어먹을 게 있다고 이런 궁벽한 산골에 온 겐가?”
“패왕채가 궁벽한 산골인가?”
“…….”
조윤산은 대답할 수 없었다. 담호의 말을 인정하면 패왕채와 황경문을 사람들 앞에서 모욕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대신 화제를 돌렸다.
“말을 제법 잘하는군.”
“주먹은 더욱 잘 쓰지.”
“지금 내게 시비를 거는 건가?”
“시비는 네가 먼저 걸었어.”
“네놈!”
“예전에는 몰랐는데 머리가 무척이나 나쁜 모양이군.”
순간 조윤산의 전신에서 엄청난 살기가 폭사되어 나왔다.
“크윽!”
“흡!”
근처에 있던 무인들이 살기에 질려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정작 살기를 뒤집어쓴 담호의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
“죽고 싶은 게냐? 이곳은 녹림의 총본산이다. 네놈의 허명 따윈 이곳에서 아무런 소용이 없다.”
“시혐해 볼까? 정말 그런지.”
“너?”
담호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조윤산이 움찔해서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조윤산의 얼굴에 굴욕의 빛이 떠올랐다.
녹림의 총채주를 꿈꾸는 자신이 겨우 상대의 기세에 밀려 물러섰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다.
조윤산을 바라보는 담호의 눈은 그 어떤 감정의 편린도 내비치지 않았다.
이십여 년 만에 만나는 원수였다. 만나면 화가 들끓어 미쳐 날뛸 것 같았는데, 의외로 전신에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냉철한 이성이 유지되고 있었다.
조윤산의 화가 폭발하려는 순간이었다.
“그는 내 손님일세. 내 딸을 위기에서 구해 줬지. 정중하게 대하게.”
황경문의 근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녹림을 지배하는 절대자의 목소리에 조윤산은 애써 화를 삭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담호에게 으름장을 놓는 것을 잊지 않았다.
“조심하는 게 좋을 게다. 다시 한 번 내 눈에 거슬리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테니.”
“주위 풍경을 많이 보아 두는 게 좋을 거야.”
“뭐?”
“살아 있을 때 많은 것을 봐 둬야 죽어서 후회도 없을 테니까.”
“진짜 네놈이…….”
“조 채주.”
다시 한 번 황경문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면 앞뒤 가리지 않고 담호에게 덤벼들 뻔한 조윤산이었다.
누구보다 냉철한 조윤산이었지만, 이상하게 담호의 도발에는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었기에 조윤산은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이놈!’
그는 한참 동안이나 담호를 노려보다가 몸을 돌렸다.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 감히 알량한 명성을 믿고 이 몸을 도발하다니.’
그의 어깨가 간헐적인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담호는 멀어지는 조윤산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형!”
황혜령과 방진보가 동시에 담호를 불렀다. 그제야 담호가 조윤산을 향한 시선을 거뒀다.
“오라버니, 괜히 저 때문에…….”
황혜령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담호가 자신 때문에 나선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괜찮다.”
담호가 큰 손을 뻗어 황혜령의 머리를 가볍게 만져 주었다. 다 큰 여인에게 해서는 안 될 예의 없는 행동이었다. 그런데도 황혜령은 묘하게 거부감이 들지 않는 것을 느꼈다.
조윤산을 볼 때면 언제나 소름이 끼치는 것과는 정반대였다.
흑수채의 조윤산을 실제로 본 것은 몇 번 되지 않는다. 하지만 조윤산과 만날 때면 그녀는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끼곤 했다.
그녀는 조윤산의 모든 것이 싫었다.
조윤산은 때론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곤 했다. 그녀 자신도 기억이 나지 않는 어린 시절의 일을.
그래서인지 몰랐다. 조윤산에게 더욱 거부감이 드는 것은.
‘오라버니.’
반대로 담호를 볼 때면 알 수 없는 안도감이 그녀의 가슴을 지배했다.
그때였다.
“호호! 천하의 영웅이 이곳에 있었군요.”
농염함이 듬뿍 담긴 목소리가 담호의 귓전에 울려 퍼졌다.
고개를 돌리니 굴곡진 몸매의 여인이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청강채의 채주 이가흔.
여인의 몸으로 녹림십팔채 중 하나인 청강채의 주인 자리에 오른 여걸이었다.
농염한 그녀의 외모에 혹해 덤벼들었다가 목숨을 잃은 녹림도가 한둘이 아니었다.
오죽했으면 그녀의 별호가 사갈마녀(蛇蝎魔女)였을까.
사갈마녀 이가흔이 담호의 옆자리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난 이가흔이라고 해요. 반가워요, 담 대협.”
“…….”
“생각보다 무뚝뚝한 분이신 모양이네요. 그렇게 경계하지 않으셔도 돼요. 난 당신에게 호감을 갖고 있으니까요.”
이가흔이 담호의 곁으로 엉덩이를 바싹 붙였다.
금세 주위의 공기가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이가흔의 얼굴에는 농염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녀는 담호에게 엄청난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강호에서는 곧 힘을 가진 자가 법이었다. 그녀의 눈에 비친 담호는 강자였다.
‘호호! 이 남자를 내 치마폭에 휘감을 수만 있다면 녹림 전체를 지배하는 것도 꿈만은 아닐 거야.’
그녀는 야심이 무척 큰 여인이었다.
지금 당장은 조윤산에게 협력하고 있지만, 담호가 더 매력적이라면 언제든 자리를 옮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담 대협.”
“발정 났나?”
“무슨?”
“암내가 진동하는군.”
순간 이가흔뿐만 아니라 주위에 있던 모든 이들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