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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155화 (15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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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화 2장. 모든 만남엔 끝이 있기 마련이다(2)

무림맹이 창설된 이후 악양의 모든 기루들은 엄청난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천상루도 악양에 자리 잡은 이래 유례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비록 강호의 대의를 지키겠다는 명분으로 무림맹에 들었지만, 기본 적으로 그들은 혈기가 넘치는 사내들이었다.

일반인보다 기운도 월등한 데다가 정력마저 차고 넘치니 여인을 찾는 것이 당연했다. 악양에서 가장 쉽게 아름다운 여인을 품에 안을 수 있는 곳이 천상루였다.

덕분에 천상루의 기녀들과 총관, 하인들은 한동안 몰려드는 손님들로 인해 즐거운 비명을 질러야 했다.

“휴우!”

기예화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장사가 너무 잘돼도 문제였다. 기녀들의 수가 모자라 다른 곳에서 기녀를 더 데려와야 했다.

그 때문에 하오문의 다른 지부에 있는 기녀들을 데려온 것이 어제였다. 워낙 먼 곳에서 데려오는 것이기에 기녀들의 건강을 비롯해 신경 쓸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제야 조금은 안심할 수 있겠구나.”

기루의 특성상 일단 한 번 자리를 잡으면 손님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초반에 무림맹의 무인들을 휘어잡을 수 있으면 앞으로의 영업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기예화는 탁자 위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향긋한 차향이 그녀의 심신을 맑게 만들었다.

기예화는 잠시 차를 즐기며 창밖을 바라봤다. 언제부턴지 모르지만 악양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동정호의 수면에도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풍경이 아름답다 못해 신비롭기까지 했다. 하지만 기예화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다른 생각이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디에 있을까?”

세상이 권마라고 부르는 남자.

그녀의 부탁 때문에 그는 황혜령을 구해야 했다. 황혜령을 구한 담호는 그 즉시 세상에서 모습을 감췄다.

“지금쯤 패왕채에 있겠지.”

기예화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일 황혜령이 무림맹에 잡히거나 상처를 입었으면 악양은 그 즉시 전쟁터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과 같은 호황도 누릴 수 없었을 것이 분명했다.

무엇보다 폭풍의 핵인 담호를 악양에서 내보낸 것이 가장 큰 성과라면 성과였다. 만일 그가 이곳에 있었다면 이렇게 평화로운 나날들을 보낼 수 없었을 것이다.

“루주님.”

그때 총관이 밖에서 그녀를 불렀다.

졸지에 상념을 방해받은 기예화의 미간에 얕은 골이 패였다.

“무슨 일인가요?”

“그게…… 귀빈실의 손님이 루주님을 직접 뵈었으면 한답니다.”

“내가 손님을 직접 만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잖아요.”

“예! 그렇게 말했지만…….”

총관의 목소리가 왠지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기예화는 결국 문을 열었다. 그러자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총관의 모습이 보였다.

“총관이 거절할 수 없는 거물이 온 건가요?”

“그렇습니다.”

“누군가요? 누가 이 기예화를 보자고 하는 건가요?”

“그게 무림맹의 군사입니다.”

“무림맹의 군사?”

기예화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그녀는 무림맹의 군사가 남궁창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무림맹의 군사라는 직함 하나만으로도 버거운데, 상대는 남궁세가의 장로이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거물 중의 거물이었다.

“휴!”

기예화가 절로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부터 그녀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곳 악양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자들에겐 남궁창의 말이 곧 생사를 가르는 법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귀빈실이라고 했나요?”

“그렇습니다.”

“가죠.”

기예화가 총관과 함께 거처를 나서 귀빈실로 향했다.

귀빈실은 천상루 가장 높은 곳에 있었다. 귀빈실은 돈이 있다고 해서 아무나 들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이곳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강호와 관부에서도 요직에 있는 이들이었다.

그 때문에 귀빈실에 배치된 기녀들은 천상루에서도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매혹적인 이들이었다.

총관이 귀빈실의 문을 두들기며 말했다.

“루주님 오셨습니다.”

“안으로 들어오시게.”

중후한 목소리가 들리자 총관이 문을 열었다. 그러자 안의 풍경이 드러났다.

중년의 무인 두 명이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생소한 얼굴들이었지만 기예화는 어렵지 않게 그들의 정체를 알아봤다.

‘좌망천리안 남궁창과 백경검객 오군의.’

한 명은 남궁세가의 장로이자 무림맹의 장로, 다른 한 명은 명문 해남파의 장로였다.

한 사람만 와도 천상루 전체가 들썩일 판인데 거물이 두 명이나 왔다. 기예화는 내심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속마음과 달리 얼굴에는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천상루의 기예화가 무림맹에서 나오신 귀빈들께 인사드립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청아해서 듣는 이들의 귀를 즐겁게 만들었다. 하지만 남궁창과 오군의 모두 강호에서 구를 대로 구른 노강호. 그들은 기예화의 목소리에 현혹되지 않았다.

남궁창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반갑네, 기 소저.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나는 무림맹의 군사인 남궁창이라네. 저쪽은 내 친구인 백경검객 오군의일세.”

“두 분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흠모해 마지않는 두 분이 한꺼번에 본루를 찾아 주시니 소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겸손하실 필요 없네.”

“네?”

“하오문의 지부장이면 우리와 대면할 자격이 충분하다는 뜻일세. 더군다나 악양 지부의 지부장이라면 하오문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실세.”

순간 기예화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의 진정한 신분을 아는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더군다나 악양 지부의 지부장이 하오문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권력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자는 내부의 핵심 인물들뿐이었다.

‘대체 어디서 정보가 누설된 거지?’

하지만 한가하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일단 자리에 앉으시게. 이렇게 올려다보니 고개가 아프군.”

기예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저들이 모든 사실을 알고 왔다면 부인해도 소용이 없었다.

“한가하게 기녀들의 웃음소리나 듣고자 찾아오신 것은 아닌 것 같군요.”

“젊고 예쁜 여인의 웃음을 누가 싫어하겠는가? 단지 사정이 안 되어 즐길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지.”

“기루에서 기녀들과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면 굳이 찾아올 이유가 없지 않나요?”

“보다시피 우리는 다 나이가 들어서 젊은 여인들을 감당할 수가 없다네.”

남궁창이 너스레를 떨었다.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지만, 그의 눈매는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휴! 나비가 꽃을 마다하겠다니 안타깝네요.”

“꼭 꽃을 희롱해야만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아니지.”

“그럼 무슨 목적 때문에 오셨는지요?”

“하오문의 문주를 만나고 싶네.”

“무슨?”

“자네가 다리를 놔 주었으면 좋겠군.”

남궁창은 더 이상 말을 돌리지 않고 본론을 꺼냈다.

“문주님은 무엇 때문에 만나려고 하시는지요?”

“우리는 하오문이 강호 대의를 위한 싸움에 동참했으면 하네.”

“천한 것들이 살겠다고 모여 만든 곳이 하오문입니다. 저희가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자칫하다가 무림맹의 위명에 먹칠을 할까 두려울 뿐입니다.”

“강호를 위한 싸움에 귀천이 따로 있던가? 그런 걱정은 하지 마시게. 하오문이 도와준다면 마교와의 싸움에 큰 도움이 될 게야.”

“저희 천한 것들이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하오문의 정보라면 향후 무림맹의 행보에 큰 도움이 될 걸세.”

남궁창은 집요했다.

기예화의 시선이 백경검객 오군의를 향했다.

오군의는 이제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검을 잡고 있는 손을 단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다.

언제든 검을 뽑을 수 있는 자세였다.

그가 보내는 전언은 분명했다.

‘남궁창의 제안을 거절하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는 뜻.’

그녀가 어떤 결정을 내리는가에 따라 무림맹의 행사가 달라질 것이다.

그때 그녀의 복잡한 속내를 읽기라도 했는지 남궁창이 한마디 했다.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네. 그리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게.”

그의 목소리는 악마의 속삭임처럼 달콤하고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순간 하오문이 마교와의 전쟁 최전선에 내몰릴 것이 분명했다.

기예화는 난생 처음으로 자신의 결정을 후회했다.

‘차라리 권마를 잡아 두었다면…….’

그랬다면 분명 무림맹의 훌륭한 견제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무림맹도 두려워하지 않는 존재였으니까.

스릉!

오군의가 검을 뽑는 시늉을 했다.

그녀에겐 애초부터 선택의 여지가 존재하지 않았다.

법은 멀고 검은 가까이에 있었으니까.

“알았어요. 문주님께 연통을 넣어 보겠어요.”

“탁월한 결단이네. 자네의 결단이 무림을 마교의 손아귀에서 구할 게야.”

“하지만 결정은 문주님께서 내리는 것. 저는 어떤 보장도 할 수 없어요.”

“걱정하지 마시게. 하오문의 문주 정도 되면 시국을 읽는 눈이 있을 터. 설마 하오문을 몰락하게 만드는 그런 어리석은 결정은 내리지 않을 걸세.”

기예화가 눈을 감았다.

***

“끄으으!”

조윤산은 마지막으로 내뱉은 기괴한 신음성을 끝으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드디어 숨이 끊어진 것이다.

담호가 윤충과 암귀들을 상대로 싸우는 동안 조윤산은 극도의 가려움증과 사투를 벌였다.

가려움을 이겨 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양손으로 전신을 긁었다. 전신의 피부가 벗겨져 덜렁거렸지만 계속해서 긁어 댔고, 결국은 스스로 혀를 깨물어 목숨을 끊었다.

숨이 끊어진 조윤산의 모습에서 인간의 형상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담호는 조윤산의 시신을 한동안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모두가 숨을 죽였다.

담호의 손에 죽은 자의 수가 오늘 하루만 수백 명이 되었다. 그렇게 엄청난 살육을 저지르고도 담호는 전혀 지친 기색이 아니었다.

“초, 총채주님. 괜찮으십니까?”

뒤늦게 패왕채의 무인들이 달려와 황경문을 부축했다.

윤충에게 포섭되지 않은 순수한 녹림 출신들이었다. 그들은 윤충에 의해 갇혀 있다가 묵일광과 황혜령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나는 괜찮다.”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황경문의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다. 특히 산공독에 중독되고 반탄강기를 펼쳤던 것이 그의 내상을 도지게 만들었다.

한시라도 빨리 내상을 치료해야 했다. 더불어 폐혈산을 몸에서 몰아내야 했다.

“아빠!”

“총채주님!”

뒤늦게 황혜령이 묵일광과 함께 달려왔다.

그녀가 무사한 것을 확인한 황경문의 얼굴에 안도의 표정이 떠올랐다.

자신의 죽음보다 두려웠던 것이 바로 황혜령의 일신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었다.

“나는 괜찮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거라.”

“아빠.”

황혜령이 황경문을 껴안았다.

부녀는 서로의 무사함에 감사를 하며 온기를 느꼈다.

비록 친혈육은 아니었지만, 그 이상의 끈끈함이 그들에겐 존재했다.

“제 등에 업히십시오.”

묵일광이 황경문에게 등을 내밀었다. 하지만 황경문은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괜찮다. 내 두 발로 걷겠다.”

상처를 입었어도 그는 호랑이였다. 호랑이는 결코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았다.

황경문이 후들거리는 다리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한 방향에는 담호가 서 있었다.

그제야 황혜령과 묵일광이 담호를 발견했다.

“오……라버니?”

황혜령의 목소리가 절로 떨려 나왔다.

담호는 혈인이 되다시피 해서 원래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혈인이 되어서도 무너지지 않는 그의 모습은 황혜령의 가슴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아련한 기억이 환상처럼 떠올랐다.

불타는 마을, 혈인이 된 사람들, 그리고 두 명의 남자.

피투성이가 되어서도 가족을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였던 그들의 얼굴이 어딘지 모르게 익숙했다.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빠, 오빠.”

그러고는 그대로 쓰러졌다.

“아가씨!”

묵일광이 그녀의 여린 몸을 급히 안아 들었다.

담호의 눈에 그 광경이 들어왔다. 마지막 순간에 중얼거린 목소리도.

담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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