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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144화 (14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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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화 7장. 멍석을 깔아 주고 기다린다(1)

이가흔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감히!”

그녀의 눈에 귀화가 타오르는 듯했다.

여인의 몸으로 녹림십팔채 중 하나인 청강채의 채주 자리에 오른 이가흔이었다. 그 과정이 평범했을 리 없다.

처음엔 힘이 약해서 당하고만 살아야 했다.

워낙 예쁘다 보니 그녀의 몸을 노리는 이들도 많았고, 그만큼 많은 겁탈을 당했다. 그녀는 간절히 구원을 원했지만, 누구 한 명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 주지 않았다.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되었을 때 그녀는 깨달았다.

‘이 지랄 같은 세상에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나뿐이다.’

생각이 바뀌자 그녀의 행동이 바뀌었다.

그녀는 더 이상 움츠리지 않았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섰다.

무기는 그녀의 미모와 농염한 육체.

첫 번째 목표는 청강채의 이인자였던 금한태였다. 금한태는 청강채의 채주였던 곽한술의 심복으로 머리가 비상하게 좋아 책사 역할을 하고 있었다.

금한태를 치마폭에 감싸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가흔은 금한태에게 천상의 쾌락을 선사해 줬다.

그 대가로 얻은 것은 금한태의 무공 중 일부.

비전 절기 전부도 아니고 극히 일부만 전수해 주는 것이었기에 금한태도 별반 경계심을 갖지 않았다.

문제는 이가흔이 금한태에게만 무공을 얻어 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녀는 청강채에서 한가락 한다하는 무인들에게서 모두 무공을 얻어 냈고, 그 후 사람들 사이를 이간질시켰다.

청강채의 채주였던 곽한술이 이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내부의 분란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 상태였다. 결국 곽한술은 이가흔을 죽여서 후환을 없애려고 했다.

하지만 이가흔은 오히려 금한태를 부추겨 반란을 일으켰다. 결국 예상치 못한 반란에 곽한술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이가흔은 죽은 곽한술에게서 무공 비급을 훔쳐 냈고, 이를 기반으로 무공을 익혀 나중에는 금한태마저 죽일 수 있었다.

그렇게 혼자의 힘으로 독하게 청강채의 채주가 된 이가흔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담호의 모욕은 견딜 수 없는 수치심을 안겨 주었다.

“네놈을 반드시 갈기갈기 찢어 죽여 주겠다.”

이가흔이 원독어린 음성을 내뱉을 때였다.

쫘악!

갑자기 그녀의 고개가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팩 돌아갔다. 담호의 커다란 손바닥이 뺨을 갈긴 것이다.

이가흔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녀는 잠시 자신에게 일어난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내 상황을 파악하고 노기를 피워 올렸다.

“감히! 네놈이…….”

쫘악!

순간 담호의 손바닥이 다시 그녀의 뺨에 작렬했다.

이가흔의 고개가 다시 모로 팩 돌아갔고 담호에게 맞은 뺨이 순식간에 퉁퉁 부어올랐다.

“채주님!”

“이놈!”

청강채의 녹림도들이 이가흔이 모욕을 당하는 모습에 분노해 달려왔다.

그 순간 담호의 동체가 주먹과 함께 활처럼 뒤로 한껏 젖혀졌다.

“형!”

“오라버니!”

방진보와 황혜령이 동시에 담호를 불렀다.

그 순간 담호의 주먹이 바닥을 향해 내리꽂혔다.

콰아앙!

쿠콰가각!

암반으로 된 바닥이 폭음과 함께 부서져 파편이 사방으로 날렸다.

“크헉!”

“켁!”

이가흔을 돕기 위해 달려오던 청강채의 녹림도들이 돌조각에 맞아 널브러졌다.

머리가 깨져 피가 흐르는 자, 팔이 부러져 신음을 흘리는 자, 복부에 맞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자.

그런 자들이 수십 명이 넘었다.

이가흔도 날아온 돌조각에 맞아 이마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졸지에 얼굴에 상처가 생긴 이가흔은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담호가 주저앉은 이가흔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이익! 죽어!”

순간 이가흔이 벼락처럼 손을 휘둘렀다. 그녀의 손에는 어느새 머리에 꽂혀 있던 옥비녀가 들려 있었다.

옥비녀는 혈룡비(血龍匕)라고 불리는 마물이었다. 일단 살점에 박히면 절대 빠지지 않는 데다가 과다 출혈을 일으켜 순식간에 상대를 절명 상태에 빠지게 하는 마물이었다.

덜컥!

하지만 혈룡비는 담호의 근처에도 도달하지 못하고 멈추고 말았다. 어느새 담호의 손이 이가흔의 여린 팔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너?”

그 순간 담호가 손에 힘을 주었다.

우두둑!

“꺄아악!”

이가흔의 가느다란 팔목이 수수깡처럼 부서져 나갔다.

졸지에 팔목이 부러진 이가흔은 미친 듯이 날카로운 비명을 질러 댔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로 무서웠다.

콰직!

이가흔의 얼굴에 담호의 주먹이 작렬했다. 이가흔은 저항도 하지 못하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

순간 장내에 질식할 듯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이곳은 패왕채였다.

녹림십팔채의 총본산인 패왕채에서 녹림십팔채의 채주 중 하나가 타인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고 만 것이다.

담호가 벌레처럼 꿈틀거리고 있는 이가흔의 풍만한 육체를 발로 짓밟았다.

“아무리 발정이 났어도 상대는 가려야지.”

아무 감정도 실리지 않은 섬뜩한 목소리에 이가흔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정신은 잃었어도 육체가 반응하는 것이다.

녹림십팔채의 채주들이 놀라 몸을 일으켰다.

“저, 저?”

“감히 녹림에서 소란을 피우다니.”

하지만 누구 한 명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담호는 총채주인 황경문의 손님이었다. 비록 그가 무례를 범했다지만 황경문이 허락하지 않는 이상 그를 어찌할 수는 없었다.

백록채주 곽삼이 앞으로 나섰다.

“총채주.”

“말하게.”

“외인이 패왕채에서 소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저대로 놔두셔도 괜찮겠습니까?”

“소란이라…….”

“이 채주가 모욕을 받았습니다. 그 죄는 죽음으로 갚아야 합니다.”

“그런가?”

“그렇습니다.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이 녹림의 규율입니다. 총채주께서는 즉각 저자를 처벌해 규율을 확고히 세워야 합니다.”

“그런가?”

“그렇습니다. 녹림이 아닌 자가 녹림도를 건드리는 이상 반드시 응징해야 합니다.”

“그렇군!”

황경문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조윤산과 오종삼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어떤 결정을 내리는지 두고 보겠다는 듯이 말이다.

황경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곽삼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담호가 무엇을 노리고 이가흔에게 모욕을 주었는지 모르지만, 이곳은 녹림의 규율이 지배하는 곳이었다.

이대로 담호를 놔두게 되면 녹림의 규율 전체가 흔들리게 된다.

“쯧!”

황경문이 혀를 차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산악 같은 기세가 일어나 일대를 장악했다.

“으음!”

조윤산 등이 침음성을 흘렸다.

‘늙은이가 아직도 이 정도의 기도를 가지고 있다니.’

‘역시 수십 년간 녹림을 지배해 온 절대자답구나.’

하지만 그들은 절대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황경문이 바닥에 주저앉은 이가흔을 지나쳐 담호를 향했다.

“아빠!”

황혜령이 불렀지만 황경문은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담호를 향해 있었다.

담호는 여전히 이가흔의 육체를 짓밟고 있었다. 평상시 수많은 남자들을 설레게 했을 풍만한 육체는 지금 이 순간 더러운 고깃덩이에 지나지 않았다.

황경문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계속 그러고 있을 셈인가?”

그러자 담호가 이가흔의 허리를 걷어찼다.

“아악!”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도 이가흔이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황경문이 걸레처럼 처참하게 바닥을 나뒹구는 이가흔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깊이 가라앉아 있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곳은 녹림일세.”

“알고 있소”

“그녀는 녹림십팔채 중 하나인 청강채의 채주일세.”

“알고 있소.”

“나는 녹림십팔채의 총채주이고.”

“알고 있소.”

“자네가 한 일은 내 얼굴에 먹칠을 한 거나 다름없네.”

“알고 있소.”

“모두 다 알고 있단 말이군. 그런데도 이가흔을 저 모양 저 꼴로 만들었단 말이지. 재밌군!”

황경문이 피식 웃었다.

순간 엄청난 기세가 일어나 해일처럼 담호를 덮쳐 왔다. 하지만 담호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난 발정 나서 아무에게나 들이대는 암캐를 좋아하지 않소.”

“설령 그녀가 암캐라고 해도 본채의 식구일세.”

“그래서?”

“죄를 지었으면 응당한 대가를 치러야지. 이곳 뒤편에 참회동이라고 있네. 거기서 한 사흘만 있다 나오게.”

“그러지.”

담호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총채주!”

“그럴 수는 없습니다.”

황경문의 결정에 뒤에 있던 채주들이 반발했다.

순간 황경문이 뒤돌아봤다.

“그럼 자네들이 해결하든가.”

“총채주!”

“이 친구의 별호가 무언지는 알고 있겠지? 권마일세.”

“…….”

“강호에서 가장 싸움질을 잘한다고 소문이 난 친구지. 그런데 난 이미 늙어 뼈다귀에 녹이 슬어 움직일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지. 그런 나에게 저 친구와 직접 싸우란 말인가? 농담이 심하군.”

황경문이 피식 웃었다. 그러자 장내를 압도했던 기도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조윤산이 그런 황경문을 보며 이를 뿌득 갈았다.

‘저 늙은 너구리가 제 손에 피를 묻히지 않으려고 발악을 하는구나.’

그렇다고 이제 와서 황경문의 결정에 반발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자칫하다가는 거사를 치르기도 전에 담호와의 격전으로 전력이 깎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때 윤충이 앞으로 나섰다.

“정히 저자를 참회동에 가두려거든, 금마구(禁魔拘)를 채우십시오.”

“금마구를?”

예상치 못한 윤충의 말에 황경문의 눈썹을 찌푸렸다.

금마구는 오래전부터 녹림에서 전해져 내려온 보물 중 하나였다. 만년묵철(萬年墨鐵)이라는 천하에서 가장 단단하면서도 무거운 금속을 제련해 만든 금마구는, 천 근의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일단 손발에 채워지면 엄청난 무게로 짓누르는 데다가 스스로의 힘으로는 풀 수 없어 최악의 구속구라고 불릴 정도였다.

윤충이 황경문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그 정도는 해야 다른 채주들의 불만을 잠재울 수 있습니다. 형님.”

“으음!”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나머지 채주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에게 금마구를 채우십시오.”

“그래야 합니다.”

“으음!”

결국 황경문이 나직한 침음성을 흘렸다.

그 순간 담호가 앞으로 나서며 두 팔을 내밀었다.

“채워!”

“그래도 되겠는가?”

황경문의 물음에 담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버니.”

황혜령이 안타까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가흔이 빌미를 주었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패도적으로 반응할 필요는 없었다.

도가 지나친 반응이 불러온 후폭풍은 패왕채 전체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 사실이 못내 불안한 황혜령이었다.

그때였다.

“괜찮을 거예요.”

방진보가 그녀를 위로했다.

“무슨 말이야?”

“형은 절대 이유 없이 그런 행동을 할 사람이 아니에요.”

“하지만…….”

“형을 믿어요.”

모두가 불신의 눈빛을 하고 있을 때도 방진보의 눈엔 한 점의 의심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담호를 믿었다.

‘형이 이런 일을 벌였을 때는 반드시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을 거야.’

그의 믿음은 거의 신앙에 가까웠다.

담호의 팔과 다리에 금마구가 채워지고 있었다.

천 근의 무게가 담호의 팔과 다리를 옥죄어 왔다. 보통 사람은 움직이기는커녕 숨도 쉬지 못할 무게다.

조윤산이 담호의 곁으로 다가와 속삭였다.

“네놈…… 결코 참회동에서 살아 나오지 못할 것이다.”

“아직도 기억해 내지 못한 모양이군.”

“너?”

“빨리 기억해 내는 게 좋을 거야. 네 기억을 모조리 뒤지라구. 안 그러면 내가 기억해 내게 만들 테니까.”

담호의 목소리는 이상하게 섬뜩한 여운을 남겼다.

조윤산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담호는 녹림의 무인들에게 둘러싸인 채 참회동으로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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