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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화 5장. 악연(惡緣)은 질기게 이어지는 법이다(2)
수천(守天), 즉 하늘을 지킨다.
남궁세가에서 하늘은 곧 가주를 뜻한다. 수천이라는 이름은 즉 가주를 지키는 자라는 뜻이다.
검왕대주는 대대로 수천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본래의 이름 따윈 그에게 어떤 의미도 없었다. 검왕대의 대주가 되는 순간 그들은 부모에게서 받은 이름을 버리고 수천이 되었다.
당대의 수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나이 일흔둘. 검왕대의 대주로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강호였다. 삼십 년 전 마교가 남궁세가를 침공했을 때 검왕대를 이끌고 그들을 척살했던 이도 바로 그였다.
역대 수천 중 가장 오래 검왕대의 대주직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의 능력이 출중하다는 증거였다.
수천은 객잔에서 가져온 시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어떤 시신도 제대로 된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이가 없었다. 수천은 시신의 상처를 통해 흉수의 무력을 가늠했다.
“장경을 제외한 대부분의 아이들이 단 일격에 즉사했다.”
수천은 가슴이 서늘해져 옴을 느꼈다.
남궁장경이 이끈 무인들도 나름 남궁세가 내에서도 알아주는 고수들이었다. 그런 고수들이 별반 대항도 하지 못하고 죽었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단 한가지였다.
“고수……. 그것도 가늠하기 힘든.”
수천은 어려운 싸움이 될 것임을 직감했다. 하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삼십 년 전에도 마교의 정예들을 막아 냈다. 상대가 마교보다 강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수천이 곁에 있던 검왕대 무인에게 물었다.
“놈의 행방은?”
“함산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서두르면 아침에는 따라잡을 수 있습니다.”
“검왕대 전원 출전한다.”
“전……원입니까?”
“그렇다.”
“그 정도로 흉수를 높게 판단하시는 겁니까?”
검왕대 전체 인원은 백여 명. 이백 년 전부터 그 수는 절대 변하지 않았다.
이제까지 검왕대가 전원 출전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가장 최근의 일이 삼십 년 전 마교가 남궁세가를 침공해 왔을 때였다.
수천이 담담히 대답했다.
“최악을 대비하는 것뿐이다.”
“알겠습니다. 검왕대 전원 소집하겠습니다.”
“서두르도록.”
“존명!”
무인이 대답과 함께 사라졌다.
수천이 몸을 일으켰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남궁세가를 건드린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게 될 것이다.”
나직이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에 스산함이 감돌았다.
***
함산은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제법 산세가 깊고 울창해서 약초꾼이나 사냥꾼들이 즐겨 찾았다.
함산에 자리를 잡고 사는 곽산도 약초꾼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가 약초꾼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나뿐인 딸 곽연이 언제부턴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이름난 의원들을 찾아 진맥했지만, 그 누구도 그녀를 치료하지 못했다.
빚은 점점 늘어났고, 결국 견디다 못한 곽산은 직접 그녀를 치료하기 위해 이곳 함산으로 들어왔다.
함산 구석구석 뒤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몸에 좋다는 약초는 모조리 뜯어 왔고, 딸에게 복용시켰다. 하지만 곽연의 상태는 전혀 호전되지 않고, 오히려 악화만 됐다.
그래도 얼마 전까지는 혼자 힘으로 조금이나마 걸었는데, 지금은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곽연은 모옥 앞 조그만 의자에 앉아 있었다. 초가을임에도 그녀는 두터운 모피 이불을 목까지 덮고 있었다. 그런데도 안색은 창백했고, 입술은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미간에 사기가 가득한 것이 사신이 이미 그녀의 어깨에 내려앉아 있는 듯했다.
곽연은 의자에 앉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녀가 조그만 입술을 열었다.
“아……빠!”
“왜 그러느냐?”
곁에 있던 곽산이 서둘러 물었다.
“오늘은 언니가 올까요?”
“올 것이다. 올 거라고 말씀하셨으니 분명 올 것이다.”
“그랬으면 좋겠어요.”
곽연이 처연한 미소를 지었다. 그에 곽산의 가슴은 찢어질 듯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딸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당장 오늘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그녀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그런데도 혼자 남을 아비를 생각해 애써 의연한 모습을 보이려 하는 효녀였다.
‘제발 힘을 내렴, 연아. 네가 죽으면 아비도 이 세상을 살 수 없단다.’
그때였다.
“아! 언니다.”
갑자기 곽연이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녀는 무릎을 채 펴기도 전에 비틀거렸다.
“애, 얘야!”
곽산이 비틀거리는 곽연의 조그만 몸을 부축했다. 하지만 그의 만면에도 희색이 가득했다. 곽연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에 일 남 일 녀가 있었다.
손을 흔들면서 달려오는 여인과 그 뒤를 따르는 노인.
종리연과 화노였다.
“다행이다.”
곽산의 뺨 위로 굵은 눈물방울이 흘러내렸다.
***
담호는 슬쩍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봤다.
손을 흔들며 뛰어가는 종리연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말처럼 환자는 함산에 있었다. 그래서 의도치 않게 이곳까지 동행하게 됐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 종리연은 내내 담호에게 호기심을 보였다. 하지만 담호는 단 한 번도 그녀에게 곁을 내주지 않았다.
어차피 헤어질 인연이었고, 그녀와 두 번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담호는 흑귀에 올라탔다.
이제 달릴 시간이었다.
흑귀가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담호는 흑귀에 몸을 맡겼다.
한참을 달리자 새하얀 자작나무 숲이 나타났다. 햇볕이 파고드는 자작나무 숲은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자그작! 자그작!
흑귀의 발굽이 바닥에 깔린 나뭇잎과 자갈 들과 부딪치면서 기묘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때였다.
피잉!
갑자기 날카로운 파공음이 자작나무 숲에 울려 퍼졌다. 동시에 담호가 손을 휘둘렀다.
촤앙!
쇳소리와 함께 바닥에 우그러진 화살이 나뒹굴었다. 일반적인 화살의 반도 안 되는 길이의 화살이었다.
퓨퓨퓩!
파공음이 다시 울려 퍼졌다.
담호는 흑귀를 박차고 허공으로 신형을 뽑아 올렸다. 날아온 화살은 그가 있던 공간을 헛되이 가로질렀다.
“가라.”
허공에 뜬 채 담호가 입을 열었다. 흑귀가 알아들었다는 듯이 홀로 자작나무 숲을 빠져나갔다. 그사이 담호가 바닥으로 착지했다.
그 순간 그의 주위로 둥그런 물체들이 날아왔다.
담호의 눈매가 좁아졌다. 화살처럼 빠른 속도로 날아온 것이 아니었기에 건들지 않고 추이를 지켜봤다.
푸스스!
바닥에 떨어진 둥근 물체들이 갑자기 녹색 연기를 뿜어냈다. 냄새를 맡는 순간 속이 매스껍고 두통이 밀려왔다.
‘독연?’
담호는 호흡을 멈추고 내공을 운용해 독기를 몰아냈다.
일대에 독연이 자욱하게 퍼져 나갔다. 그리고 자작나무 숲 곳곳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몸을 일으켰다.
하얀 자작나무와 그들의 검은 복장이 묘한 대조를 이뤘다. 그들의 전신에서는 날카로운 기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검객.’
그들이 허리에 검을 차고 있는 것으로 보아 검객이라는 사실은 확실했다. 그런데 그들은 단순히 검만 차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쇠뇌를 들고 있었고, 어떤 이들은 암기를, 또 어떤 이들은 창을 들고 있었다.
한 사람이 최소 두 개 이상의 무기를 들고 있었다.
그동안 강호를 종횡해 오면서 수많은 무인들을 봐 온 담호였지만, 이들처럼 한 번에 두 가지 이상의 무기를 가진 집단은 처음 봤다.
‘남궁세가인가?’
담호는 그들의 정체를 대번에 추측해 냈다.
그의 짐작처럼 새로이 나타난 이들은 남궁세가의 검왕대였다. 그들의 선두에 수천이 있었다.
수천이 담호를 향해 걸어왔다.
“드디어 따라잡았군.”
“…….”
담호는 대답 대신 수천을 빤히 바라봤다. 수천도 담호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 마주 바라보았다.
“네놈은 누구냐?”
“그것도 모르고 따라왔나?”
수천이 미간을 찌푸렸다.
산발하다시피 한 검은 머리에 다 찢어진 흑의, 그리고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위축되게 만드는 사나운 기세와 짐승의 눈.
“권마…… 맞나?”
담호가 대답대신 미소를 지었다. 안면의 근육을 살짝 움직이는 것도 미소로 볼 수 있다면 말이다.
“잘됐군.”
수천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남궁세가와는 이미 철천지원수가 된 담호였다.
담호 한 명으로 인해 남궁세가의 대계가 미뤄졌고, 남궁수가 죽었다. 그리고 수많은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어지간한 문파였다면 기둥뿌리가 흔들렸을 정도의 엄청난 피해였다. 그 때문에 남궁세가 내부에서 담호를 척살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왔지만, 행방을 알지 못해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그동안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었지만, 그것도 오늘로 끝이다. 네놈의 악행에 종지부를 찍어 주마.”
수천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검왕대가 기세를 피워 올렸다.
“이들은 본가의 정예인 검왕대다. 이제까지 네놈이 상대한 그런 허접한 자들과 비교했다가는 큰 코 다칠 것이다.”
“다들 그렇게 이야기했었지. 하지만 별거 없었어.”
“감히 검왕대를 그런 자들과 비교를 하다니.”
“너흰 다를 것 같아?”
담호가 물었다.
수천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담호의 말에 분노한 것이다.
“놈을 제압하라. 숨만 붙어 있으면 사지를 잘라내도 상관없다. 어서 놈을 제압해 신의와 함께 본가로 귀환한다.”
“존명!”
검왕대가 움직였다.
퓨퓩!
먼저 쇠뇌를 들고 있는 자들이 화살을 쐈다.
방아쇠를 당기자 수십 발의 화살이 담호를 향해 날아왔다. 인간의 힘으로 당기는 것이 아닌 기계식 장치로 날리는 화살이기에 위력이 몇 배나 강했다.
담호는 손을 휘둘러 화살을 쳐 냈다.
어둠 속에서 단련된 그의 안력과 감각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날아오는 화살들을 감지하고 있는 것이다.
후두둑!
담호의 발치에 화살이 수북이 쌓였다.
수천이 눈을 번뜩였다.
“제법이구나. 하지만 소용없다.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니까.”
퓨퓨퓩!
다시 쇠뇌가 화살을 뿜었다.
남궁세가의 장인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쇠뇌는 연속으로 발사할 수 있었다. 또한 화살촉과 몸통에 나선형의 홈이 파여 있어 발사되면 무서운 속도로 회전해 파괴력이 배가 된다.
쇠뇌를 쏘는 사람은 지치지 않는다. 대상을 겨누고 방아쇠만 당기면 되니까. 반대로 쇠뇌를 막는 사람은 신경이 바짝 곤두서고, 공포심에 근육이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카가강!
담호의 손이 어지럽게 허공을 휘저었다.
막고, 후리고, 튕겨 내는 일련의 동작이 눈 깜짝할 사이 이어졌다. 쇠뇌에서 발사된 화살은 부서지거나 우그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쇠뇌 공격은 다시 이어졌다. 거기에 암기 공격이 더해졌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미세한 세침이 공기를 타고 날아왔다.
검왕대는 무인의 집단이라기보다는 군대에 가까웠다. 그들은 검을 주 무기로 사용하고 있었지만, 쇠뇌와 암기, 기타 장병기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었다.
그들의 목적은 남궁세가에 위협이 되는 적을 제거하는 것.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체면보다는 효율을 중시하고, 개인의 감정보다는 남궁세가의 명예가 더 중요했다.
검왕대라는 이름과 달리 그들에게 검(劍)은 최후의 수단이었다.
담호는 그런 검왕대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이해했다.
이들은 무인이 아닌 군인이었다.
적을 분쇄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진 모든 무기를 사용할 줄 아는.
담호는 그런 존재를 또 하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위잉!
순간 담호의 몸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세하면서도 빠르게 흔들렸다.
초진동을 이용한 방호기공 방패가 펼쳐진 것이다.
후두둑!
담호에게 부딪쳤던 쇠뇌와 암기가 힘을 잃고 바닥에 떨어졌다.
모두가 경직된 그 찰나의 순간 담호가 충보를 펼쳤다.
투웅!
그의 몸이 공간을 갈랐다.
콰앙!
그리고 누군가 죽음을 맞았다.
권마와 검왕대의 역사에 남을 혈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