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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화 3장. 난세의 비가 내리면, 잠룡(潛龍)이 움직인다(1)
거리를 걷고 있는 여인이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있어도 단번에 눈에 띄는 굴곡진 몸매, 그리고 신비로운 분위기까지 더해져 많은 이들의 시선을 받았다.
여염집 규수라면 뜨거운 시선에 얼굴을 붉힐 만도 하건만 그녀는 이런 풍경이 무척이나 익숙한 듯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길을 걸었다.
여인의 이름은 음유경이었다.
담호와의 싸움 이후 그녀는 호남성을 떠나 북상했다. 현재 그녀가 있는 곳은 하남성 등봉(登封)현이었다.
등봉현에는 숭산(嵩山)이 있다. 그리고 숭산에는 구대문파의 태두이자 불가의 정신적인 지주인 소림사(少林寺)가 존재한다.
흔히들 말한다.
천하공부(天下工夫) 출소림(出少林).
천하의 모든 무공은 소림에서 시작되었다고.
달마대사가 역근경(易筋經)과 세수경(洗隨經)을 전한 이후 수많은 무학들이 만들어졌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칠십이종 절학이었다.
다른 문파라면 비전이 될 만한 최상승의 무공이 소림에는 일흔두 가지나 존재하는 것이다.
칠십이종 절학뿐만이 아니었다. 소림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극상승의 절기를 다수 보유하고 있었다.
때문에 강호인들은 은연중 소림사를 천하무학의 태두로 인정하고 있었다. 만일 소림사가 강호 정복의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면, 강호는 벌써 그들의 세상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무당파가 소림사에 필적할 만한 세력을 갖췄다는 것이 세상의 평가였지만, 순수한 무력만을 놓고 봤을 때는 손색이 많았다.
괜히 천하의 모든 무학이 소림에서 나왔다는 것이 아니었다. 그만큼 소림사의 무학은 방대하면서도 깊었다.
때문에 소림사의 영향력은 등봉현뿐만 아니라 중원 전역에 골고루 퍼져 있었다.
많은 이들이 소림의 무학을 일초반식이라도 배우기 위해 찾아왔다. 그중에는 강호에 이름이 꽤 알려진 무인들도 다수 있었다.
그 때문에 등봉현의 사람들은 무공을 익힌 무인들에게 꽤나 호의적인 편이었다. 거리에 검과 도를 차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들을 두려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덕분에 음유경 역시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거리를 활보할 수 있었다.
거리엔 무(武)를 숭앙하는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당장 등봉현에만 하더라도 소림사에서 무공을 조금이라도 배운 자가 부지기수였다.
비록 자질이 따라 주지 않아 본산제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다들 소림의 기본 무공 한두 가지 정도는 익히고 있었다.
음유경은 그런 등봉현의 분위기가 부러웠다.
‘언젠가 신교에도 이런 날이 찾아왔으면.’
아마 마교에 몸을 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녀와 같은 바람일 것이다.
음유경은 이내 상념을 지우고 숭산을 올랐다.
중원오악(中原五岳) 중 중악(中岳)이라 불리는 숭산이다.
화산처럼 날카로운 기세는 없지만, 대신 웅혼하면서도 사람들을 편하게 만들어 주는 신령스러운 기운이 산 곳곳에 어려 있었다.
한참을 산을 오르자 소림사의 산문이 보였다. 소림사의 위세를 보여 주듯 커다란 산문 앞에는 승려 두 사람이 지키고 있었다. 소림사의 지객승들이었다.
소림사는 구대문파에 속하는 무문(武門)이기도 했지만, 기본 적으로는 불교의 사찰이었다. 불공을 드리거나 향불을 피기 위해 산을 오르는 방문객들이 하루에도 수백 명이 넘었다.
지객승들의 임무는 그런 일반 방문객과 특별한 용무를 가진 무인들을 구분해서 안내하는 것이었다.
“아미타불! 시주, 잠시 멈추시지요.”
지객승들이 음유경을 가로막았다. 음유경은 순순히 걸음을 멈췄다.
“본사에는 어쩐 일로 방문하신 건지요?”
“등봉현에 잠시 들렀다가 소림사에 하루 머물면서 불공이라도 드리고자 찾아왔습니다.”
“그러시군요. 혹시 무공을 익히셨습니까?”
“호신을 위해 조금 익혔습니다. 혹시 무슨 문제가 되나요?”
“전혀 문제될 것 없습니다. 단지 본사에서 하룻밤을 머물고자 한다면 무기는 이곳에 맡겨 둬야 합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아요.”
음유경이 흔쾌히 대답했다. 그에 지객승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이곳 방명록에 이름과 문파를 적어 주시죠. 그러면 빈객청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스님.”
음유경은 지객승에게 검을 넘겨준 후 방명록에 이름을 적었다.
[음유경, 신강 합밀(哈密) 음가보(陰家堡) 출생. 가전 무공을 익혔음.]
“새외에 있어서 그런가, 소승이 음가보는 처음 들어 보는군요.”
“그럴 거예요. 합밀에 있는 조그만 가문이니까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소승을 따라오십시오.”
“예!”
음유경은 지객승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현재 일반 신도들에게 개방된 곳은 지객당과 대웅전 등 몇 곳 되지 않습니다. 그 점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어째서인가요? 다른 절들은 보통 다 개방하는 것 같은데.”
“그것은 소림사가 일반 사찰이 아니라 무공을 가르치고 배우는 무문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역사가 오래되다 보니 보존할 것이 무척이나 많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모든 곳을 개방하지 못하는 것을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지객승은 음유경의 질문에 싫은 표정 하나 짓지 않고 자세히 설명해 줬다.
지객승의 법명은 해우였다.
해우는 지객당에서도 꽤나 높은 위치에 있는 승려였고, 이렇게 산문에서 사람들에게 소림사의 역사에 대해 설명해 주는 것을 좋아했다. 그만큼 소림사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것이다.
해우의 설명을 듣는 사이 음유경은 빈객청에 도착했다.
빈객청은 소림사의 산문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 사방이 높다란 담으로 둘러싸여 있어 완벽히 격리되어 있는 형태였다. 하지만 빈객청과 빈객청을 둘러싼 연무장이 워낙 크다 보니 답답함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해우는 빈객청의 방 중 하나를 음유경에게 내주었다.
“이곳에서 머무시면 됩니다. 저녁 공양이 한 시진 남았으니 저 뒤쪽의 식당으로 가시면 될 겁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해우가 예를 표하고 물러났다.
혼자 남은 음유경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대단하구나.”
소림사는 그녀의 신분을 철저히 캐묻지 않았다. 다른 문파들이 꼬치꼬치 캐묻고 철저히 검증하려는 것과는 상반된 태도였다.
음유경의 눈에는 그 모든 것이 강자의 여유로 보였다.
천 년을 축적해 온 힘과 경험.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있기에 보일 수 있는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무방비 상태도 아니다.
빈객청은 소림사의 본산과 철저히 분리되어 있었다. 소림사의 중요한 건물들은 이곳에서는 접근할 방도가 없는 것이다.
음유경의 눈에는 소림사가 용담호혈(龍潭虎穴)로 보였다.
“휴우!”
음유경이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선택의 여지가 있으면 좋으련만, 언제나 그렇듯 상황은 그녀에게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음유경은 빈객청의 거처에 머물면서 시간을 보냈다. 공양 시간도 철저히 지켜서 최대한 타인의 눈에 띄지 않으려 노력했다.
음유경이 움직인 것은 저녁 불공이 끝난 후였다. 다른 사람들과 불공을 올린 후 돌아오는 길에 슬쩍 샛길로 빠졌다.
음유경은 품에서 복면을 꺼내 뒤집어썼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 준비해 놓은 것이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음유경은 은밀히 이동했다.
이전에 소림사에 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그 구조만큼은 그녀의 머릿속에 들어 있었다. 마교에서 어느 정도 위치에 오른 자들은 필수적으로 구대문파와 오대세가에 대해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음유경은 소리도 없이 움직였다.
구대문파의 태두인 소림사였지만, 이상하리만큼 경비는 빈틈이 많았다. 덕분에 음유경은 별 어려움 없이 목적했던 장소에 도착할수 있었다.
장경각(藏經閣).
소림사의 모든 무서와 경전이 보관되고 있는 중지였다. 소림의 역사와 역량이 모두 이곳에 보존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때문에 장경각은 여타 전각들과 달리 삼엄한 경계망이 펼쳐져 있었다.
십여 명의 무승들이 장경각 외부를 지키고 있었다. 하나같이 눈빛이 형형한 것이 무공 수위가 범상치 않아 보였다.
“후!”
음유경은 잠시 숨을 들이쉬었다.
일반적인 무인들이라면 무승들의 기세에 질려 감히 장경각에 침투할 엄두도 내지 못했겠지만 그녀는 달랐다.
이런 때를 대비해 무공뿐만 아니라 은신술과 잠입술까지도 완숙한 경지로 익혔다.
공령운무행(空靈雲霧行).
마교 비전의 은신술이었다. 대기 속에 본신과 기척을 감춰 절대의 경지에 달한 자가 아니라면 절대로 알아차릴 수 없었다.
음유경은 공령운무행을 펼쳐 장경각으로 접근했다. 바로 지척에서 소림의 무승들이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지만, 그녀의 접근을 눈치채지 못했다.
음유경은 장경각 안으로 무사히 들어올 수 있었다.
장경각 안은 그야말로 엄청났다. 수많은 서가에는 서책들이 한 치의 빈틈도 없이 꽂혀 있었다. 그중 상당수가 무서였다.
칠십이종 절예도 있었고, 어쩌다 보니 소림사까지 흘러 들어온 타 문파의 절예도 있었다. 이중 한 가지만 유출돼도 강호는 난리가 날 것이다.
하지만 음유경은 그런 무서들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시선이 빠르게 서가에 꽂힌 책들을 훑었다.
‘천일비사록(千日秘事錄).’
그녀가 찾는 서책의 이름이었다.
천관서생(天觀書生)이라는 자가 삼십 년 전 정마대전에 관해 객관적으로 기술한 서책이었다.
천관서생은 정마대전 말기 천 일 동안 수많은 전장을 돌아다니며 자신이 본 광경들을 그 어떤 과장도 없이 담담히 적었다. 그것이 바로 천일비사록이었다.
‘본교의 성물이 사라졌던 전장에는 천관서생도 있었다. 천일비사록에는 분명 당시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을 거야.’
그녀가 천일비사록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성물의 행방을 찾기 위해서는 반드시 천일비사록이 필요했다.
음유경은 순식간에 십여 개의 서가를 지나쳤다. 그런 그녀의 얼굴엔 초조한 빛이 떠올랐다.
‘만일 천일비사록에서도 성물을 찾을 단서를 발견하지 못하면 더 이상 교주의 독주를 막을 수 없을 터.’
그녀는 마교 내에서 정마대전이 일어나길 원하지 않는 극소수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음유경의 눈이 반짝였다.
‘찾았다.’
마지막 서가 한 귀퉁이에 천일비사록이라는 글자가 선명한 서책이 꽂혀 있었다.
음유경이 서둘러 천일비사록을 꺼내 훑어보았다.
“진품이다.”
“아미타불! 뭘 그렇게 찾고 있나 했더니 천일비사록이었구려.”
순간 등 뒤에서 담담한 음성이 들려왔다.
음유경은 등줄기에 소름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언제?’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음유경이었다. 장경각 내에 인기척이 없다는 것을 몇 번이나 확인했다. 그런데 상대의 목소리는 마치 처음부터 그녀를 지켜봐 온 듯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음유경이 조심스럽게 뒤돌아섰다. 그러자 평범한 회색 승복을 입은 젊은 승려가 보였다.
이제 갓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동안의 승려였다.
티끌 한 점 보이지 않는 순진무구한 검은 눈동자, 해맑은 미소가 인상적이었다.
“당신은 누군가요?”
“아미타불! 소승은 소천이라고 합니다.”
“소천? 구무룡?”
음유경의 눈에 당황한 빛이 떠올랐다.
강호를 살아가는 자치고 소천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칠십이종 절예 중 열다섯 가지를 극성으로 익힌 희대의 천재가 바로 소천이었다. 오죽하면 소림 역사상 최고의 기재라는 이야기가 돌고 있을까?
소천은 무공을 익히는 것을 밥 먹는 것보다 좋아해 대부분의 시간을 연무장 아니면 장경각 안에서 보낸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아미타불! 여시주는 누구십니까? 왜 천일비사록을 원하는 겁니까? 그 책은 그다지 특별한 것이 아닌데요.”
“누군가에게는 쓸모없는 돌멩이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금덩이보다 소중할 수도 있는 법이니까요.”
“여시주는 평범한 분이 아니군요. 하긴 평범한 분이 소림사의 장경각에 숨어들 수는 없겠군요. 어디서 오신 분인가요?”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던가요?”
음유경은 대답 대신 질문을 했다. 그에 소천이 해맑게 웃었다.
“아미타불! 소승은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습니다.”
“그럼 내가 이 서책을 찾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단 뜻인가요? 어째서?”
“흥미로웠으니까요.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무서를 원하지 그런 잡서를 원하지 않거든요.”
음유경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음에도 그녀가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면 상대의 무공 수위는 그녀 이상일지도 몰랐다.
슈욱!
불리함을 깨닫는 순간 음유경이 장경각 밖으로 몸을 날렸다.
그에 소천이 고개를 저었다.
“역시!”
그는 하나도 걱정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소림사였으니까.
“침입자다.”
밖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무승들이 갑작스럽게 뛰어나온 음유경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소리쳤다.
고요하기만 하던 산사가 깨어났다.
무승들이 움직이고, 웅혼한 종소리가 숭산 전체에 크게 울려 퍼졌다.
“아미타불!”
소천의 모습이 장경각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