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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150화 (15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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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화 8장. 죽음보다 더한 고통도 존재한다(4)

“헉헉!”

묵일광의 입술을 비집고 거친 숨이 흘러나왔다.

그의 전신은 피로 물들어 있었고, 발치에는 십여 명의 무인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두 자루 도끼로 펼치는 묵일광의 혈천부법은 실로 무서웠다. 강력한 부기(斧氣)는 달려드는 무인들을 단숨에 두 동강 냈으니까.

달려드는 족족 죽어 나가자 등룡대주 유광천은 방법을 바꿨다. 정면에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외곽에서 툭툭 치고 빠지는 것으로.

승부를 장기전으로 몰고 가 묵일광의 힘을 빼 놓으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면서 황혜령 쪽으로 무인들을 더 보냈다.

묵일광은 황혜령을 곁에서 지키기 위해 등룡대의 대주직마저 마다했다. 그만큼 황혜령을 아끼고 사모한다는 뜻.

‘황혜령을 건들면 분명 신경이 분산될 것이다.’

유광천의 계략은 성공했다.

더욱 많은 병력이 집중되자 황혜령은 손발이 어지러워졌고, 그녀의 위기를 본 묵일광의 얼굴에는 다급한 표정이 떠올랐다.

머리로는 냉정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가슴은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시선과 감각은 온통 황혜령을 향해 있었다. 자연 신경이 분산될 수밖에 없었다.

유광천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서걱!

“크윽!”

유광천의 검이 묵일광의 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긴 자상이 생기면서 피가 튀어 올랐다.

다행히 뼈가 상하지는 않았지만, 근육이 갈라지면서 도끼를 잡은 손에 힘을 제대로 줄 수가 없었다.

“옳지!”

유광천이 쾌재를 불렀다.

묵일광의 혈천부법은 두 자루의 도끼를 이용할 때 제대로 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한 자루의 도끼라도 제대로 사용할 수 없다면 위력이 크게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죽어랏!”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등룡대의 무인이 묵일광에게 달려들었다.

“흐아앗!”

하지만 묵일광도 산전수전을 다 겪은 무인이었다. 오히려 기합을 내지르며 역공을 했다.

쾅!

“크윽! 제기랄!”

묵일광의 도끼에 검이 막힌 무인이 욕설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생각보다 어둡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일격에 사람을 두 동강 내던 묵일광이었다. 검으로 막으면 검까지 박살 냈고, 도로 막으면 도와 사람째 두 동강 냈다.

그렇게 위력적인 도끼 공격을, 무기에 아무런 손상도 입지 않고 막아 냈다. 묵일광의 공격이 그만큼 약해졌다는 뜻이다.

“놈도 지쳤다. 더 몰아쳐랏!”

유광천이 수하들을 독려했다.

무인들은 더욱 거세게 묵일광을 공격했다.

“으득!”

묵일광이 이빨이 부러져라 갈았다.

마음 같아서는 유광천을 씹어 먹고 싶었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유광천은 교묘하게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아가씨!’

황혜령이 악전고투를 하고 있었다.

그만큼 황혜령의 전신도 피로 물들고 있었다.

황혜령의 시선이 묵일광과 마주쳤다. 그녀의 악다문 입술과 일그러진 얼굴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순간 묵일광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들끓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가슴 밑바닥에서 치고 올라온 기운은 그의 손을 지나 도끼로 분출됐다.

“으아아!”

강력한 부기가 발출되었다. 이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위력의 부기는 달려들던 세 명의 무인들을 무기와 함께 동강 냈다.

길이 열렸다.

묵일광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몸을 날렸다.

그런 묵일광의 등을 유광천의 검이 훑고 지나갔다. 근육이 갈라지고 뼈가 들러날 정도의 상처를 입었다.

극심한 통증에 묵일광이 입을 떡 벌렸다. 하지만 그는 고통을 참아 내며 황혜령을 향해 달려갔다.

서걱!

그 순간 유광천의 검이 묵일광의 다리를 베었다.

묵일광의 커다란 몸이 휘청거리더니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급히 일어나긴 했지만 다리의 상처가 너무 커서 제대로 걷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유광천이 그런 묵일광을 보며 음소를 흘렸다.

“그렇게 쉽게 갈 수 있을 것 같았나? 흐흐!”

“광……천.”

묵일광의 눈에 핏발이 섰다.

전날 방진보가 찾아왔었다. 그는 담호의 말을 전하며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했었다.

묵일광은 알았다고 대답했었다. 하지만 설마 패왕채 내에서 그렇게 대담하게 조윤산이 일을 저지를 줄 몰랐다.

‘내 실수다. 더 조심하고 주의했어야 했는데.’

그사이 황혜령을 향한 공격은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황혜령은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한계에 달해 있었다.

“이제 그만 반항하거라.”

“반항할수록 고달파지는 것은 너뿐이란다.”

“우리도 이러고 싶지는 않다.”

황혜령을 공격하는 무인들의 눈에도 갈등의 빛이 살짝 어려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들은 황혜령을 무척이나 아꼈었다. 이젠 입장이 달라져 검을 겨눠야 하는 상황이 되었지만 꺼림칙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차라리 깔끔히 죽었으면 이런 죄책감도 들지 않았을 텐데, 황혜령은 악착같이 버티며 반항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녀의 전신에 상처가 늘고 있었다.

황혜령이 입술을 깨물었다.

분했다.

힘이 없는 자신의 모습이 처량했다.

챙!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검이 상대의 무기에 튕겨 나갔다. 무방비 상태가 된 그녀의 가슴에 무인의 주먹이 작렬했다.

퍽!

“아악!”

가슴에서 느껴지는 촉감에 황혜령이 비명을 질렀다. 고통보다 수치심이 밀려왔다.

“흐흐! 부드럽구나.”

황혜령의 가슴을 친 무인이 음소를 흘렸다.

실수가 아니라 일부러 가슴을 노린 것이 분명했다.

그는 평소에도 행실이 좋지 않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황경문이 건재했을 때는 감히 음심을 품을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상황이 바뀌니 본색을 드러낸 것이다.

황혜령은 녹림에서도 손꼽히는 미인이었다. 그녀가 수치심에 얼굴을 붉히는 모습에 묘한 색기가 느껴졌다.

이렇게 되자 몇몇 무인이 그의 행위에 동조했다. 그들은 더욱 황혜령을 희롱했다.

다른 무인들이 만류하려 했지만, 이미 분위기를 탄지라 소용이 없었다.

“아가씨!”

묵일광의 처절한 음성이 황혜령의 귓전에 울려 퍼졌다.

그의 음성에 담긴 노기와 안타까움이 절절히 전해져 왔다.

‘일광!’

황혜령이 눈물을 흘렸다.

공격하던 무인 중 한 명이 검으로 그녀의 어깨를 살짝 훑었다.

찌익!

옷이 잘려져 나가며 뽀얀 살결이 드러났다. 하얀 살에 붉은 실선이 가더니 피가 철철 흐르기 시작했다.

이미 기세는 넘어갔다.

황혜령은 더 이상 싸울 힘이 없었다. 무인들은 황혜령을 괴롭히면서 그녀 스스로 포기하게 만들 계획이었다.

황혜령을 공격하는 무인들 중 가장 연장자인 왕직이 크게 떠들었다.

“그년, 통째로 먹어도 비린내 하나 나지 않겠……. 크헉!”

왕직은 말을 잇지 못했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그의 목덜미를 누군가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꺽꺽!”

숨이 막혀 왔다.

무가 뽑히듯 왕직의 두 다리가 땅에서 불쑥 뽑혀 올라갔다.

마치 점혈당한 것처럼 목덜미 아래로 감각이 없었다.

목덜미 뒤로 누군가의 숨결이 느껴졌다.

알 수 없는 공포가 왈칵 밀려왔다.

‘뭐, 뭐야?’

그 순간 누군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입은 만화의 근원이지.”

오싹!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왕직은 자신도 모르게 그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머리보다 먼저 본능이 두려움을 느끼고 반응하는 것이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고, 이빨이 딱딱 부딪쳤다. 등줄기를 따라 올라온 소름이 가라앉지 않았다.

“…….”

장내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황혜령을 희롱하던 무인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움직임을 딱 멈췄다.

“어, 언제?”

그들의 눈에 믿을 수 없다는 빛이 떠올랐다.

언제부턴지 모르지만 검은 일색의 남자가 그들 한가운데 서 있었다. 남자의 손에는 왕직의 목덜미가 잡혀 있었다.

왕직은 마치 축 늘어진 가지처럼 힘없이 덜렁거리고 있었다.

“오, 오라버니?”

황혜령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에 맺힌 사람은 담호였다. 황혜령의 눈동자에 금세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그 순간 담호가 왕직의 목을 그대로 돌려 버렸다.

우두둑!

“켁!”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왕직의 고개가 모로 돌아갔다.

왕직이 혀를 길게 빼문 채 즉사했다.

담호는 숨이 끊어진 왕직의 시신을 아무렇지 않게 던져 버렸다.

무인들은 가슴이 답답해져 옴을 느꼈다.

담호가 나타난 순간부터 공기도 유동을 멈췄는지 바람조차 불어오지 않았다. 모두의 등줄기가 땀으로 축축이 젖었다.

담호가 황혜령을 바라봤다.

만신창이가 된 황혜령의 모습을 본 순간 그의 눈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헉!”

그의 눈빛을 본 무인들이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담호가 황혜령을 향해 말했다.

“이리 와라.”

“오라버니.”

황혜령이 담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제까지 황혜령을 희롱하던 무인들은 감히 그녀를 막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담호가 나타난 그 순간부터 그들의 몸이 굳었다.

‘우, 움직여라. 제발!’

‘제기랄!’

그들의 등줄기가 축축하게 젖어 왔다.

움직이면 죽는다.

반드시 죽을 것이다.

담호가 나타난 순간부터 그들의 육감이 속삭이고 있었다.

상대는 항거가 불가능한 존재.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가만히 서서 목숨을 내줄 수는 없었다. 그들은 내공을 끌어 올리며 필사적으로 담호의 존재감에 대항했다.

그사이 황혜령이 담호의 앞에 도달했다.

황혜령의 얼굴은 피와 눈물로 얼룩이 져 있었다. 담호가 손을 뻗어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주었다.

“흐윽!”

갑자기 황혜령의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담호를 본 순간부터 이상하게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여전히 그녀와 패왕채를 둘러싼 상황은 변함없이 위험했다. 하지만 담호를 본 순간부터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담호가 그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등을 두들겨 주었다.

“괜찮을 거다.”

“흐으윽!”

황혜령의 울음이 커졌다.

담호의 말엔 그대로 이뤄질 것 같은 힘이 실려 있었다.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이상하게 안도감이 들었다.

누구도 담호처럼 확신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황혜령은 안도감에 하염없이 울었다.

담호는 울고 있는 황혜령을 뒤로하고 걸음을 옮겼다.

특유의 엇박자 걸음이 사람들의 가슴을 불길하게 자극했다.

“제, 제기랄!”

유광천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담호가 그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를 막아야 할 부하들이 겁에 질려 뒤로 밀려났다.

해일처럼 밀려오는 공포는 부하들뿐만 아니라 유광천조차도 두렵게 만들었다.

“뭐, 뭐냐? 네놈이 정말 인간이 맞느냐?”

애써 담담하려 했지만 유광천의 목소리는 조금씩 떨려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유광천 본인은 그런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담호의 감정 없는 시선이 유광천과 무인들을 훑고 지나갔다. 그의 시선을 받은 무인들은 자신도 모르게 진저리를 쳤다.

다음 순간 담호가 입을 열었다.

“너희들 스스로 자결하는 게 좋을 거야.”

“뭐, 뭐라고?”

“지금부터 살아 있다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울 수 있는지 알게 될 테니까.”

그 어떤 감정도 실리지 않은 무감각한 음성을 듣는 순간 유광천은 정신이 다 아득해져 옴을 느꼈다.

담호가 아닌 다른 누군가 저와 같은 말을 했다면 미친놈이라고 비웃었을 것이다. 하지만 담호의 입에서 저 말이 흘러나오자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져 왔다.

마치 사신이 죽음을 판결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는 없는 노릇.

유광천이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놈을 공격해. 놈을 죽이지 못하면 우리가 죽는다.”

“우와악!”

무인들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담호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들의 얼굴엔 절박한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담호를 죽이지 않으면 그들 앞에 펼쳐진 미래는 존재하지 않았다. 반드시 담호를 죽여야 했다.

그들은 앞뒤 가리지 않고 담호를 향해 달려들었다.

담호의 검은 눈동자에 해일처럼 밀려오는 무인들의 모습이 맺혔다.

“그래! 꼭 말로 하면 못 알아듣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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