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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화 1장. 마인이 황산을 피로 물들이다(3)
아직도 그날의 기억은 선명하게 뇌리에 남아 있었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날 그의 왼쪽 뺨에 지워지지 않는 낙인이 새겨졌는데. 잊고 싶어도 거울 앞에 서면 상처가 보였다. 그러면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날 아침은 유난히 상쾌했었다. 그래서 즐거운 마음으로 약탈을 했다. 특별히 목표를 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태백산 자락을 지나다가 우연히 들르게 된 마을이 표적이 되었을 뿐이다.
꽤 많은 이들을 죽였고, 적잖은 물건들을 노획했다.
문제는 마지막 집을 약탈할 때였다. 아비가 활을 쏘며 그렇게 끈질기게 대항하더니 그 아들까지 부엌칼을 집어 들고 달려들었다.
아비 때문에 신경이 분산된 사이 아들이 칼로 그의 얼굴에 상처를 냈다. 그것도 모자라 그의 부하 목덜미까지 물어 절명케 했다.
독종도 그런 독종이 없었다. 그래서 확실히 죽였다. 두 번 다시 살아나지 못하도록.
그런데 이상하게 독종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았다. 어쩌면 그날의 지긋지긋한 기억을 본능적으로 잊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지금 담호를 마주하게 되자 잊고 있던 기억이 다시 선명하게 살아났다.
“네, 네가 그 꼬마…….”
“보고 싶었어.”
“끄으으!”
조윤산의 얼굴이 보기 싫게 일그러졌다.
그 순간에도 지옥혈의가 그의 전신 곳곳을 깨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 너를 위해 준비한 거니까.”
그 지옥 같던 지하공간을 탈출할 때 담호는 지옥혈의를 잡아 진흙으로 만든 병에 넣어 나왔다. 그리고 탈출 후 자기병으로 옮겨 담아 이제까지 소중하게 보관해 왔다.
담호가 살면서 가장 큰 고통을 느꼈던 순간은 바로 지옥혈의에 물렸을 때였다.
그때 느꼈던 고통을 조윤산에게도 느끼게 해 주고 싶었다.
손톱으로 전신의 피부를 모조리 벗겨 내고 근육 사이를 헤집어야만 시원해질 것 같은 극도의 가려움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조윤산의 얼굴에 붉은 반점이 올라왔다. 지옥혈의의 독이 퍼져 나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으아악!”
조유산이 커다란 비명을 지르며 손톱으로 전신을 벅벅 긁었다. 하지만 아무리 긁어도 가려움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긁고 또 긁었다. 피부가 벗겨져 나가고 시뻘건 속살이 드러나며 피가 철철 흘렀다. 그래도 조윤산은 멈추지 않고 긁었다.
“제발 살려 줘!”
조윤산이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하지만 담호는 그런 조윤산의 모습을 말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부우욱!
살이 찢겨져 나가고, 피부가 뜯어져 나가는 소리가 소름 끼치게 울려 퍼졌다.
그런 조윤산의 모습은 지켜보고 있는 이들에게 공포를 느끼게 하기 충분했다.
조윤산을 돕고 싶었지만 담호가 그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담호의 몸에서는 불길한 기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를 건드리는 즉시 감당할 수 없는 재앙이 닥쳐올 것이란 것을 모두가 본능으로 느끼고 있었다.
“저, 저?”
윤충이 이를 악물었다.
그의 눈앞에서 조윤산이 고통으로 발버둥 치고 있었다. 그런데도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어디서 이런 인간 같지 않은 놈이 튀어나와서…….’
강호는 때로 상식 외의 존재를 내보내곤 한다.
그들은 이전까지의 상식을 철저히 부정하고, 전혀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곤 했다. 그리고 그런 자들에 의해서 강호는 일대 변혁을 맞이했다.
하지만 그런 자들은 극히 적어 강호의 역사 전체를 통틀어 봐도 몇 명 되지 않았다.
‘설마 놈이 그런 존재란 말인가? 존재만으로도 강호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윤충이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순간에도 조윤산은 죽어라 비명을 지르며 전신을 벅벅 긁고 있었다.
피부를 벗기고 속살을 긁어도 미칠 듯한 가려움은 전혀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개미의 독이 더욱 퍼져 가려움증은 극심해져만 갔다.
얼마나 비명을 질렀는지 조윤산의 목소리는 쉬어서 거의 들리지도 않았다.
‘이 가려움증을 멈출 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것이다.
조윤산이 핏발 선 눈으로 담호를 바라봤다.
“제발 날 죽여……. 이 악마 같은 놈.”
“넌 쉽게 죽어서 안 돼. 그러면 너무 아깝잖아.”
“끄으으!”
“악착같이 견뎌 봐. 나도 그랬으니까.”
“으득!”
“나도 처음엔 죽을 것처럼 괴로웠어. 하지만 견디고, 또 견디니까 언젠가부터 그래도 참을 만하더라구. 너도 분명 그렇게 될 수 있을 거야.”
담호의 말에 조윤산이 이를 악물었다.
‘놈이 해냈다면 나도 할 수 있어.’
그는 일말의 희망을 가졌다. 하지만 현실은 지옥이었다. 그의 손은 여전히 전신을 벅벅 긁고 있었다. 너무 많은 피를 흘려서 바닥에 피 웅덩이가 고였다.
그가 살아날 확률은 채 일 할도 되지 않았다. 그는 숨이 붙어 있는 그 순간까지 전신을 긁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숨이 끊어질 것이다.
담호는 잠시 그를 내려다보다 몸을 일으켰다.
드디어 복수를 끝냈지만, 이상하게 별 감흥이 없었다.
시원하다는 감정도, 후련하다는 기분도 들지 않았다. 그저 해야 할 일을 끝냈을 뿐이다.
담호의 시선이 윤충을 향했다. 하지만 윤충은 미간을 찌푸릴 뿐 물러나지 않았다.
“언제부터였지?”
“무슨 소리냐?”
“마교가 언제부터 녹림에 숨어든 거지?”
“그걸 어떻게?”
순간 윤충의 동공이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마구 흔들렸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담호의 말이 그의 가슴을 비수처럼 후벼 파고 있는 것이다.
“암귀(暗鬼)들을 소집하면서 말했잖아. 마교의 정예들이라고.”
“설마 저, 전음을 엿들은 것이냐?”
담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윤충은 자신의 추측이 사실이라 확신했다. 어떻게 가능한지 모르지만 담호는 타인의 전음을 엿들을 수 있는 것이다.
“네놈은 정말 위험하구나.”
순간 윤충의 눈빛이 변했다.
이전처럼 유순하거나 당황한 눈빛이 아니었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차가운 눈빛과 살벌한 기세를 흩뿌리고 있었다.
그런 윤충의 모습을 보고 제일 당황한 사람은 바로 황경문이었다.
“추, 충아! 정말 네가 마교도더냐?”
“큿! 형님. 그냥 그대로 죽는 것이 나았을 텐데. 맞소! 나는 신교의 암귀대주요.”
“이럴 수가!”
황경문의 수염이 푸들푸들 떨렸다.
오늘의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윤충은 그가 가장 신뢰하던 동생이었다. 녹림을 운용함에 있어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윤충과 상의했고, 자신의 권한 중 상당 부분을 그에게 넘겨주기까지 했다.
윤충이 황경문과 인연을 맺은 것이 삼십 년도 전의 일이다. 그렇다는 것은 마교가 전쟁에서 패했을 때부터 녹림에 숨어들었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대체 녹림에서 무슨 짓을 한 거냐? 윤충.”
“형님을 방패 삼아 힘을 키웠지요. 다들 알다시피 그 당시 본교는 전쟁에 패해 쇠락해 있을 때였으니까.”
전쟁에서 승리한 중원의 무인들은 마교의 무인들을 닥치는 대로 척살했다. 아직 어렸던 윤충은 강호인들의 척살을 피해 몇몇 동료들과 함께 녹림으로 숨어들었다.
그들은 녹림을 방패막이 삼아 힘을 길렀고, 세력을 확장했다.
황경문이라는 걸출한 무인은 훌륭한 눈가리개가 되어 주었다. 사람들이 황경문이라는 절대 무인에게 정신이 팔린 사이 윤충은 녹림 내에서 세력을 은밀히 확장해 갔다.
그렇게 삼십 년을 보냈고, 그 결과 윤충은 녹림의 상당 부분을 장악할 수 있었다.
“조윤산을 부추긴 것도 너였군.”
“싹수가 보이는 녀석이었습니다. 형님에게 원한도 가지고 있었고. 그를 부추기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윤충은 옅은 미소마저 짓고 있었다. 그런 윤충의 모습은 황경문에게 자괴감을 갖게 하기 충분했다.
“허! 나는 허수아비나 다름없었구나.”
“형님 잘못이 아닙니다. 내가 그만큼 대단한 거였지. 그러니 형님은 그리 자괴감을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윤충은 더 이상 공손하지도, 자신을 숨기지도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떳떳이 자신을 드러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윤충의 시선이 담호를 향했다.
“그리고 너, 감히 나의 삼십 년 대업을 무너트리다니.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그의 전신에서 찐득한 살기가 흘러나와 주변을 잠식해 갔다.
녹림이 알고 있는 윤충의 모습과는 차원이 다른 모습이었다.
황경문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 갔다.
윤충에게서 느껴지는 기도가 결코 자신의 아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세간에 알려진 윤충의 무위는 겨우 일류 수준을 웃도는 정도였다.
무공보다는 머리가 좋은 책사, 그것이 윤충의 대외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철저한 기만이었다.
“내 반드시 네놈의 사지를 모두 부서트리고, 뼈를 갈아 마실 것이다.”
콰지직!
그의 전신에서 발산된 가공할 기도에 주위의 기물이 부서져 나갔다. 그사이 윤충의 곁으로 낯선 인형들이 속속 합류했다.
검은 무복을 입은 백여 명의 무인들.
바로 윤충이 키워 낸 암귀들이었다.
황경문이 등룡대를 키우기 위해 투입한 막대한 자본. 그중 상당수를 빼돌려 암귀를 키우는 데 사용했다. 그 덕에 암귀들의 무공은 등룡대를 월등히 능가했다.
황경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암귀들 중 상당수가 그가 알고 있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패왕채에서도 나름 촉망받는 무인들이었다.
직책은 대단하지 않았지만 패왕채의 수뇌부와 일반 녹림도들 사이에 연결 고리를 수행하는 자들이었다.
황경문은 그제야 윤충이 어떻게 패왕채를 장악했는지 알게 되었다. 저들이 눈과 귀를 가리고 있었으니 황경문은 눈 뜬 봉사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모든 사실을 깨달은 황경문은 그만 팔과 다리에 힘이 풀려 제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버젓이 눈을 뜬 채 내 집을 남에게 강탈당하고도 아무것도 모른 채 웃고 살았구나. 얼마나 우습게 보였을꼬.’
허탈한 마음에 황경문은 눈을 감고 말았다.
얼마나 많은 녹림의 산채들이 마교에 의해 잠식당했을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일부일 수도 있고, 어쩌면 생각보다 방대할 수도 있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황경문이 그렇게 자괴감에 무력해져 있는 순간에도 윤충과 암귀들은 살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그들의 살기는 실로 가공해서 근처에 있던 녹림의 무인들이 겁을 집어먹고 물러났다.
윤충이 손가락으로 담호를 가리켰다.
“권마…… 그따위 허명이 너의 목숨을 구해 주지는 못할 것이다. 오늘 너는 죽는다. 바로 이 자리에서…….”
사사삭!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암귀들이 담호를 포위했다.
암귀들은 무려 삼십 년이나 음지에 숨어 마교의 무공을 익혔다. 그들은 항상 양지에 나가길 원했고, 마교의 깃발 아래에서 싸우기를 소망했다.
“지금 이곳에서 네놈을 죽이고, 우리는 본진과 합류할 것이다. 곧 세상은 신교 아래 하나가 될 것이다. 그 위대한 여정의 첫 제물이 됨을 감사히 여기거라. 네놈은……. 크헉!”
콰앙!
그 순간 폭음이 터져 나오며 암귀들 대여섯 명이 뒤로 날아갔다. 담호가 파성추를 펼친 것이다.
담호가 윤충을 향해 몸을 날렸다.
“넌 너무 말이 많아.”
암귀들이 담호를 가로막았다.
촤아앙!
그들의 손에 들린 검이 시린 빛을 뿌렸다.
권마와 암귀.
녹림의 운명을 건 싸움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