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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화 7장. 권마(拳魔)와 검왕(劍王)이 부딪치다(2)
세상엔 수많은 경공술이 존재한다.
풀잎을 밟고 달리는 초상비(草上飛), 물을 밟고 달리는 수상비(水上飛), 수복하게 쌓인 눈을 밟아도 흔적이 남지 않는다는 답설무흔(踏雪無痕).
불가능해 보이지만 현실에 존재하는 영역의 경공술이었다. 실제로 현 강호에는 그와 같은 경공술을 익힌 무인들이 존재했다.
하지만 그와 달리 사람들의 구전을 통해서만 전해지는 전설의 영역에 속해 있는 경공술도 존재했다.
허공을 평지처럼 걸어 다닌다는 허공답보(虛空踏步), 갈댓잎 하나로 흐르는 강물을 가로지른다는 일위도강(一葦渡江) 등이 바로 그것이었다.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지만 실제로 익힌 사람이 있는지 알 수 없는 전설의 경공술,
어검비행술(御劍飛行術) 역시 마찬가지로 전설의 한 자락을 차지하고 있는 경공술이었다.
검을 타고 비행하는 경지.
신선이나 되어야만 가능할 법한 불가해의 영역이었다.
그런 경지가 있다고는 전해지지만 실제로 어검비행술을 펼친 무인은 수십 년 이내 남궁천이 처음이었다.
“어, 어떻게?”
종리연의 안색이 파리하게 질렸다.
남궁천이 어검비행술로 날아올 수 있는 거리는 실제로는 오백여 장에 불과했다. 물론 그 정도만 해도 충분히 경악스러운 일이었다.
퍽!
순식간에 공간을 날아온 검이 담호의 바로 앞에 꽂혔다. 그리고 그 위로 남궁천이 살포시 내려앉았다.
얇은 검신이 잠시 살짝 휘는 듯하다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남궁천은 검 위에 서서 담호를 내려다보았다.
검 위에 우뚝 선 남궁천과 그를 올려다보는 담호. 그리고 파리한 안색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종리연. 그들의 주위로 정적이 내려앉았다.
남궁천은 팔짱을 낀 채 담호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전신에서는 절대자만이 가질 수 있는 위압적인 기파가 폭발적으로 발산되고 있었다.
남궁천의 눈에는 은은한 노기가 떠올라 있었다.
“권마, 맞느냐?”
그의 기세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사위를 압박했다.
남궁천의 분노는 활화산처럼 격렬하고 뜨거웠다. 그의 분노는 담호와 종리연을 향하고 있었다.
담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전신의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긴장을 하고 있었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상대의 무서움을 느끼고 반응하는 것이다.
머리카락이 온통 쭈뼛 일어서고, 소름이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강호에 나온 이래 그가 이렇게 긴장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남궁천의 눈빛은 마치 잘 벼려진 명검처럼 날카로웠으며,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세는 수천 개의 검을 마주한 듯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왜 대답이 없느냐? 권마냐고 물었다.”
“맞아!”
“드디어 만났구나.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 감히 본가에 큰 피해를 끼치다니.”
남궁천의 음성엔 살기가 물씬 묻어 나왔다.
담호는 말없이 남궁천을 바라봤다.
옷에 가려진 근육들이 꿈틀거렸다. 상대의 강함을 느끼자 본능적으로 그에 대항할 가장 최적의 상태를 찾아 조율하는 것이다.
남궁천의 시선이 종리연을 향했다.
“그리고 네년은 절대 이 자리에서 살아 나가지 못할 줄 알아라. 네년이 와 주지 않아 무진이 주화입마를 제때 치료할 시기를 놓쳤다. 그 죄는 네년의 목숨값에 비할 바가 아니다. 겨우 촌년 하나 때문에 본가의 후계자를 치료하길 거부하다니.”
“허윽!”
종리연이 대답 대신 하얗게 질린 얼굴로 몸을 떨었다. 그만큼 남궁천의 살기는 가공했다.
검왕이라 불리는 남궁천이었다. 최소한 검이라는 무기를 다루는 무인들 중에서는 최고봉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런 그의 살기를 일개 의원이 견딜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남궁무진이 주화입마에 듦으로써 남궁세가의 후계 구도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혼돈 속에 빠져들었다.
그나마 남궁수라도 살아 있었다면 후계 구도를 정리하기 수월했을 텐데, 그도 담호의 손에 죽고 말았다.
이래저래 담호는 남궁세가에 최악의 피해를 안겼다. 그 때문에 수백 년 역사의 남궁세가가 진흙탕 속에 빠져들었다.
단 일인 때문에 수십 년의 세월이 후퇴한 셈이다.
남궁천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그리고 그의 분노는 유형화되어 담호와 종리연을 압박했다.
쿵쾅! 쿵쾅!
담호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어찌나 거세게 뛰는지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담호는 강호에 나온 이후 최강의 대적을 만났음을 직감했다.
아직도 전신에 올라온 소름이 가시지 않고 있었다. 그만큼 남궁천의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
담호의 몸 상태가 정상이라고 해도 버거울 상대, 하물며 지금 담호는 검왕대와의 전투에서 얻은 내상도 완치되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담호는 좌절하지 않았다.
그간 거칠 것 없이 파격적인 행보를 해 왔지만, 언젠가는 이런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벽이 자신의 앞을 가로막아 선 순간이.
‘이기면 넘어설 것이고, 막혀서 쓰러지더라도 상관없어.’
복수를 끝낸 이상 세상에 남은 미련도 없었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아직 사부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는 것 정도.
뚜둑!
담호가 꽉 쥔 주먹에 힘을 주자 뼈마디가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가 남궁천을 자극했다.
“건방진!”
자신을 노려보는 담호의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좌절과 절망으로 가득해야 할 눈동자에 어린 패기와 도전적인 눈빛이 특히 그의 신경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 눈을 도려내 주마.”
남궁천이 허공으로 살짝 몸을 띄우며 이제까지 딛고 있던 검의 손잡이를 발로 툭 찼다.
가볍게 걷어찬 것 같았는데 검이 무서운 속도로 담호를 향해 날아왔다.
순간 담호가 전면을 향해 일격을 날렸다.
파성추였다.
쩌어엉!
주먹과 검이 부딪쳤는데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르륵!
담호의 몸체가 뒤로 밀려났다. 그가 발을 디딘 자리에 깊은 고랑이 생겨났다.
담호의 입가로 한 줄기 혈흔이 내비쳤다. 단 일격을 교환했을 뿐인데 엄청난 충격이 전신을 관통한 것이다.
휘리릭!
튕겨져 나간 검이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남궁천의 손으로 돌아갔다. 검을 잡자 남궁천의 기도가 일변했다.
“육시를 내 주마.”
그가 검을 앞세워 담호를 향해 날아왔다.
날카로운 기파가 해일처럼 밀려왔다.
담호가 이빨을 까득 갈았다. 무공을 익힌 이래 이렇게 상대에게 위압감을 느끼긴 처음이었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파앙!
그가 대지를 박찼다.
몸이 벼락처럼 튀어나갔다. 충보가 펼쳐진 것이다.
파성추가 뒤를 따랐다.
콰앙!
다시 한 번 폭음이 울려 퍼졌다.
보통의 상대라면 이 시점에서 큰 타격을 입지 않더라도 주춤했을 것이다. 하지만 남궁천은 달랐다.
쉬릭!
그의 몸이 부드럽게 회전을 하며 담호가 쏟아 낸 힘을 흘려보내며 전진했다.
쉬가악!
담호의 옆구리가 갈라지며 뼈가 드러났다. 피가 콸콸 쏟아지고, 담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검기나 검강을 쓴 것이 아닌 검의 묘용을 최대한 살린 일격이었다.
남궁천이 검을 크게 휘둘러 묻은 피를 털어 냈다.
“다들 권마라면서 벌벌 떠니 네놈이 강호 제일인 줄 알았더냐? 웃기지 마라. 사신제를 제외하더라도 현 강호에 네놈 따윈 가볍게 죽일 수 있는 무인만 십여 명이 넘는다. 네놈 따윈 아무것도 아니다.”
또다시 사신제라는 단어가 나왔다. 하지만 담호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신경 쓸 여유가 없다는 것이 옳았다.
그 순간에도 남궁천의 말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하잘것없는 쓰레기가 어디서 운 좋게 힘을 얻었다고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다니.”
남궁천이 다시 검을 들어 담호를 겨눴다.
눈부신 햇빛이 검에 갈라져 산산이 부서졌다. 부서진 햇살이 담호의 눈을 아프게 자극했다.
그 순간 남궁천이 다시 움직였다.
쐐애액!
검이 공기를 날카롭게 갈랐다.
남궁천의 검이 노리는 곳은 바로 담호의 인후혈. 격중당하는 순간 즉사다.
텅!
담호가 단양타의 일격으로 검을 쳐 냈다.
분명 손등으로 검신을 쳐 냈는데 상처가 생겨 피가 흘렀다.
남궁천이 미소를 지으며 다시 담호를 향해 검을 펼쳤다.
내지르고, 베고, 거두고, 단조로운 검초들이 연이어 펼쳐졌다. 언뜻 보기엔 평범한 검초 같았지만 남궁천의 손에서 펼쳐지니 그 어떤 신공절학보다도 위력적이었다.
피핏!
담호의 전신에 날카로운 자상이 늘었다. 그때마다 피가 튀고 전율스러운 통증이 담호의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독행류는 기본적으로 일직선을 이룬다.
절름발이라는 신체적 문제 때문에 현란한 보법을 익힐 수 없었기에 선택한 것이 충보였다.
충보는 성문을 파괴할 만큼 강력한 위력을 갖고 있지만, 대신 변화가 없어 단조롭다.
독행류는 충보를 기본으로 펼쳐지기에 변화가 적을 수밖에 없었다. 대신 일격의 파괴력은 여타 무공에 비할 바 없이 강력했다.
남궁천은 단 한 번 본 것만으로 충보와 독행류의 허실을 파악했다.
‘첫 번째 일격만 피하면 놈의 무공은 아무것도 아니다. 잘도 이런 무공으로 강호를 누볐구나.’
남궁천이 코웃음을 쳤다.
제왕검형을 완성한 남궁천의 경지는 이미 일대종사라고 해도 무방했다.
검기(劍氣), 검감(劍罡)?
못 써서 안 쓰는 것이 아니다.
쓸 필요가 없기에 안 쓰는 것뿐이다.
그따위 것을 사용하지 않고도 적을 죽이는 것이 충분하니까.
‘네놈은 최대한의 고통을 느끼다 죽어야 한다. 그것이 남궁세가에 대항한 벌이다.’
쉬익!
그의 검이 현란하게 허공을 갈랐다.
담호의 신형이 정신없이 뒤로 밀렸다. 강호에 나온 이래 이렇게 속절없이 밀려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만큼 남궁천의 검은 무서웠다. 허점을 보이는 순간 독사처럼 사정없이 파고들어 상처를 남겼다. 그 때문에 담호의 전신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아, 안 돼!”
그 모습을 지켜보던 종리연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담호는 검왕대와의 싸움에서 얻은 상처도 아직 완치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 상처를 입고서 검왕이라 불리는 남궁천과 싸운다는 것은 자살 시도나 마찬가지였다.
남궁천의 신형이 두 개, 세 개로 마구 불어났다.
남궁세가의 비전 보법인 무한신보(無限神步)를 펼칠 때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너무 빨리 움직이기에 잔상이 남아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쉬쉭!
남궁천의 검이 연신 공기를 갈랐다.
평범한 초식들이 모여 폭풍이 되었다. 폭풍은 담호의 몸을 금방이라도 집어삼킬 듯 거세게 몰아쳤다.
무한신보를 이용해 담호가 이동할 곳을 미리 선점하고 검을 날리는 것이 수없이 반복됐다.
담호가 할 수 있는 것은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방패를 펼치는 것뿐이었다. 초진동이 남궁천의 날카로운 공격에서 어느 정도 담호를 보호해 줬다.
“쯧! 재미없군.”
방패에 막혀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하자 남궁천이 혀를 찼다.
평범한 검식으로는 이 이상 담호에게 타격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인지한 것이다.
남궁천이 검을 쥐어 잡은 손에 공력을 주입했다.
우웅!
순간 검이 울음을 터트렸다.
검명(劍鳴)과 함께 그의 검이 불꽃을 피워 올렸다.
마치 폭발하는 화산처럼 강렬하면서도 뜨거운 불길은 이내 검의 형상을 만들어 냈다.
검강(劍罡).
자르지 못할 것이 없고, 부수지 못할 것이 없다는 경지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 목을 내놔라, 권마.”
쉬아악!
크게 원을 그린 남궁천의 검이 담호의 목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위험해요.”
보다 못한 종리연이 큰 소리로 외쳤다.
그 순간이었다.
쐐애액!
웅크리고 있던 담호의 몸이 용수철처럼 펴졌다. 기이한 곡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담호의 오른 다리.
쾅!
남궁천의 왼쪽 어깨에 담호의 발뒤꿈치가 작렬했다. 그에 남궁천이 큰 타격을 입고 뒤로 쿵쿵 물러났다.
백삼십 년 전 각법 하나로 홀로 강호를 주유했던 철혈패마(鐵血覇魔) 우경패의 독문절학인 혈천각이 펼쳐진 것이다.
담호가 어깨를 폈다.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내 목숨을 주머니 속의 물건 같은 싸구려로 취급하지 말라구.’
까득!
담호가 이빨을 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