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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160화 (16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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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화 4장.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될 것이 있다(1)

후두둑!

비가 내렸다.

빗방울이 수면을 때리면서 수많은 동심원이 생겨났다 사라졌다. 요란한 빗소리가 사람들의 귓전을 어지럽혔다.

비가 쏟아지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급히 선실로 뛰어 들어갔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바로 마차를 지키고 있는 무인들이었다.

그들은 장대처럼 쏟아지는 빗속에서도 꼼짝하지 않고 마차를 지켰다. 두 눈을 부리부리하게 빛내고 있는 그들의 모습에선 비장함마저 느껴졌다.

담호는 난간에 앉아 그들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봤다.

그의 곁에는 흑귀가 서 있었다. 흑귀의 칠흑 같은 몸통을 타고 빗물이 흘러내렸다.

담호의 시선을 느꼈는지 마차를 지키고 있는 무인들의 우두머리가 고개를 들어 담호를 바라봤다.

차돌을 연상시키는 단단한 체구의 중년인이었다. 눈빛 또한 체구만큼이나 매서워서 어지간한 간담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선 마주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중년인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순간이었다.

쿵!

배가 강 반대편 선착장에 도착했다.

“모두 내리시오.”

선원들이 힘차게 소리쳤다.

중년인은 담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어서 마차를 내려라.”

“예!”

무인들이 힘찬 대답과 함께 마차를 내리기 시작했다.

마차가 담호의 바로 앞을 지나갔다.

끼기긱!

바퀴에 짓눌린 갑판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한 비명을 내질렀다. 마차의 틈 사이로 또다시 누군가의 검은 눈동자가 보였다.

그 순간 무인 한 명이 몸으로 틈을 가렸고, 검은 눈동자는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마차는 배에서 내려 순식간에 멀어져 갔다.

담호도 흑귀를 데리고 배에서 내렸다. 비는 멈출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담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달렸다. 흑귀는 빗속의 질주가 즐거운 듯 연신 거친 콧김을 뿜어냈다.

흑귀는 천리마라는 별명이 아깝지 않은 명마였다. 거의 반나절 넘게 빗속을 무섭게 질주했는데도 지친 기색이 하나 없을 정도였다.

저 멀리 도시가 보였다.

화현(和縣)이라는 도시로 안휘성에서도 제법 큰 축에 속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담호는 그 사실을 몰랐다.

해는 지고 있었고, 비는 여전히 멈출 줄 몰랐기에 쉬어 가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비가 쏟아지고 있어서 그런지 화현의 거리는 무척이나 한산했다. 담호는 제일 먼저 보이는 객잔에 들어갔다.

이제 겨우 십여 세 정도로 보이는 어린 소녀가 후다닥 뛰어나와 담호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마구간은 있느냐?”

“그럼요. 마침 바닥에 짚도 새로 깔아서 얼마나 뽀송뽀송한지 몰라요. 말도 저희 마구간에 들어가면 좋아할 거예요.”

“말을 마구간에 넣고, 좋은 여물을 주거라.”

“그렇게 할게요. 자고 가실 거죠?”

“음!”

“안에서 잠시만 기다리세요. 말을 마구간에 넣고 금방 갈게요.”

소녀가 흑귀의 고삐를 잡고 마구간으로 걸어갔다. 조그만 소녀가 커다란 흑귀를 낑낑거리면서 끌고 가는 모습이 여간 야무진 것이 아니었다.

담호는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비가 와서 그런지 객잔 안은 무척이나 한산했다. 십여 개의 탁자 중 손님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곳은 겨우 두 곳뿐이었고, 나머지는 텅텅 비어 있었다.

담호는 그중 한 자리에 앉아서 창밖을 바라봤다. 잠시 앉아 있으니 예의 소녀가 급히 달려왔다.

“헉헉! 마구간에 잘 넣어 주고, 귀리와 좋은 여물도 주었어요. 물도 새로 한 동이 길어 주었으니 오늘 밤은 신경 쓸 일 없을 거예요.”

소녀는 붉게 상기된 얼굴로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담호는 그런 소녀에게 동전 하나를 건네주었다. 그에 소녀의 미소가 더욱 활짝 피었다.

“와! 고맙습니다.”

“간단히 요기할 만한 음식 좀 가져다다오.”

“네! 술도 가져다 드릴까요?”

“그래!”

담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소녀가 다람쥐처럼 잽싸게 주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평소 술을 즐겨 마시지 않는 담호였지만, 오늘은 어쩐지 한잔하고 싶었다. 비가 내려서 그런지도 몰랐다.

담호는 한동안 말없이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소녀가 낑낑거리면서 제 몸보다 큰 쟁반을 들고 왔다.

“오리구이와 저희 객잔의 명물인 홍주예요. 아빠가 직접 담근 거라서 맛이 끝내줄 거예요.”

소녀의 장담처럼 홍주에서는 달짝지근한 냄새가 났다. 주당들이 맡았다면 넋을 잃을 만큼 주향이 환상적이었다.

“좋구나.”

“맛있게 드세요.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불러 주시구요. 아, 아저씨 방은 이 층 계단 오르면 첫 번째 방이에요.”

“음!”

담호의 대답을 듣자 소녀가 다시 주방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여전히 날다람쥐 같은 모습이었다.

혼자 남은 담호는 술잔에 홍주를 따라 마셨다.

달콤한 주향만큼이나 맛이 기가 막혔다. 이 정도면 어디에서도 명주로 대접받을 만했다.

오리구이도 맛있었다. 기름기를 쫙 빼서 담백한 오리구이는 담호의 입에 제법 잘 맞았다.

담호는 창밖으로 내리는 비와 오리구이를 안주 삼아 홍주를 즐겼다. 세상에 나온 이후 혼자서 이렇게 운치를 즐기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 듯했다.

그렇게 담호가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때였다. 창밖으로 두 필의 말이 객잔을 향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두 필의 말 위엔 각각 사람이 타고 있었다. 소녀가 뛰어가서 말고삐를 넘겨받았고, 두 사람은 객잔 안으로 들어왔다.

“비가 엄청 쏟아지네요.”

“아가씨, 이쪽에 앉으십시오.”

문을 열고 들어온 이들은 두 명, 그들은 모두 커다란 방립을 쓰고, 피풍의를 걸치고 있었다.

그들은 객잔 안에 들어오자마자 머리에 쓰고 있던 커다란 방립부터 벗었다. 그러자 단아한 인상의 여인과 주름이 가득한 노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단아한 인상의 여인은 무척이나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특히 은은한 붉은빛이 감도는 머릿결은 보는 이의 넋까지 빼앗을 정도로 신비로웠다.

여인은 내친김에 거추장스러운 피풍의까지 벗어 버렸다. 그러자 단아한 인상과는 어울리지 않는 굴곡진 몸매가 드러났다.

여인은 비에 젖은 긴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비가 이렇게 쏟아지니 어쩔 수 없네요. 오늘은 이곳에서 머무는 수밖에.”

“이렇게 비가 내리면 그 어떤 누구라도 어쩔 수 없습니다.”

“한시가 급한데…….”

“그래 봤자 겨우 반나절 늦어질 뿐입니다. 잠깐 동안 상세가 그렇게 악화되지는 않을 겁니다. 마음 편히 생각하십시오. 대신 내일 더 빨리 말을 달리면 됩니다.”

곁에 있던 늙은 무인이 그녀를 위로했다.

“하긴 하늘의 뜻을 인간이 어찌 거역할까요? 날씨마저 도와주지 않으니 오늘은 편하게 쉬지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간 고생하셨는데 오늘은 모처럼 푸짐하게 식사할까요?”

“아가씨가 사시는 겁니까?”

“돈은 화노가 더 많잖아요.”

“제 돈은 모두 공금입니다.”

“수전노처럼 이럴 거예요?”

“공과 사는 엄격하게 구분해야 합니다, 아가씨.”

“휴!”

노인의 뻔뻔한 대답에 여인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알았어요. 오늘은 제가 화노에게 한턱낼게요.”

“감사합니다, 아가씨. 오늘은 모처럼 포식을 하겠군요.”

“오늘 한 번뿐이에요.”

“물론입지요.”

“여기, 얘야.”

여인이 손을 들어 소녀를 불렀다.

근처에서 서성이던 소녀가 재빨리 달려왔다.

“부르셨나요?”

“여긴 무슨 음식을 잘하느냐?”

“다 잘해요. 저희 아빠가 한 요리 하시거든요.”

“잘됐구나.”

여인은 소녀에게 음식을 주문했다. 소녀는 그런 여인을 넋을 놓고 바라봤다.

그런 소녀의 반응에 여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느냐?”

“너무…… 예뻐서요.”

“고맙구나. 너도 지금 이렇게 예쁘니, 크면 훨씬 더 아름다워질 것이다.”

“정말요?”

“그럼!”

여인의 대답에 소녀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언니는 이름이 뭔가요?”

“내 이름은 종리연이다.”

“이름도 예뻐요. 제 이름은 너무 촌스러운데. 겨울에 태어난 둘째라고 동이(冬二)래요. 우리 아빠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지었는지.”

동이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는데 그 모습마저 무척이나 귀여웠다. 종리연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동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동이라는 이름도 무척 예쁘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버지가 지어 준 이름이잖니. 귀하고 소중하게 여기거라.”

“네! 언니. 그럼 음식 주문할게요.”

동이가 힘찬 대답과 함께 주방으로 달려갔다.

종리연은 미소를 지은 채 그런 동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하여간 아가씨는 마음이 너무 좋으셔서 탈입니다. 저런 아이까지 신경을 쓰시다니요. 그래 봤자 객잔에서 심부름이나 하는 아이인데요.”

“그런 말씀 말아요, 화노. 저 아이의 미래가 어떨지는 아무도 알 수 없어요. 혹시 알아요? 저 아이가 미래에는 강호를 진동시키는 여협이 될지.”

종리연의 말에 화노가 말없이 웃기만 했다.

그의 주인은 세상을 너무나 몰랐다.

‘요즘 세상은 부모의 한계가 곧 자식의 한계. 동이란 아이에게 경천동지할 만한 무재가 없는 이상 무인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터.’

하지만 화노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않았다.

화노는 종리연의 순진무구함이 좋았다. 이 각박한 세상에 그녀처럼 꿈을 꾸는 사람이 한 명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화노는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면서 객잔 안을 둘러봤다. 그의 눈에 담호가 들어왔다.

헝클어진 흑발에 다 찢어진 흑의. 담호는 어디서나 눈에 띌 수밖에 없는 그런 모습이었다.

담호를 본 순간 화노는 전신의 털이란 털이 모조리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관심을 두지 않았을 땐 몰랐는데 일단 의식을 하니 전신의 신경이란 신경이 모조리 곤두섰다.

‘대체 저자가 누구기에?’

지금은 강호를 은퇴하고 종리연의 호위 노릇을 하고 있지만, 화노도 한창때는 강호에서 이름을 날리던 고수였다.

나름 산전수전 다 겪고, 수많은 이들을 만났다고 자부하는 화노였지만, 담호만큼 보는 순간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남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왜 그래요? 화노.”

화노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자 영문도 모르고 종리연이 물었다. 화노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방금 전 표정이 무서웠는데…….”

“잠시 다른 생각 하느라 그랬습니다.”

화노가 급히 말을 돌렸다.

종리연이 담호를 바라봤다. 방금 전 화노의 시선이 분명 담호를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저 남자에게 특별한 것이라도 있나?’

종리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종리연의 수준으로서는 담호의 무서움을 알 수 없었다.

담호는 종리연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조금씩 술잔을 기울일 뿐이었다.

시간은 흐르고 비는 멈출 줄 몰랐다. 어느덧 담호의 앞에 놓인 술병은 바닥이 났다.

담호는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젠 내일을 위해 쉬어야 할 때였다.

그렇게 담호가 자리를 뜨려고 할 때였다.

덜컹!

갑자기 객잔의 문이 열리고 일단의 무리가 안으로 들어왔다.

모두 스무 명,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기세를 풍기는 사내들은 객잔 안을 둘러보더니 곧 종리연과 화노가 앉은 곳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무리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종리연에게 물었다.

“신의 종리연 소저 맞습니까?”

“그런데요?”

“우리는 남궁세가에서 나온 사람들입니다. 지금 남궁세가엔 종리연 소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신의(神醫) 종리연.

현재 안휘성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의원이었다. 그것도 매우 뛰어난.

숨만 끊어지지 않았으면 어떤 사람이라도 살려 낸다고 했다. 심지어는 죽은 사람도 살려 냈다는 소문도 돌곤 했다.

오죽했으면 그녀에게 신의라는 별호가 붙었을까.

안휘성에 적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그녀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어떻게든 그녀와 연을 맺으려고 했다.

신의를 알고 있다는 것은 여벌의 목숨을 챙겨 둘 수 있다는 것과 의미가 상통했으니까.

남궁세가에서 나왔다고 스스로를 소개한 무인이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부디 남궁세가를 도와주십시오. 종리 소저.”

그에 종리연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하죠? 지금 급한 환자가 있어서 그곳으로 가는 중인데요.”

“어떤 사정인지는 모르지만 순서를 바꿔 주시지요. 사례는 섭섭지 않게 하겠습니다.”

“그건 곤란해요. 생사가 오가는 환자가 기다리고 있어서.”

“이쪽도 마찬가집니다.”

남궁세가 무인의 음성이 단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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