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
163화 5장. 악연(惡緣)은 질기게 이어지는 법이다(1)
남궁세가(南宮世家).
안휘성의 패자이자 오대세가의 일원으로 명망 높은 가문이었다.
남궁세가는 안휘성의 성도인 합비(合肥) 외곽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배후로는 제법 커다란 산을 병풍처럼 등지고, 앞에는 커다란 강이 흐른다. 완벽한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 거기다 마을로 들어가는 통로는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하나뿐.
다리만 지키면 그 어떤 적도 침입할 수 없는 천혜의 지형. 그 한가운데 남궁세가가 자리 잡고 있었다.
남궁세가 주위로 자리를 잡은 집들은 모두 방계(傍系) 소유. 마을 전체가 남궁세가의 혈족으로 이뤄진 셈이다.
높다란 담장으로 둘러싸인 남궁세가는 그 자체로 하나의 완벽한 요새였다. 남궁세가의 허락을 받은 자와 남궁 성씨를 쓰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
수많은 전각들과 연무장이 한데 섞여 조화를 이루는 남궁세가 내에서도 특별히 중요한 공간들이 있었다.
검명전(劍鳴殿)도 그런 공간 중 하나였다.
신화전(神話殿)이 남궁세가의 가주가 머무는 거처라면 검명전은 소가주의 거처였다.
대남궁세가를 이어 나갈 차기 가주가 있는 곳. 당연히 경계가 삼엄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에도 물 한 방울 샐 틈 없는 경비가 이뤄지는 곳이었지만, 지금 검명전 안팎으로는 수많은 고수들이 모여 있어 요새를 방불케 했다.
외곽에서 경비를 하는 무인들을 제외하고, 소가주의 침전에 모여 있는 사람은 모두 십여 명. 하지만 누구 한 명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의 시선은 검명전 한가운데 있는 침상을 향해 있었다.
침상에는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청년이 누워 있었다.
멀쩡했을 때는 미남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법한 외모였지만, 불행히도 그의 얼굴엔 사기가 가득했고, 전신에는 굵은 힘줄이 툭툭 불거져 나와 있었다.
청년의 이름은 남궁무진.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천의 장자이자 소가주라는 지고한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다섯 살에 처음 검을 잡고, 일곱 살에 두각을 드러냈다. 나이 열 살에 그보다 한참 위의 무인들보다 뛰어난 성취를 이뤘다.
자연 남궁세가 모든 인물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을 수밖에 없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런 기대가 부담스러울 만도 하건만, 남궁무진은 오히려 보란 듯이 사람들의 기대를 뛰어넘는 성취를 이뤘다.
창궁무애검법(蒼穹無涯劍法), 대연검법(大衍劍法)과 같은 남궁세가의 절기들을 모조리 익히고, 오직 가주만이 익힐 수 있는 제왕검형(帝王劍形)에 입문한 것이 얼마 전의 일이었다.
“내가 너무 서둘렀던 것인가?”
이제 오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노인이 남궁무진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눈은 호수처럼 차갑고 맑았으며, 이목구비는 청수한 인상의 문사를 연상시켰다.
노인이 바로 남궁세가의 가주인 남궁천이었다.
이백 년 만에 제왕검형을 완성한 위대한 무인. 그래서 남궁세가에서는 검왕(劍王)이라는 별호로 그를 불렀다.
남궁천은 가문의 운영을 남궁창과 동생들에게 맡기고 오직 무공일도에만 전념했다.
그가 원하는 것은 검왕을 뛰어넘는 검선지로(劍仙之路). 검으로 궁극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자식들의 무공을 봐 주는 것조차 등한시했었다. 그런 그에게 남궁무진이 찾아온 것이 석 달 전이었다.
그는 제왕검형을 익히길 원했다. 원래라면 정식으로 가주 직을 얻기 전에는 전수할 수 없었지만, 남궁천은 흔쾌히 남궁무진에게 제왕검형을 전수했다.
그만큼 남궁천은 남궁무진을 믿었다.
남궁무진이라면 자신의 뒤를 이어 훌륭하게 제왕검형을 완성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남궁무진은 남궁천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았다. 그는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제왕검형을 익혀 나갔다.
침식도 잊고 제왕검형에게 몰두한 지 석 달. 문제가 터진 것은 불과 며칠 전이었다.
남궁무진은 빠른 성취에 도취되어 더욱 욕심을 냈고, 너무 서두르다 보니 그만 주화입마에 빠지고 말았다.
겨우 숨이 붙어 있지만 기식이 엄엄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한다면 어떻게 목숨을 살릴 수 있을 진 모르지만, 두 번 다시 무공을 익힐 수 없는 신세가 될 것이다.
대남궁세가의 소가주가 무공을 익힐 수 없는 몸이 되다니? 남궁세가로서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한 셈이다.
그 때문에 안휘성의 수많은 의원들이 남궁세가로 불려 왔다. 명의라고 불리는 자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남궁무진을 진맥한 의원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저었다. 그들의 실력으로는 남궁무진의 주화입마를 치료할 수 없었다.
화가 난 남궁천은 불가능하다고 대답한 의원들을 모조리 죽였다. 뒤늦게 이성을 찾은 후 후회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되돌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신의는 아직도 멀었느냐?”
“장경이 수하들을 이끌고 갔으니 금방 데리고 올 겁니다.”
“신의라면 무진을 치료할 수 있겠지?”
“그녀가 치료하지 못한다면 천하의 그 어떤 의원도 소가주를 치료하지 못할 겁니다.”
“반드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를 데려와야 한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형님.”
대답을 한 이는 남궁세가의 장로인 남궁화였다. 그는 남궁천의 동생으로 남궁세가 내에서도 꽤나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남궁화는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남궁천을 바라보았다. 지금 남궁천은 소위 말하는 눈이 돌아간 상태였다.
분노가 이성을 침식하고 있었고, 화가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만일 누군가 살짝이라도 건들면 그 순간 대참사가 일어날 것이다.
남궁세가의 장로들은 남궁천의 분노 앞에 숨을 죽이고 있던 그때였다.
“가주님!”
밖에서 급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궁천의 눈이 문을 향했다. 그의 얼굴엔 기대감이 떠올라 있었다.
“신의를 데리고 왔느냐?”
“그게…….”
문을 열고 남궁세가의 무인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그는 혼자였다.
“무슨 일이냐?”
“신의를 데리러 갔던 이들이 몰살당했습니다.”
“뭣이?”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아 사람을 보냈더니 객잔에 본가 무인들의 시신만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본가의 무인들이 몰살을 당했단 말이냐?”
“죄송합니다.”
“감히! 어떤 자가 본가를 능멸한단 말이냐?”
남궁천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런 그의 전신에서는 엄청난 기세가 발산되었다.
검왕이라는 별호에 어울리는 날카로운 기세는 사람들의 심맥을 후벼 팠다.
검명전 안에 있던 장로들이 그의 기세에 압도되어 얼굴이 핼쑥해졌다.
“가, 가주님! 진정을…….”
“소가주를 생각하십시오. 가주님.”
장로들이 남궁천을 진정시키려 했다. 하지만 남궁천의 분노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누구냐? 감히 본가의 무인들을 죽인 자가.”
“그게…… 아직 확실치 않습니다. 객잔의 주인도 도망가고, 목격자가 없어서.”
남궁천이 이빨을 뿌득 갈았다.
평소 누구보다 냉철한 남궁천이었지만, 자식의 위기와 수하들의 죽음 앞에서는 분노를 참지 못했다.
무인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손속이 매우 잔인하고, 본가의 무인들이 별반 대응하지 못하고 죽은 것으로 봐서는 엄청난 고수가 분명합니다.”
“검왕대를 움직여라.”
“헛!”
“검왕대를?”
순간 장로들이 경호성을 터트렸다.
검왕대(劍王隊)는 남궁세가 최후의 보루였다.
전전 대 가주인 남궁선월이 남궁세가를 지키기 위해 비밀리에 기재들을 뽑았고, 각종 영약과 비급을 주어 익히게 했다.
그들은 남궁세가에 누란의 위기가 닥칠 시에만 세상에 나와 엄청난 위용을 자랑했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 벌써 삼십 년도 전의 일이었다. 바로 마교의 겁난 때였다.
당시 그들은 남궁세가의 담을 넘은 마교의 정예 무인 천여 명을 도륙함으로써 엄청난 무위를 세상에 드러냈다. 붉은 복면을 써서 개개인의 정체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들이 검왕대라는 사실은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마교의 침공이 끝나자 그들 역시 감쪽같이 모습을 감췄다. 일상으로 돌아가서 다시 남궁세가를 수호하는 것이다.
검왕대의 구성원을 알고 있는 이는 오직 가주 한 명뿐이다. 그리고 그들을 움직일 권한을 갖고 있는 이도 가주뿐이었다.
남궁화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형님, 검왕대는 남궁세가의 위기에만 동원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남궁천의 목소리가 스산해졌다. 그에 남궁화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아, 아닙니다.”
남궁천의 분노를 엿본 다른 장로들도 굳게 입을 다물었다.
남궁세가 역사상 남궁천만큼 완벽하게 가문을 장악한 가주는 없었다. 일단 그가 결정을 내렸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남궁천이 목소리를 높여 누군가를 불렀다.
“수천!”
“예! 가주.”
즉시 문밖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밖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안에 있던 장로들이 흠칫 놀랐다. 이곳에 있는 자들 중에 고수가 아닌 사람이 없었지만, 누구도 밖에 있는 사람의 기척을 감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장 검왕대를 데리고 가서 흉수와 신의를 잡아 오시오.”
“살려 오리까? 죽여 오리까?”
“신의는 살려 오고, 흉수는 숨만 붙어 있으면 되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답과 함께 인기척이 사라졌다.
남궁천이 남궁무진을 바라봤다.
“조금만 기다리거라, 아들아.”
애끓는 부정이 담긴 목소리가 실내에 울려 퍼졌다.
***
담호가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뒤를 따라오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과 노인이 보였다.
종리연과 화노였다.
담호가 객잔을 떠난 후 그들도 따라 나왔다.
객잔 주인과 동이는 그 길로 줄행랑을 쳤다. 그들도 알고 있는 것이다. 남궁세가에서 결코 가만있지 않으리라는 것을.
담호가 입을 열었다.
“왜 따라오지?”
“당신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에요. 그저 방향이 같을 뿐이에요.”
“…….”
“진짜예요.”
종리연이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기도 했다.
환자가 있는 곳은 함산(含山), 반드시 담호가 가는 관도를 따라가야 도착할 수 있었다.
담호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에 종리연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뭐, 뭐예요?”
그 순간 담호가 고개를 돌렸다. 더 이상 어떤 신경을 쓰지 않는 그의 태도에 종리연이 무안한 표정을 지었다.
괜히 화가 났다.
“저 인간이…….”
“고정하십시오, 아가씨.”
“에휴!”
화노가 애써 그녀를 진정시켰다. 종리연이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지만 더 이상 발작하지는 않았다.
“진정해야지, 진정. 환자만 생각하자, 종리연.”
종리연의 눈빛이 금세 차분해졌다. 하지만 그녀의 눈엔 여전히 담호의 뒷모습이 걸려 있었다.
어젯밤 싸움이 끝나고 그녀는 얼마나 토악질을 했는지 몰랐다.
의원 일을 하다 보면 시신을 보는 것은 다반사였다. 그녀 역시 많은 죽음을 지켜봤고, 그래서 타인의 죽음에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가 이제까지 봐 왔던 죽음은 담호가 만들어 낸 참상에 비하면 별거 아니었다.
그녀는 사람이 그렇게 쉽게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담호를 통해 깨달았다.
담호라는 사람에게 인간의 육신이란 깨지기 쉬운 질그릇보다도 연약했다.
어젯밤 담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람을 죽이는 일, 하나도 재미없다고.
그의 말이 어찌나 처량하게 들리던지.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그때의 여운이 아직도 가시지 않고 있었다.
신경을 쓰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담호에게 눈길이 갔다.
“아가씨!”
“으응?”
“그에게 관심 주지 마십시오.”
화노가 조심스러우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무슨 말이에요?”
“그는 우리와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거야…….”
“평범한 무인은 그렇게 사람을 죽일 수 없습니다. 저는 한평생 그렇게 사람을 무자비하게 죽이는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그런 자가 정상일 리 없습니다.”
화노의 음성은 무척이나 차분했다. 하지만 그의 말투엔 강한 거부감이 담겨 있었다.
종리연이 변명을 하듯 말했다.
“전 그에게 아무런 관심 없어요. 진짜예요.”
“그 마음 변치 마십시오, 아가씨. 죽을 날이 머지않은 늙은이의 마지막 충언입니다.”
“아, 알겠어요.”
화노의 표정은 무거웠다.
사람은 자신이 모르는 세계에 끌리기 마련이다.
그것이 단순한 동경이든, 아니면 호기심이든 간에 말이다. 문제는 그렇게 자꾸 끌리다 보면 마음을 주게 된다는 것이다.
화노는 진심으로 그런 일이 생기지 않길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