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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화 3장. 난세의 비가 내리면, 잠룡(潛龍)이 움직인다(3)
음유경이 감았던 눈을 떴다. 그러자 광야처럼 넓은 등판이 보였다. 그리고 낯익은 체취가 느껴졌다. 누군가 그녀를 업은 채 경공을 펼치고 있었다.
주위의 풍경이 빠른 속도로 뒤로 밀려 나갔다. 엄청난 압력과 바람이 느껴져야 정상이었지만, 묘하게 편안했다.
음유경의 입가에 한 줄기 미소가 걸렸다.
“율……천.”
“늦었다. 미안하다.”
무척이나 굵으면서도 깊은 울림이 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한번 들으면 신뢰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음성이었다.
음유경이 사내의 등에 안긴 채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보다 어떻게 온 거야?”
“내 여자가 위험에 빠져 있으니까 당연히 와야지.”
“율천.”
“어느 정도 시간을 번 것 같으니 잠시 쉬자.”
남자가 서서히 속도를 늦추더니 어느 순간 완전히 멈춰 섰다.
강가의 바위에 음유경을 내려놓는 남자. 이제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 초반으로 보였다.
칠 척의 거구에 어울리지 않게 순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강렬하게 빛나는 두 눈과 굳게 다문 입술이 그가 무척이나 강한 정신력의 소유자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었다.
남자의 허리에는 광목천으로 둘둘 만 커다란 도가 걸려 있었다.
음유경의 시선이 남자의 손을 향했다. 방금 전까지 그녀의 엉덩이를 받치고 있던 손은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
“율천. 그 손은…….”
“반동이 워낙 지랄 같아야지. 완벽히 제어하려면 아직은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해.”
남자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웃었다. 하지만 음유경은 그럴 수 없었다.
남자의 이름은 검율천.
그녀의 연인이자, 정신적인 지주였다.
그가 없었으면 여기까지 올 수도 없었고, 언제까지나 교주의 꼭두각시로 살았을 것이다.
그가 있었기에 지금의 음유경이 있을 수가 있었다.
검율천이 음유경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또 그 눈빛. 누가 보면 큰 상처를 입은 줄 알겠다.”
“괜찮아?”
“안 괜찮아도 괜찮아.”
“그런 말이 어디 있어?”
“여기 있어.”
검율천의 능청스러운 대꾸에 음유경은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생각해 보면 검율천은 늘 그랬다.
어떤 상황에서도 웃었고,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았다. 자신의 한 몸 건사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었을 텐데 늘 다른 누군가에게 희망이 됐다.
그래서 그들은 검율천을 그렇게 불렀다.
불굴(不屈).
절대 굴하지 않는 남자라고.
그래서 수많은 이들이 그를 믿고 스스로 사지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누구도 후회하지 않았다.
검율천을 바라보는 음유경의 눈에는 연모와 존경의 빛이 가득했다. 음유경과 같은 여인에게 그런 눈빛을 받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천일비사록을 찾으러 갔다며?”
“맞아!”
“찾았어?”
“응! 이 안에 분명 성물을 찾을 단서가 있을 거야.”
“잘했어.”
검율천이 미소를 지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에게 신뢰를 주는 그런 미소였다.
수많은 역경과 사선을 뛰어넘어 자신의 자리를 확고히 잡은 남자만이 보일 수 있는 미소였다.
그때였다.
검율천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아무래도 꼬리가 붙은 모양이군.”
“꼬리?”
음유경이 급히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저 멀리서 누군가 경공을 펼쳐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음유경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아는 사람이야?”
“소천……. 소림이 키운 구무룡이야.”
“그렇군.”
검율천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사이 소천이 지척까지 다가왔다. 그야말로 가공할 만한 경공술이었다.
소천이 소림만의 독특한 인사법인 반장을 했다.
“아미타불! 소승은 소림의 소천이외다.”
“알고 있어.”
“시주의 이름은 어찌 되십니까?”
“검율천.”
검율천은 숨기지 않고 자신의 진명을 말했다. 그에 소천의 얼굴에 이채가 떠올랐다.
검율천이 물었다.
“무슨 일이지?”
“그녀는 소림에서 서책을 가져갔습니다.”
“그래서 서책을 찾으러 왔나?”
그에 소천이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천일비사록은 저도 읽어 본 책. 특별히 중요한 내용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시주 때문입니다.”
“나?”
검율천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렇습니다. 시주의 강함이 제 피를 끓게 만들었습니다.”
“하!”
“시주와 겨뤄 보고 싶습니다.”
“제법 패기가 만만한 땡중이군. 그러다가 큰 코 다칠 텐데?”
“중이기에 앞서 저 역시 한 사람의 무인입니다.”
소천이 공력을 끌어 올렸다. 그러자 그의 회색 승복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일대에 번져 가는 소천의 가공할 만한 존재감. 마치 일대가 소천의 그림자 안에 갇힌 것 같았다.
검율천이 미소를 지었다.
“무상대능력(無上大能力)인가?”
“시주의 안목이 범상치 않으시군요. 맞습니다. 무상대능력입니다.”
무상대능력은 소림사의 전설 중 하나였다.
대성을 하면 무한한 공력을 얻을 수 있고, 일인의 힘만으로도 천하를 평정할 수 있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까지 그 어떤 누구도 무상대능력을 팔 성 이상 익히지 못했다. 그래서 미완의 무공이라고도 불렸다.
소천의 경지도 팔 성.
역대 조사들과 마찬가지로 한계에 직면했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소천의 나이가 역대 조사들에 비해 비할 수 없이 어리다는 것이다.
그 누구도 소천의 나이에 무상대능력을 팔 성까지 익힌 이는 없었다. 이대로 몇 년 만 시간이 흐르면 분명 벽을 깰 것이고, 머지않은 시일 내에 대성을 이룰 것이 분명했다.
“무상대능력이라면 한번 어울려 줄 만하지.”
검율천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그러자 뼈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후웅!
소천의 무상대능력이 기세를 더해 가고 있었다. 마치 눈덩이처럼 불어난 기운이 검율천의 어깨를 짓눌렀다. 하지만 검율천은 아랑곳하지 않고 소천을 향해 걸어갔다.
허리에 걸린 도가 덜렁거리고 있었다.
음유경이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소천에게서 느껴지는 기도가 심상치 않았지만 그녀는 하나도 걱정하지 않았다.
소천은 분명 강하다. 어쩌면 구무룡 중 최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세속의 강함은 검율천에게 통하지 않는다.
검율천은 인외(人外)의 경계를 걷는 자.
질 수가 없는 존재였다.
그를 위해 기꺼이 웃으며 죽어 간 백스물두 명의 영혼이 지켜보고 있는 한, 절대 무너질 수 없었다.
“반야장(般若掌)!”
소천이 소림사의 비전 절예인 반야장을 펼쳤다.
무상대능력이 뒤받치는 반야장은 그야말로 파천황의 위력을 갖고 있었다.
검율천이 덜렁거리는 도를 꺼내 들었다.
“시대의 격류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싶지 않으면 벽을 깨라고, 땡중.”
쿠우우!
검율천의 도가 반야장을 가르며 소천을 향해 나아갔다.
음유경은 고개를 돌렸다.
굳이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결과를 알 수 있었다.
불굴의 무인 검율천.
검율천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택한 어떤 소년은 이렇게 불렀다.
마도율천(魔道律天).
검율천 자체가 곧 마도라고.
‘소천은 결코 그의 상대가 될 수 없어. 현 천하에 그나마 그의 상대가 될 만 한 자가 있다면 단 한 명뿐.’
음유경은 한 남자를 떠올렸다.
발을 저는 남자, 그러면서도 권 하나로 천하를 공포에 떨게 하는 무인.
‘권마.’
***
담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해가 지고 있었다. 서쪽 하늘은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고, 땅거미는 그가 있는 곳을 향해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었다.
노숙을 해야 할 시간이었다.
담호는 나뭇가지를 끌어모아 모닥불을 피웠다.
예전 같았으면 방진보가 했을 일이다. 하지만 방진보가 없는 지금 그가 직접 해야 했다.
오늘의 식사는 말린 육포였다.
이전에는 아무런 거부감 없이 먹었을 육포가 왠지 질기게 느껴졌다. 하지만 담호는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묵묵히 육포를 씹었다.
히힝!
옆에서 흑귀가 풀을 뜯어먹으며 투레질을 했다. 흑귀도 방진보가 없으니 허전한 것 같았다.
담호도 방진보의 부재를 실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쉽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방진보도 언젠가는 홀로 서야 했다. 그 시기가 조금 더 일찍 다가왔을 뿐이다. 황경문과 황혜령이라면 방진보를 분명 잘 보살펴 줄 것이다.
단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방진보에게 어울리는 무공을 만들어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무공을 하루아침에 만들어 낼 수는 없었다.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잊지 않고 꾸준히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방진보를 위한 무공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담호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모닥불을 바라봤다.
짙은 어둠 속에서 오직 한 줄기 불빛만이 희미하게 세상을 비추고 있었다. 그 모습은 담호에게 묘한 감흥을 주었다.
‘어둠이 아무리 짙어도 조그만 불빛 하나를 완전히 집어삼키지 못하는구나.’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갔다.
긴 시간 동안 담호는 꼼짝도 하지 않고 모닥불을 지켜봤다.
새벽녘이 되었을 때 모닥불은 꺼졌고, 하얀 연기만 피어올랐다. 그래도 담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움직인 것은 동녘에 해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였다.
조그만 육포 하나를 입에 문 채 흑귀에 올라탔다.
“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흑귀가 힘차게 달렸다.
담호는 흑귀에 몸을 맡겼다. 그렇게 반나절을 달리자 커다란 강이 나타났다. 담호는 강을 따라 흑귀를 달렸다.
한참을 달리자 배를 타는 선착장이 나타났다. 선착장에는 제법 큰 배가 정박을 하고 있었다.
운마도강선만큼 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규모가 제법 커서 흑귀를 태우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선착장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배를 타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커다란 마차였다.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커다란 마차는 그 흔한 창문조차 없이 꽉 밀폐되어 있었다.
마차 주위에는 십여 명의 무인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배를 타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은 무인들의 살벌한 분위기에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담호는 흑귀에서 내려 선착장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마차를 지키고 있는 무인들이 경계의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담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선표를 구입했다.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이 멀찍이 떨어져 있었건만 그를 바라보는 무인들의 경계 어린 눈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때 선원이 크게 소리쳤다.
“모두 배에 타십시오. 일각 후 출발합니다.”
사람들은 선원에게 선표를 건네준 후 배에 올라탔다.
어느 정도 사람들이 타자 무인들이 마차를 끌고 배에 올랐다.
“짐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해.”
우두머리로 보이는 무인이 소리를 질렀다. 그에 무인들이 대답을 하면서 조심스럽게 마차를 배에 실었다.
마지막으로 배에 탄 사람은 담호였다. 흑귀의 고삐를 쥐고 갑판에 오르자마자 배가 출발했다.
담호는 흑귀와 함께 갑판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운마도강선처럼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오르는 것이 아니었다. 강 저편으로 건너가는 도강이 목적이었다.
반 시진 정도만 참으면 건너편에 도착한다. 그러면 살벌한 분위기를 발산하는 무인들과도 작별이다. 그 때문인지 사람들은 금세 여유를 되찾았다.
담호도 굳이 마차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엔 어떻게 하면 화산까지 최고 빠른 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가득했다.
‘사부.’
담호가 현소 진인을 떠올리고 있을 때 배가 갑자기 크게 출렁였다. 높은 물결을 만난 모양이었다.
그극!
갑판이 기울어지자 이제까지 잘 서 있던 마차가 밀려왔다. 무인들이 필사적으로 마차의 네 귀퉁이를 붙잡고 버텼다. 하지만 워낙 무게가 많이 나가다 보니 마차가 담호 근처까지 밀려왔다.
그나마 무인들이 필사적으로 버텨 마차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담호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마차 한쪽에 갈라진 틈이 보였다. 그리고 틈 사이로 누군가의 커다란 눈이 보였다.
절망과 비통함만이 가득한 눈동자는 곧 무인들의 모습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