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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화 8장. 죽음보다 더한 고통도 존재한다(2)
황혜령의 거처는 패왕채 외곽에 있었다. 그녀의 성격 자체가 조용한 것을 좋아하고, 번잡함을 싫어하는 터라 될 수 있으면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을 택한 것이다.
그녀가 머무는 방 안은 수수했다. 화려한 가구도 없었고, 여자들이라면 으레 갖고 있는 장신구도 거의 없었다.
벽을 장식하고 있는 것은 오직 한 자루의 검뿐. 그 외의 어떤 물건도 없어 황량해 보일 정도다.
“휴!”
황혜령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했다.
그녀의 시선이 창밖 너머 황경문의 거처를 향했다.
“회의는 잘하고 계시겠지?”
녹림을 대표하는 산채들의 채주들이 모이는 자리였다. 아쉽게도 그녀에겐 그 자리에 참석할 자격이 없었다.
똑똑!
그때 누군가 급히 그녀의 방문을 두들겼다.
“아가씨, 저 일광입니다.”
묵일광이었다. 그는 황혜령의 대답도 듣지 않고 벌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아가씨, 어서 이곳을 피해야합니다.”
“무슨 일이야?”
“설명할 시간이 없습니다.”
대답을 하는 묵일광의 전신에는 핏방울이 점점이 묻어 있었다.
황혜령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녀도 본능적으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황혜령이 벽에 걸린 검을 들고 급히 묵일광을 따라나섰다.
그들이 문을 나선 순간이었다.
“일광!”
갑자기 수십여 명의 무인들이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묵일광의 눈빛이 사납게 변했다. 그렇지 않아도 험악하던 인상이 더욱 무섭게 변했지만, 그의 앞을 막아선 무인들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무인들의 선두에 선 남자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묵일광과 견줘 보아도 뒤지지 않는 체구와 인상의 소유자였다.
“어디를 급히 가려는 것인가? 일광.”
“광천! 감히!”
묵일광의 눈에 살기가 떠올랐다.
그의 앞을 막아선 남자의 이름은 유광천, 등룡대를 이끄는 수장이자 묵일광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다.
유광천이 들고 있는 검에서는 피가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같은 등룡대의 무인들을 벤 흔적이었다.
불과 일각 전 유광천은 자신의 휘하에 있는 등룡대의 무인들 다섯 명을 기습해 죽였다.
그들은 모두 묵일광과 절친한 이들로 평소 유광천을 마뜩지 않게 여겼던 자들이었다.
“네가 그러고도 무사하길 바라느냐? 광천.”
“이제 곧 녹림의 하늘이 바뀔 것이다. 내가 망설일 이유가 무에 있겠느냐?”
“하늘이 바뀐다고……. 설마?”
“그래! 지금쯤이면 바뀌고 있겠지.”
유광천이 슬쩍 황경문의 거처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황혜령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기어이 일을 벌인 건가요? 다른 채주들이야 그럴 수 있다고 치더라도 당신들이 어떻게?”
등룡대는 황경문이 녹림의 미래를 위해 심혈을 기울여 키운 조직이었다.
그들을 키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투자와 노력이 들어갔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황혜령이었다.
다른 모든 이들이 배신해도 끝까지 배신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조직이 바로 등룡대였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들만큼은 절대 배신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에 그녀가 느끼는 충격은 더욱 컸다.
“세상엔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는 법이지. 굳이 이해하려고 하지 마.”
유광천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그의 주위에 있는 등룡대의 무인들이 그에 동조했다.
황혜령은 눈앞의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지독한 배신감에 절망이 밀려오는 순간이었다.
“아가씨, 등룡대 모두가 저들에게 동조한 것은 아닙니다.”
묵일광의 단단한 음성이 흔들리는 그녀의 마음을 다잡았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유광천이 등룡대주로 있다지만, 등룡대를 완전히 장악한 것은 아니었다. 유광천은 등룡대의 인망을 완전히 얻지 못했다. 상당수의 등룡대 무인들이 유광천보다 묵일광을 따르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기에 유광천도 제일 먼저 반기를 들 만한 무인들을 기습해 제거한 것이다.
“후우!”
황혜령이 큰 숨을 들이쉬었다가 다시 숨을 내뱉을 때 그녀의 눈동자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일광!”
“예! 아가씨.”
“참회동으로 가요.”
“총채주님께 가지 않구요?”
“우리 전력으로 가 봐야 별반 도움이 안 될 거예요. 차라리 오라버니를 풀어 주는 게 훨씬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알겠습니다.”
묵일광이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유광천이 그런 묵일광을 보며 조소했다.
“소용없을 거야.”
“뭐?”
“괜히 그에게 금마구를 채워 놓은 줄 알아? 다 이런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야. 아마 지금쯤 그도 피를 토하고 죽었을걸. 흐흐!”
“흐흐!”
“제 아무리 권마라고 해도 손발을 묶어 놓은 후 독살하면 소용없지.”
등룡대의 무인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하지만 그들의 도발에도 묵일광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형님이 절대 쉽게 당할 리 없다. 놈들은 형님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콱!
묵일광이 두 자루 도끼를 꺼내 들었다.
‘시간을 끌수록 불리한 것은 이쪽이다. 선수필승(先手必勝)의 묘를 살린다.’
결심을 굳히자 묵일광은 망설임이 없었다.
쉬앙!
묵일광이 혈천부법(血天斧法)을 펼치며 유광천을 향해 달려들었다.
강력한 부기(斧氣)가 유광천을 향해 날아갔다.
“크윽!”
유광천이 기겁을 하며 들고 있던 검을 휘둘렀다.
콰앙!
굉음과 함께 유광천의 몸이 들썩였다.
두 사람의 무공은 호각이었다. 하지만 한 사람은 거대한 도끼를 무기로 사용하고, 다른 한 사람은 검을 사용한다.
아무래도 무게감에서 검이 도끼에 밀릴 수밖에 없었다.
“감히!”
“죽여!”
등룡대의 무인들이 유광천을 돕기 위해 나섰고, 몇 명은 황혜령을 잡기 위해 움직였다.
묵일광이 얼마나 가공할 무위를 지니고 있는지는 등룡대의 무인들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묵일광이 끝까지 등룡대에 남아 있었다면 유광천이 대주가 되는 일은 절대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묵일광의 무공은 발군이었고, 따르는 이들도 많았다.
‘반드시 놈을 죽여야 한다. 그래야만 등룡대를 완벽하게 장악할 수 있다.’
유광천이 이를 악물고 묵일광을 공격했다.
그들이 전력으로 싸우고 있는 사이 황혜령도 최선을 다해 무공을 펼치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등룡대였다.
녹림의 수많은 무인들 중에서도 단연 발군의 전력을 지닌 무인들. 그들을 뚫고 담호에게 가는 길이 요원해 보였다.
‘오라버니.’
담호가 눈을 떴다.
굳게 닫혀 있던 쇠창살 사이로 낯익은 얼굴의 간수가 보였다.
간수의 손에 들려 있는 쟁반 위에는 이가 빠진 식기와 숟가락이 올려져 있었다.
“식사하시오.”
간수가 퉁명스럽게 말하며 쇠창살 사이로 쟁반을 밀어 넣었다.
담호가 참회동에 갇힌 후 매일 한 번씩 이렇게 식은 죽이 배급되었다. 하루에 한번 밖에 배급되지 않기에 담호는 단 한 번도 죽을 거르지 않았다.
간수는 이번에도 담호가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쟁반을 받아 든 담호는 빤히 바라보기만 할 뿐 먹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담호가 음식을 먹지 않자 간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왜 그러느시오? 어서 드시기나 하시오. 그래야 쟁반을 치울 것 아니오?”
“시작했나?”
“뭐?”
간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담호가 쟁반을 든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간수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무, 무슨 짓이냐?”
어찌나 놀랐는지 말까지 더듬었다.
담호가 그를 향해 죽이 담긴 그릇을 내밀었다.
“먹어 봐.”
“미친! 그걸 내가 왜 먹소? 당신이야말로 헛수작하지 말고 어서 식사나 하시오.”
“독이 들어서는 아니고?”
“도, 독이라니?”
어찌나 놀랐는지 간수가 말을 떠듬거렸다. 담호는 그런 간수를 빤히 바라봤다.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눈빛에 간수가 흠칫 몸을 떨었다.
철창 너머의 존재는 권마였다.
권마라는 별호처럼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 데다 포악하기 그지없는 짐승 같은 존재.
그의 손에 죽은 무인들의 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일개 도적에 불과한 자신의 목숨은 바람 앞의 촛불 신세였다.
겁을 집어먹었던 간수의 눈에 담호의 손발에 차인 금마구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와 자신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철창도.
쇠창살은 단단하기로 소문난 묵철을 제련해 만들었다. 어지간한 고수는 쇠창살에 흠집을 낼 수도 없었다.
생각해 보니 쇠창살 안에 갇혀 있는 담호가 자신을 헤칠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간수가 웃었다.
“용케도 독이 있는 것을 알아차렸구나. 하지만 그 안에 있는 이상 네놈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차라리 독을 먹고 편히 죽는 게 좋았을 텐데. 흐흐!”
“조윤산이 사주했나?”
“흐흐! 그렇다면 어쩔 테냐?”
간수가 음소를 흘리며 참회동의 벽을 손으로 쳤다. 그러자 참회동 밖 잔도에 대기하고 있던 수십여 명의 무인들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하나같이 흉흉한 기세를 발산하는 이들은 흑수채와 백록채에서 차출된 무인들이었다.
그들이 쇠창살 안에 갇혀 있는 담호와 간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직 살아 있잖아?”
“놈이 죽에 독이 든 것을 눈치챘소.”
“그래? 쯧! 쓸데없이 눈치만 빠르군. 뭐, 그 덕에 더 고통스럽게 죽게 되었지만.”
혀를 차는 남자는 조윤산의 심복인 좌신충이었다.
조윤산은 그에게 담호를 독살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겼다.
참회동을 지키는 간부를 매수하여 혈루단장산(血淚斷腸酸)이라는 극독을 건네주었다.
혈루단장산은 일단 복용하면 내장이 조각조각 끊기고,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죽어 가는 무시무시한 극독이었다. 해약도 없어서 일단 복용하면 죽음은 기정사실이었다.
좌신충이 담호를 보며 말했다.
“이렇게 된 이상 차라리 스스로 독을 들이키는 게 좋을 거다. 더 고통스럽게 죽고 싶지 않으면.”
“어떻게 죽이겠다는 거지? 난 이 안에 있는데.”
“쇠창살이 네놈을 보호할 수 있을 듯싶으냐?”
좌신충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그를 따라온 무인들 중 십여 명 정도가 품에서 은색의 원통을 꺼내 들었다. 어린아이 팔뚝만 한 길이의 원통엔 조그만 구멍이 십여 개가 뚫려 있었다.
겨우 한 사람이 들어올 수 있는 출구를 제외하면 사방이 꽉 막힌 좁디좁은 동혈이었다. 일단 암기가 발사되면 피할 공간 따윈 없었다.
무인들은 원통의 구멍을 담호를 향해 겨눴다.
“당문의 금용 암기인 절명탈혼침(絶命奪魂針)이다. 일단 격중 되면 뼈와 살이 녹아 한 줌의 혈수가 되고 말지. 흐흐!”
절명탈혼침은 머리카락보다도 가늘었다. 일단 원통에서 발사되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막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좌신충의 미소가 짙어졌다.
반면 담호의 눈빛은 한없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는 언젠가 저것과 똑같은 물체를 본 적이 있었다.
악양으로 향하던 장강의 운마도강선.
선도표국이 운송하던 물체가 딱 저렇게 생겼었다. 그들도 당문에서 보낸 표물을 운송한다고 했다.
‘당문이 보낸 물건이 이곳으로 흘러들어온 것인가?’
절명탈혼침이 어떤 위력을 지녔는지 담호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금용 암기로 지정된 것을 보아 범상치 않은 위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한번 격발되면 십여 개의 세침이 날아온다. 그런 절명탈혼침이 십여 개나 있다. 한 번에 무려 백여 개의 세침이 날아오는 셈이다.
사방이 꽉 막힌 동혈 안. 담호가 피할 공간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좌신충이 담호를 조롱하듯 말했다.
“절명탈혼침을 맞고 죽는 것보다 죽에 든 혈루단장산을 마시고 죽는 것이 그나마 편할 것이다. 어떤 방법을 택하겠느냐?”
“혈루단장산…….”
“잘 생각했다. 그나마…….”
“네놈의 입에 넣어 주지. 그래도 떠들 수 있다면 떠들어 봐.”
일말의 감정조차 담기지 않은 차가운 음성에 좌신충은 소름이 오싹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가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쏴라! 놈을 벌집으로 만들어 버려.”
슈슈슉!
절명탈혼침이 발사되었다. 백여 개의 세침이 비처럼 담호를 향해 쏟아졌다.
츠츠츠!
그 순간 담호의 몸이 흐릿하게 변하며 수만 마리의 벌들이 일제히 날갯짓하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방패, 최강의 방호기공이 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