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권마-161화 (161/500)

 161

161화 4장.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될 것이 있다(2)

그의 이름은 남궁장경이었다.

남궁세가 내에서도 무력을 인정받은 장년의 무인들이 소속되는 창궁전(蒼穹殿) 출신이었다.

창궁전에 소속되었다 함은 남궁세가 내에서도 서열 백 위 이내의 무력을 지녔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남궁장경은 창궁전 내에서도 상위의 무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남궁장경이 세상으로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남궁세가 내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남궁장경이 종리연을 노려봤다.

종리연의 나이 이제 겨우 이십 대 초반.

일반적인 강호인들이라면 겨우 초출에 불과할 나이지만, 그녀는 이미 커다란 명성을 얻고 있었다. 적어도 안휘성 내에서는 그녀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제아무리 남궁세가가 안휘성 내에서 절대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종리연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무척이나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평상시라면 매우 정중하고 신중하게 접근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비상시국이었다.

종리연의 사정 따윈 봐줄 여유가 없었다.

“어떤 분이 신의를 불렀는지 모르겠지만, 그분도 남궁세가의 사정을 알면 양해해 줄 겁니다.”

“그럴 수는 없어요.”

종리연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에게 생명은 평등하다. 남궁세가에 무슨 급한 사정이 있는지 모르지만,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다음 환자 또한 사정이 급박하긴 마찬가지였다.

환자의 나이는 겨우 십여 세, 아비의 객잔 일을 도와주고 있는 동이 또래의 소녀였다. 그녀는 삼 년 전에 혈맥이 돌덩이처럼 굳어 가는 천형에 걸려 죽어 가고 있었다.

종리연도 그때쯤 소녀를 만났다. 하지만 당시에는 소녀를 구할 방법이 없었다. 그녀가 가진 지식 어디에도 소녀의 치료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종리연은 소녀를 구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우면서도 소녀의 치료법을 연구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삼 년이 흘렀다. 그 시간 동안 소녀는 서서히 죽어 갔고, 이제 한계에 달했다. 그리고 종리연은 마침내 그녀의 병증을 치료할 단서를 찾았다.

지금 그녀는 소녀를 치료하기 위해 가는 길이었다. 삼 년이나 기다려 왔던 순간인 것이다.

“최대한 빨리 선약을 잡은 환자를 치료한 후 남궁세가의 일을 처리할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일입니다.”

“이쪽도 마찬가지예요.”

“종리 소저.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남궁장경의 목소리가 차갑게 변했다. 일변한 그의 분위기에 공기마저 차갑게 식는 듯했다.

종리연의 안색 또한 차갑게 변했다.

겉보기엔 그저 여리고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 소녀로 보이지만, 그녀는 의술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진 의원이었다.

‘의원은 신분의 고하로 생명의 경중을 따져서는 안 된다. 생명이 경각에 달린 자에게 먼저 자신의 의술을 베풀어야 한다.’

그것이 스승인 활선 유태의가 의술을 가르치기 전에 했던 말이다.

이제 스승은 돌아가시고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그의 가르침만큼은 그녀의 가슴에 깊이 남아 있었다.

종리연의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서 남궁장경은 더 이상의 대화가 무의미함을 깨달았다.

“죄를 짓겠습니다. 종리 소저.”

남궁장경의 음성은 단호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종리연과 화노를 포위했다.

그 순간 이제까지 조용히 있던 화노가 나섰다.

“언제부터 천하의 남궁세가가 이렇게 무도해진 건지.”

방금 전까지 종리연과 격의 없는 농담이나 주고받던 노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화노의 전신에서는 서릿발 같은 기세가 줄기줄기 뻗쳐 나오고 있었다.

남궁장경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는 남궁세가 내에서도 알아주는 고수였다. 당연히 상대의 수준을 알아볼 만한 눈썰미를 갖추고 있었다.

그런 그조차도 화노가 스스로 나서기 전까지는 특별히 의식하지 못했다. 그만큼 화노의 모습은 평범했었다. 하지만 막상 전면에 나서자 그의 존재감이 가슴을 꽉 채우고 있었다.

‘범상치 않은 고수.’

하지만 화노의 존재감에 겁을 집어먹고 물러서기엔 사정이 녹록지 않았다.

남궁장경이 화노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노인장은 누구시오?”

“나? 빚을 진 늙은이지.”

“빚?”

“이 아가씨에게 목숨을 구함받았거든. 그놈의 빚이 염왕채인지 몰라도 계속 이자가 불어나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

화노가 투덜거리며 손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몸을 풀었다.

“우린 싸울 이유가 없소. 단 한 번만 당신의 아가씨가 융통성을 발휘해 준다면.”

“나도 몇 번이나 신의 아가씨에게 그렇게 말했다네. 제발 융통성 좀 가지라고. 그게 세상을 편하게 사는 길이라고. 그런데 고집이 어찌나 센지 내 말은 좀처럼 듣지 않네. 당나귀보다 고집이 더하다니까.”

화노가 종리연을 보며 혀를 찼다.

종리연의 붉게 상기된 얼굴이 보였다. 굳게 다문 붉은 입술도.

강한 척 눈을 부릅뜨고 있지만, 힘껏 쥔 주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허세도…….’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강한 척을 한다.

일반인들에겐 그런 허세가 통할지 모르지만, 남궁장경과 같은 고수들에겐 전혀 통하지 않는다.

“그럼 당신 아가씨를 설득하시오. 아직 늦지 않았소.”

“그런데 말일세, 나는 그런 고집불통이 좋네. 그래도 그녀는 자신만의 원칙과 신념을 어떻게든 지키려고 하니까. 불행히도 요즘엔 그런 사람이 거의 없거든.”

“결국 벌주를 택하겠다는 뜻이오?”

“누가 벌주를 택한 것인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우린 남궁세가요.”

“아네.”

“그런데도 척을 지겠다는 거요?”

“말했지 않은가? 목숨을 구함받았다고. 여벌의 목숨으로 두 번째 삶을 살고 있는데 내가 죽음을 두려워할 것 같은가?”

화노의 음성은 매우 담담했다. 세상을 달관한 듯한 그의 모습이 남궁장경의 화를 더욱 북돋았다.

“명심하시오. 이제부터 이 객잔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신의와 당신의 책임이라는 것을.”

“허! 무섭구먼.”

“무서워해야 할 것이오.”

남궁장경의 시선이 함께 온 무인들을 향했다.

“지금부터 일어나는 일에 목격자는 필요 없다. 모두 죽여 증거를 인멸해.”

“존명!”

남궁세가 무인들이 대답과 함께 검을 뽑아 들었다. 그에 종리연과 화노의 안색이 싹 바뀌었다.

“설마…… 이 객잔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죽이겠다는 건가?”

“당신들이 그렇게 만들었소.”

“미친!”

화노가 욕설을 내뱉었지만 남궁장경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반면 종리연의 안색은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그녀는 단지 원칙을 지키고자 했을 뿐인데 생각 이상으로 일이 커지고 있었다.

주방 한쪽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객잔 주인과 동이의 모습이 보였다. 화노가 강하다지만 그들까지 지켜 줄 수는 없었다.

종리연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자, 잠깐만요. 제가 당신들을 따라가면 저들을 살려 줄 건가요?”

“그럴 수는 없소.”

“왜죠?”

“한번 내뱉은 말은 되돌릴 수 없으니까. 모두 죽이라는 말을 이 객잔 안에 있는 사람들이 들었는데, 과연 비밀이 유지될까? 사람들은 끝까지 입을 다무는 법이 없고, 아무리 중한 약속이라도 시간이 흐르면 깃털보다 가볍게 여기기 마련이지.”

남궁세가는 안휘성의 정점에 군림하고 있었다.

그들은 무소불위의 권력과 무력을 소유하고 있었고, 안휘성 사람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런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객잔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것을 안휘성 사람들이 알면 어떻게 될까?

분명 도덕적인 지탄을 면치 못할 것이다.

남궁세가로서는 커다란 부담이 될 터였다.

“이들이 죽는 것은 당신들 때문이오.”

“그런…….”

“시작해!”

남궁장경의 명령이 떨어졌다.

남궁세가 무인들이 검을 들고 객잔 안에 있는 무인들을 향해 다가갔다.

“으으!”

“말도 안 돼. 우리가 왜?”

객잔 안에서 모든 광경을 숨죽이며 지켜보던 이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달아나려 했지만 객잔의 입구는 이미 남궁세가 무인들이 막고 있었다.

결국 사람들은 객잔의 구석으로 모여들었고, 남궁세가의 무인들은 포위망을 서서히 좁혀왔다.

동이가 아빠의 품에 안긴 채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아빠?”

“괜찮다. 괜찮을 거다.”

아비가 동이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엔 힘이 담겨 있지 않았다.

‘이래서 무림인들과는 엮이고 싶지 않았는데.’

그는 동이의 조그만 몸을 힘껏 껴안았다. 어떻게든 어린 딸아이를 살리고 싶은 아비의 바람이었다.

그때였다.

쾅!

갑자기 객잔 안의 공기가 터져 나가며 이리처럼 사나운 바람이 사람들을 덮쳤다.

“크윽!”

“무슨?”

손님은 물론이고 남궁세가의 무인들까지 거친 기파에 신형을 바로 세우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뭐야?”

종리연은 물론이고 남궁장경의 안색까지 싹 변해 폭음이 들려온 곳을 바라봤다.

“끄으으!”

그곳에 남궁세가의 무인이 비틀거리고 있었다.

한쪽 어깨가 완전히 함몰된 채.

무인은 서너 걸음도 옮기지 못하고 통나무처럼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쿵!

둔탁한 소성이 객잔 안에 울려 퍼지고, 무인에게 가려 보이지 않던 뒤쪽의 모습이 사람들 시야에 들어왔다.

그곳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거친 흑발에 다 찢어진 흑의를 걸친 남자였다.

남궁장경의 명령을 받은 무인은 당연히 남자를 제거하려 했다. 그것이 그가 받은 명령이었으니까.

무인의 검이 담호에게 닿으려는 순간 거센 폭풍이 그를 덮쳐 왔다. 그리고 세상이 까매졌다.

그것이 무인의 마지막이었다.

장내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남궁장경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경련이 어깨로 번져 가고 있었지만, 남궁장경은 그런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왜 저자를 보지 못했지?’

이 강렬한 존재감, 이 포악한 기파가 상대가 범상치 않은 존재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남궁장경은 단 한 번도 이처럼 거칠고 광포한 기파를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이런 자가 있는 줄 알았다면 섣불리 척살령을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남궁장경은 자신의 섣부른 결정을 자책하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누굽니까?”

“그게 중요하나?”

담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남궁장경은 전신의 털이란 털이 모조리 곤두서는 느낌을 받았다.

담호가 몸을 일으켰다.

순간 남궁세가의 무인들은 물론이고 화노까지 움찔하면서 뒤로 물러났다. 그만큼 담호의 존재감은 가히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종리연이 눈을 크게 치떴다.

남궁세가와 정면으로 맞설 정도로 배포가 큰 그녀였지만, 단 한 번도 담호처럼 강렬한 기백을 발산하는 자는 본 적이 없었다.

단 한 사람의 존재감이 객잔 안에 모인 모두를 압도하고 있었다.

담호가 남궁장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의 왼쪽 발이 살짝 바닥을 끌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남궁장경은 이름 하나를 떠올렸다.

당금 강호에 전율스러운 악명을 떨치는 이름 두 자.

“네놈은 담호구나.”

그의 외침이 불러온 반향은 엄청났다.

“담호? 그럼 권마?”

“권마가 이 객잔 안에 있었단 말인가?”

남궁세가 무인들이 웅성거렸다.

그 이름을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고비마다 남궁세가의 앞을 가로막은 거대한 벽이 바로 담호였다. 남궁세가의 이공자인 남궁수도 그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담호는 남궁세가의 철천지원수나 다름없었다.

“감히 네놈이…….”

남궁장경의 노성이 터져 나왔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