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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156화 (156/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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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화 2장. 모든 만남엔 끝이 있기 마련이다(3)

패왕채의 부채주 윤충과 흑수채의 채주 조윤산의 배신은 녹림에 큰 후폭풍을 가져왔다.

녹림에서 배신은 그리 낯선 단어가 아니었다. 힘이 있으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사회였으니까.

실제로 녹림십팔채의 채주들 중에는 전대 채주를 힘으로 끌어내리고 그 자리를 쟁취한 자들도 다수 있었다.

힘이 있는 자가 모든 것을 가지는 것이 녹림의 속성이었고, 녹림도들 역시 그런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배신에 외세가 연관되어 있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더군다나 외세가 마교라면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마교는 중원 무림뿐 아니라 녹림에서도 경원시하는 대상이었다. 마교가 중원을 휩쓸 당시 죽은 녹림의 무인들이 수천 명이 넘었다.

아직도 녹림에는 당시 죽었던 사람들의 유가족이 다수 살아 있었고, 그날의 기억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자들 역시 많았다.

윤충이 사실은 마교도이고, 녹림에서 마교의 무인들을 키웠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전 녹림도가 들고일어났다.

제일 먼저 연판장에 수결한 채주들이 변을 당했다. 그들은 윤충이 마교도인 줄 모르고 수결했다고 항변했지만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없었다.

녹수채를 비롯해 십여 채의 산채에서 모두 채주가 바뀌었다.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없었던 일대 변혁이 일어난 것이다.

세상이 바뀌고 있었다.

누구보다 그 변화를 가장 실감하고 있는 이는 바로 묵일광이었다. 그는 내상이 회복되지 않은 황경문을 대신해 패왕채를 재건하는 일에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윤충과 암귀, 그리고 등룡대의 배신으로 인해 패왕채의 전력 반이 날아갔다. 평소 견고하던 지휘 체계는 무너지고 사람들은 동요하고 있었다.

황경문이라도 멀쩡했다면 수습하는 것이 훨씬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황경문은 아직도 운신이 힘든 상태였다.

결국 묵일광이 전면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는 패왕채를 재건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비록 황혜령 때문에 등룡대의 대주직을 거절하긴 했지만, 패왕채에서 그의 신망은 무척이나 두터운 편이었다.

묵일광은 빠른 속도로 패왕채를 정비했고, 그 결과 녹림의 혼란도 조금씩 수습되었다.

담호는 황산의 정상에 서서 패왕채를 내려다보았다.

며칠 전의 패왕채가 무척이나 뒤숭숭한 느낌이었다면 지금의 패왕채는 확실히 안정을 찾은 느낌이었다.

당분간은 세력이 위축되긴 하겠지만, 이대로 몇 년 만 더 지난다면 분명 예전의 성세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였다.

“오라버니.”

낯익은 음성이 귓전에 울려 퍼졌다.

뒤돌아보니 황혜령이 서 있었다. 황혜령의 안색은 아직도 파리했다.

그날 쓰러진 후 황혜령은 방 안에서 두문불출했다. 때문에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몸은 괜찮으냐?”

“괜찮아요.”

“다행이구나.”

담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황혜령은 그런 담호를 빤히 바라봤다.

“오라버니.”

“…….”

“저 알고 있었죠?”

“무슨 말이냐?”

“처음 봤을 때부터 이상했어요. 신강혈성, 권마라는 별호를 가진 살육자로 모든 이를 두려움에 빠트린 오라버니였지만, 이상하게도 하나도 무섭지 않았으니까요.”

황혜령의 음성은 무척이나 차분했다. 그녀는 흥분하지도 않았고, 감정적이지도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 더 냉철해 보였다.

담호는 말없이 황혜령을 바라봤다.

“오라버니의 눈빛도 그랬어요. 분명 처음 보는데 오래전에 본 것처럼 익숙한 눈빛. 다른 사람들은 오라버니의 눈도 감히 마주치지 못할 만큼 무섭다고 하는데 난 그렇지 않았어요.”

“…….”

“왜죠? 난 항상 그게 궁금했었어요.”

황혜령의 눈빛은 진실을 묻고 있었다. 하지만 담호는 아직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오라버니를 만나고 난 후 계속 꿈을 꿨어요. 꿈속에서 나는 걸음마도 떼지 못한 어린아이였어요.”

꿈은 늘 흐릿했다.

낯선 남자와 소년이 나왔고, 푸근한 인상의 중년 여인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그들의 얼굴이 선명했던 적은 없었고, 같이 나온 적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연관되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엄마가 죽었대요. 아빠는 그 충격으로 내가 어린 시절을 기억 못 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그렇게 믿었는데…… 그랬는데…….”

황혜령이 말끝을 흐렸다.

그때까지도 담호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날…… 패왕채에 반란이 일어났던 그날. 난 또 그 풍경을 봤어요. 활을 들고 있던 남자…… 그리고 그 곁에 있던 조그만 소년. 그 소년의 얼굴은…….”

황혜령이 담호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담호는 그녀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황혜령이 담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이마부터 시작해 코를 어루만지고, 굳게 다문 입술에서 멈춰 섰다.

“오라버니의 얼굴이었어요. 지금보다 스무 살은 더 어리게 보였지만, 오라버니가 분명했어요. 어떻게 된 거죠? 왜 오라버니가 어린 모습으로 내 꿈속에 있는 거죠? 그것이 꿈은 맞나요?”

담호는 눈을 감았다.

“오라버니 대답해 주세요. 그게 정말 꿈인가요?”

“네 이름은…….”

이번엔 황혜령이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담호의 입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는 담호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네 이름은 담가령이다. 고향은 태백산 자락의 조그만 마을이지.”

순간 황혜령은 예전에 담호가 스쳐 지나가듯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저 그런 마을이었지. 특별할 것도 없고, 다를 것도 없는 그냥 평범한 시골 마을. 남자들은 논농사를 짓고, 여자들은 밭농사를 지으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그런 곳이란다.

황혜령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때는 무심히 들어 넘겼던 말이 지금은 가슴에 사무쳤다.

“그럼 내 꿈이 사실이란 말인가요? 오라버니가 정말 내 오라버니인가요?”

“그렇다.”

“그럴 수가!”

순간 황혜령의 다리가 휘청였다.

담호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맞잡은 손을 통해 전해지는 따스한 온기.

그 온기가 낯설지가 않았다.

“아!”

“미안하다. 더 빨리 말해 주지 못해서.”

“어떻게…… 어떻게? 흐흑!”

황혜령이 눈물을 흘렸다.

마음속으로는 어쩌면 그럴지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짐작하는 것과 타인의 입을 통해 직접 듣는 것은 느껴지는 충격 자체가 달랐다.

“어떻게 된 건가요? 내가 어떻게 황혜령이 된 건가요?”

“너는…….”

담호는 차분히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말해 줬다.

그의 이야기는 무척이나 오랫동안 계속되었지만, 황혜령은 인내심을 갖고 들었다.

마을에 흑호단이 습격했던 일부터 화산에 들어갔던 일, 그리고 황혜령이 황경문의 딸이 되어야 했던 일까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이야기했다.

황혜령의 뺨 위로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마침내 길고 긴 담호의 이야기가 모두 끝이 났을 때 그녀는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녀의 조그만 어깨가 들썩였다. 담호는 말없이 그녀를 품에 안고 한동안 등을 다독여 주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황혜령이 눈물을 닦으며 담호의 품에서 떨어졌다.

“오라버니.”

“그래!”

“고마워요. 잊지 않고 이렇게 찾아 줘서.”

“미안하다. 이제 찾아와서.”

“아니에요. 난 그나마 황혜령으로 편하게 지냈지, 오라버니는 그 고생을 다했는데. 이렇게 찾아와 준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고맙구나. 이해해 줘서.”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건가요? 그냥 이대로 나와 함께 있으면 안 되나요?”

“미안하구나. 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

패왕채에서 계속 머무르면 몸은 편할지 모른다. 황혜령과의 혈연관계를 떠나 패왕채에도 큰 은인이었으니까.

하지만 패왕채는 담호와 어울리지 않는다.

담호는 녹림인도 아니었고, 타인의 재물을 약탈하면서 살아가는 삶에 관심도 없었다.

그의 삶은 투쟁으로 점철됐다.

그에겐 거친 강호가 어울렸다.

황혜령이 담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적뿐만 아니라 같은 편에게도 두려움을 주는 담호의 얼굴이 어쩐지 안쓰러워 보였다.

“오라버니.”

“넌 이대로 황혜령으로 살아가거라. 담가령이라는 이름은 잊어도 좋다.”

“그럴 수는 없어요. 난 황혜령으로…… 그리고 담가령으로 살아갈 거예요. 녹림 총채주 황경문의 딸로, 권마의 동생으로.”

황혜령의 목소리엔 확고한 신념과 고집이 담겨 있었다.

담호가 일단 결정하면 절대 되돌리는 법이 없는 것처럼 황혜령 역시 일단 고집을 부리면 절대 번복하지 않았다.

담호가 손을 뻗어 황혜령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그래! 그렇게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렴.”

“오라버니.”

“대신 한 가지만 부탁하자.”

“뭔가요?”

“당분간 진보를 부탁하마.”

“네?”

“끝까지 동행하고 싶지만, 이 이상 진보를 데려가는 것은 위험할 것 같구나.”

무림맹의 공적이 된 것은 둘째치고 마교와도 은원을 맺었다. 현 강호에서 가장 강하다는 두 단체와 적이 된 것이다.

이제 거친 칼바람이 몰아칠 것이다. 살을 에는 혹독한 바람 속에서 방진보를 완벽하게 보호해 주는 것은 불가능했다.

“알았어요. 진보는 제가 책임지고 보호할게요.”

“고맙다.”

“오라버니의 동생이잖아요. 그럼 제게도 친동생이나 마찬가지예요.”

“그래!”

담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황혜령이라면 방진보를 잘 보살펴 줄 것이다.

“언제 내려가실 건가요?”

“지금!”

“네? 벌써요?”

“오래 있을수록 헤어지기 힘들 것이다. 어차피 헤어질 거라면 빠른 게 좋겠지.”

“어디로…… 가실 건가요?”

“화산.”

담호가 북쪽 하늘을 바라봤다.

난세가 열리고 있었다.

전란의 시대에서 무인이란, 하루 앞날을 장담할 수 없는 하루살이와도 같은 신세.

그것은 담호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지금까지는 잘 헤쳐 왔을지 모르지만, 더 강한 무인을 만나면 순식간에 목숨을 잃는 것이 강호라는 세계였다.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사부를 보고 싶었다.

현소 진인을 본다면 정말 아무런 미련도 남지 않을 것 같았다.

세상이 어떻게 되든,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되든 말이다.

“오라버니.”

“잘 있거라.”

담호는 황혜령에게 작별을 고했다.

황혜령은 뒤돌아서 산을 내려가는 담호의 모습을 힘없이 바라봤다. 몇 번이나 손을 뻗어 잡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담호를 붙잡지 못했다.

이십 년이란 세월은 결코 짧은 것이 아니었다.

이제 와서 같이하기엔 서로 너무 먼 길을 걸어왔다.

담호를 붙잡을 수는 없었다. 그저 그가 무사히 살아가길 기원하는 것밖에는.

담호는 그렇게 황혜령의 시야에서 멀어졌다.

저 멀리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흑귀가 달려왔다. 흑귀는 황산의 거친 경사를 마치 평지처럼 달리고 있었다.

담호가 흑귀에 올라탔다.

“가자.”

흑귀가 기다렸다는 듯이 질주했다.

커다란 바위 사이를 뛰어넘는 모습이 고산에서만 자라는 산양을 연상케 했다.

“오라버니.”

황혜령의 어깨가 간헐적으로 떨렸다.

그녀는 애써 눈물을 참았다.

당장의 이별은 슬프지만,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애써 위안하며 말이다.

그때였다.

“형!”

뒤쪽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돌아보니 방진보가 헐레벌떡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마구간에서 흑귀와 자신의 백마를 돌보고 있는데, 갑자기 흑귀가 뛰쳐나갔다.

흑귀의 흔적을 따라 산 정상에 도착한 방진보의 눈에 멀어지는 담호와 흑귀의 모습이 보였다.

“혀, 형?”

방진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설마?”

뇌리를 엄습하는 불길한 느낌에 방진보가 담호를 쫓아가려 했다.

“진보야.”

황혜령이 방진보의 어깨를 붙잡았다.

“누나?”

“오라버니는 네가 더 이상 위험에 빠지는 것을 원치 않아.”

“하지만…….”

“오라버니를 보내 줘야 할 때야, 진보야. 오라버니는 네가 홀로서길 원해.”

“형이…….”

“그래! 힘들겠지만 웃으며 보내 주자.”

방진보가 석상이 된 것처럼 제자리에 서서 담호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게 정말 형이 원하는 건가요?”

“그래!”

“형이 원하는 거라면…….”

방진보가 통통한 주먹을 꽉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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