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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147화 (147/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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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화 8장. 죽음보다 더한 고통도 존재한다(1)

녹왕전(綠王殿)은 패왕채 내에서 가장 큰 전각이었다.

평소에는 굳게 닫혀 있지만 녹림의 운명을 건 중요한 대사를 결정해야 하는 일이 생기면 열리게 된다.

조윤산은 흑수채의 채주 자격으로 녹왕전을 열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황경문은 조윤산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긴 탁자를 죽심으로 황경문을 필두로 조윤산과 곽삼, 오종삼, 이가흔 등이 앉아 있었다.

녹림십팔채 중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전력을 가진 채주들의 회동이었다. 당연히 녹왕전 주위에 삼엄한 경계망이 세워졌다.

황경문은 태사의에 앉아 조윤산을 바라보았다.

녹림의 절대자가 바라보고 있음에도 조윤산은 하나도 기죽은 표정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두 눈을 똑바로 뜬 채 황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 채주.”

“예! 총채주님.”

“오늘 녹왕전을 열자 한 이유를 말하시게.”

“마교 때문입니다.”

“마교라…….”

“이미 아시겠지만 마교의 재등장은 기정사실입니다. 이미 마교에 의해 멸문한 문파도 나왔습니다.”

“그래서?”

“우리 녹림도 마교에 대항하기 위한 방안을 의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저희들이 이곳에 온 이유입니다.”

조윤산의 설명에 황경문이 나머지 채주들을 바라봤다.

“자네들의 생각도 그와 같은가?”

“그렇습니다.”

세 사람이 입을 모아 대답했다.

황경문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마교의 침공에 대비를 할 생각을 하다니 대단하군.”

“어떠한 경우에도 녹림은 살아남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비록 이 자리에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산채 일곱 곳이 저희와 뜻을 함께하기로 했습니다.”

“대단하군. 어떤 산채들인지 알 수 있겠나?”

“오호채, 북왕채, 곤산채, 백마채, 후암채, 적룡채, 대광채입니다. 여기 그들의 수결이 담긴 연판장입니다.”

조윤산이 품에서 돌돌 말린 연판장이 나왔다. 조윤산은 황경문에게 조심스럽게 연판장을 바쳤다.

연판장을 펼치자 조윤산이 언급한 산채들의 채주 이름과 직접 쓴 수결이 적혀 있었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진품이었다.

“이들이 모두 마교의 침공에 대비를 할 것을 결의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들은 모두 저의 의견에 전폭적인 지원을 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꽤나 바빴겠군.”

연판장에 적혀 있는 산채들은 모두 중원 전역에 흩어져 있었다. 흑수채에서 가장 가까운 산채가 오백여 리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고, 가장 먼 산채는 물경 수천 리 거리를 두고 있었다.

평소에도 왕래는커녕 일 년에 한 번 소식을 듣기가 힘들 정도였다. 지리적인 한계를 뛰어넘어 지지를 받아 냈다는 것 자체가 조윤산의 능력을 보여 주는 단적인 증거였다.

황경문의 눈매가 좁아졌다. 그의 눈앞에서 조윤산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같이 온 자들만 신경 썼는데 일곱 곳에서 지지를 받아 냈단 말인가?’

그렇다면 총 열 개의 산채가 조윤산의 편에 섰다는 뜻이다. 단순히 세 명의 채주가 동행을 한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조유산이 생글생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도 이렇게 많은 채주들이 흔쾌히 연판장에 수결할 줄 몰랐습니다. 그만큼 녹림을 생각하는 마음이 크다는 증거겠지요.”

“그렇겠군. 그래, 일곱 곳의 산채에서 지지를 받아 냈다면 마교의 침공에 대비할 대안도 생각해 놨겠군.”

“당연히 그렇습니다.”

“듣고 싶군. 어떤 대안을 생각했는지.”

“결코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런가?”

“예!”

조윤산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의 입가에 어린 미소가 짙어진 만큼 황경문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래, 대안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총채주께서 자리에서 물러나시는 겁니다.”

“농담이 지나치군.”

“농담이 아닙니다. 저희는 총채주 체제하에서는 절대 마교에 효율적으로 대항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총채주님이 스스로 물러나 주십시오.”

조윤산이 스스럼없이 말했다.

순간 장내의 공기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차갑게 식었다.

“스스로 물러나라? 이 황경문이?”

“그렇습니다. 녹림을 위해서, 총채주의 명예를 위해서. 당금의 녹림엔 더 젊고 진취적인 사람이 필요합니다.”

“자네 같은?”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조윤산이 이제껏 숨겨 왔던 야망을 드러냈다. 그리고 같이 온 채주들이 그에 동조했다.

“이제 총채주의 시대는 저물었습니다. 녹림엔 새로운 인물이 필요합니다.”

“물러나십시오.”

“스스로 물러나지 않으시겠다면 강제로 물러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부디 험한 꼴 당하지 마시고, 명예롭게 은퇴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건 진심입니다.”

“큿!”

황경문이 웃었다.

조윤산의 야망은 일찍이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흑수채의 채주가 되기 전부터 두각을 드러냈으니까.

“자네가 녹림에 투신한 것이 이십 년 정도 되었나?”

“그렇습니다.”

“그 정도면 야망을 숙성시키기에 충분한 시간이군.”

“총채주만 아니었다면 더욱 일찍 이뤄졌을 겁니다.”

“아직도 그날의 일로 나를 원망을 하는 건가?”

황경문의 눈에 한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순간 장내의 공기가 차갑게 식었다.

몸 안에 쌓은 내력이 외기와 동조하는 수준. 구대문파와 같은 초거대 문파 중에서도 극소수의 몇 명만이 이 정도의 묘기를 보일 수 있었다.

곽삼 등의 표정이 변했다.

‘총채주의 무공이 이 정도였나?’

황경문이 녹림의 절대자에 오른 지 벌써 수십 년. 그의 강함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 수준에 올랐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황경문의 강함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가 있기에 녹림이 무시당하지 않을 수 있었고, 오늘의 성세를 이룰 수 있었다.

그는 녹림을 수호하는 든든한 방벽이었다. 하지만 녹림의 패권을 노리는 자들에겐 절망의 벽이기도 했다.

좋은 말로 녹림이라고 표현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들은 약탈을 업으로 삼는 도적들이었다.

도덕과 규율보다는 자유로움을 사랑했고, 타인의 부(富)를 빼앗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하지만 황경문은 이유 없는 약탈을 금지시켰고, 엄격하게 그들을 통제했다.

당연히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황경문이란 거인이 건재하기에 그들은 참아야만 했다.

그렇게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고, 내부의 불만은 커져만 갔다. 특히 각 산채를 이끄는 채주들은 휘하 녹림도들의 불만을 감당해야 했다.

그때 그들을 찾아온 이가 조윤산이었다. 조윤산은 교묘한 언변으로 그들의 욕망과 불만을 자극했다.

그것이 그들이 조윤산에게 동조하는 이유였다. 하지만 막상 황경문의 가공할 만한 존재감과 맞닥트리니, 애써 끌어 올렸던 자신감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단 한 명, 조윤산은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고 있었다.

“저는 오히려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목표를 갖게 되었거든요.”

“뭐라?”

“그날의 굴욕이 오늘날의 저를 있게 만들었습니다.”

“굴욕이라……. 이제까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나?”

“나와 수하들이 피땀 흘려 노획한 모든 것을 빼앗아 갔잖습니까. 그건 당신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건을 약탈하는 것까지는 눈감아 줄 수 있지. 허나 어린아이를, 그것도 갓 젖을 땐 어린아이를 노예로 팔아먹는 짓 따위를 용납할 수는 없지.”

“그래서 그 아이를 데려가 자신의 딸로 키운 겁니까? 그 아이가 자라서 자신의 신세내력을 알게 되면 어떻게 행동할지 뻔히 알면서도?”

조윤산의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황경문이 그런 조윤산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더 이상 들어 줄 수 없군. 윤충.”

“예! 총채주님.”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윤충이 안으로 들어왔다.

윤충 뒤로 일단의 무인들이 보였다. 패왕채의 정예들이었다. 그들이 황경문의 등 뒤에 도열했다.

황경문이 허연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들을 정중히 모시게. 연판장에 수결한 채주들에게도 응당 책임을 물어야겠지.”

“예!”

윤충이 정중히 대답했다.

황경문이 조윤산을 바라봤다.

“마교를 명분으로 내세운 것은 나로서도 뜻밖이었네. 반대할 이유가 없으니까. 하지만 자네들은 실수했네. 자신들 스스로 범의 아가리에 들어온 격이니까.”

“확실히 패왕채는 범의 아가리가 맞지요. 허나 범의 아가리가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요.”

“뭐라?”

푹!

순간 황경문은 허리 뒤쪽에 엄청난 통증을 느꼈다.

“큭!”

황경문의 신형이 비틀거렸다.

뒤를 돌아보니 허리에 검붉은 비수 한 자루가 손잡이만 남겨 두고 꽂혀 있었다.

“무슨?”

황경문이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했다.

비수를 꼽은 자는 바로 그의 심복인 윤충이었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형님.”

“네, 네가 왜?”

황경문의 목소리가 절로 떨렸다.

윤충은 그의 수십 년 지기였다. 함께 패왕채를 이끌어 왔고, 누구보다 그를 잘 따랐다. 그런 그가 자신의 허리에 비수를 꽂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윤충 대신 조윤산이 대답했다.

“그 역시 야망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야망?”

“윤충 형님이라고 언제까지 총채주님의 뒤치다꺼리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삼십 년이나 이인자의 위치에 있었으면 당연히 일인자가 되길 꿈꾸지요. 저희는 윤충 형님을 총채주로 밀기로 이미 합의했습니다.”

조윤산의 말에 곽삼 등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경문이 윤충에게 물었다.

“그의 말이 정말인가?”

“죄송합니다, 형님.”

“어떻게 자네가?”

“삼십 년 동안이나 녹림의 절대자로 고단하게 살아오셨으니 이제 편히 쉴 때도 되셨습니다. 형님.”

“허허!”

결국 황경문이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윤충은 그가 가장 믿었던 이였다. 세상 모든 이가 배신을 하더라도 윤충만은 절대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윤충의 배신은 그에게 큰 심적 타격을 주었다. 하지만 황경문은 허리를 쭉 폈다.

“내가 방심했군. 이토록 치밀하게 준비하다니. 정말 대단해.”

“천하의 패왕도를 상대하는 일입니다. 당연히 철저히 준비해야지요.”

“허나 겨우 이 정도로 나를 어찌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런 상처 따위에 내가 눈 하나 깜짝할 것 같나?”

황경문이 허리에 꽂혀 있던 비수를 뽑았다.

그그극!

검붉은 비수가 그의 손아귀에서 형편없이 구겨졌다.

고철이 된 비수를 바닥에 던진 황경문이 공력을 끌어 올렸다. 그러자 산악 같은 기세가 일어나 장내를 휩쓸었다.

모두의 안색이 변했다. 설마 이 정도의 상처를 입고도 이런 기세를 발산할 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 한 명 조윤산은 여전히 태연한 모습이었다.

“제가 설마 그 정도로 총채주를 어찌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겠습니까?”

“그럼…….”

“비수 끝에 몇 가지 독을 발라 두었습니다.”

“독?”

“산공독과 폐혈산(肺血酸)입니다. 아시다시피 산공독은 공력을 흩트려 놓고, 폐혈산은 폐를 녹이는 극독이지요. 총채주님을 죽이지는 못하더라도 무력화시키기엔 충분할 겁니다.”

“대단해! 철저하게 준비했군.”

“과찬이십니다.”

조윤산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윤충의 뒤에 서 있던 패왕채의 정예들이 황경문을 에워쌌다.

“너희들도 배신한 것이냐?”

“죄송합니다.”

“조윤산이 대가로 무엇을 제시했는지 모르지만 곧 후회하게 될 것이다.”

황경문이 이를 악물었다.

벌써부터 공력이 가닥가닥 끊기고 있었다. 조윤산이 준비한 산공독이 제대로 작용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입가에 혈흔이 내비치는 것은 폐혈산이 폐를 공격하고 있다는 뜻.

‘속전속결해야 한다. 시간을 끌수록 나만 불리해진다.’

“참, 외부의 도움은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겁니다. 권마는 참회동 안에서 처참히 죽어 갈 것이고, 혜령 역시 살아남지 못할 테니까요. 당신의 죽음과 함께 녹림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될 겁니다.”

조윤산이 히죽 웃었다.

그 순간 황경문을 에워싸고 있던 무인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촤앙!

녹림 역사상 유례가 없는 흉악한 싸움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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