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
172화 8장. 거센 바람이 불어와도 피 냄새를 지우지는 못한다(1)
우당탕!
담호가 거칠게 바닥을 굴렀다. 거의 십여 장이나 바닥을 구른 뒤에야 담호는 멈출 수 있었다.
“쿨럭!”
담호가 바닥에 엎어진 채 피를 토해 냈다. 그런 그의 얼굴엔 핏기 하나 없었다.
마치 거대한 절구로 찧은 듯 전신의 근육이 극한의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아직도 폐를 찌르고 있는 검 때문에 숨을 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
“흐으! 흐으!”
담호가 쇳소리를 흘리며 전방을 노려보았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 남궁천이 있었다. 남궁천 역시 바닥에 엎어진 채 거친 숨만 토하고 있었다.
그의 몰골 역시 담호 못지않게 처참했다.
한쪽 광대뼈가 함몰되어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고, 부서진 가슴뼈가 폐를 압박해 겨우 가쁜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담호의 육합혈산하는 그의 전신의 뼈 십여 개를 박살 냈다. 그나마 마지막 순간에 호신강기를 끌어 올려 겨우 이 정도에 그친 것이다.
맨몸으로 육합혈산하에 격중당했다면 벌써 숨이 끊어졌을 것이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때 담호가 몸을 일으켰다.
가슴에 검신이 박힌 채 몸을 일으키는 그의 모습은 남궁천으로 하여금 공포심까지 불러일으켰다.
담호의 몸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흐느적거렸다. 그런데도 용케 쓰러지지 않고 남궁천을 향해 걸어왔다.
그 지경이 되었어도 담호의 눈에 어린 살기는 전혀 누그러들지 않았다. 반드시 남궁천을 죽이고 말겠다는 의지가 그대로 표출되고 있었다.
“지……독한…….”
천하의 남궁천마저도 그런 담호의 독기엔 질리고 말았다.
그 역시 푸들거리면서 겨우 몸을 일으켰다.
어쩌다 보니 동패구상의 상황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앉아서 담호에게 당하고만은 있을 수 없었다.
“오냐! 오늘 끝을 보자. 쿨럭!”
남궁천이 애써 목소리를 높였지만 피를 토하고 말았다. 그만큼 그가 얻은 내상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담호가 다리를 절며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피로 물든 그의 모습이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악귀 같았다.
남궁천은 그런 담호의 모습을 눈에 담으면서도 진저리를 쳤다.
이제까지 살면서 단 한 번도 이런 악귀 같은 인간이 있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삼십여 년 전 상대했던 마교의 무인들 중에서도 이런 악귀 같은 존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놈을 살려 두면 후환이 끝이 없을 것이다.’
손이 덜덜 떨렸다.
그것이 담호에 대한 공포심 때문인지, 아니면 상처의 고통 때문인지 구별할 여유가 없었다.
스르륵! 쿵! 스르륵! 쿵!
담호 특유의 엇박자 걸음 소리가 남궁천의 가슴을 불길하게 자극했다.
“크윽!”
남궁천이 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하지만 공포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때였다.
“가주님!”
갑자기 저 멀리서 외침과 함께 일단의 무리가 이곳을 향해 달려왔다. 남궁천을 뒤따라온 남궁세가의 무인들이었다.
그들의 등장에 남궁천이 담호를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놈을 죽여랏.”
그의 목소리가 전장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방향을 바꿔 담호를 향해 달려갔다.
담호가 흐릿한 시선으로 남궁세가의 무인들을 바라봤다. 저들이 합류한 이상 그에게 남은 기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무서운 기세를 발산하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도 두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부.’
그저 현소진인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아쉬울 뿐.
담호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죽을 때 죽더라도 한 놈이라도 더 죽이고 죽을 것이다.
세상에 이름을 남기고 싶은 욕망 따윈 없지만, 그렇다고 포기하고 앉아서 쉽게 죽어 주고 싶지도 않았다.
‘와라.’
담호가 그렇게 마지막 투지를 불사를 때였다.
“바보 같은! 타요.”
갑자기 종리연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종리연이 흑귀를 탄 채 쇄도해 오고 있었다. 담호 앞에 멈춰 선 종리연이 그의 몸을 흑귀 위로 끌어올렸다.
“이럇!”
담호를 태우자마자 종리연은 흑귀를 몰아 전장을 빠져나갔다.
“멈춰랏!”
“젠장!”
뒤늦게 도착한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경공을 펼쳤지만 흑귀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흑귀는 순식간에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결국 남궁세가의 무인들은 담호를 쫓는 것을 포기하고 남궁천에게 달려왔다.
“괜찮으십니까? 가주님.”
“놈을 추적해.”
남궁천이 피를 토하며 외쳤다.
“예!”
“무슨 일이 있어도 놈을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이대로 살려 보내면 두고두고 큰 후환이 될 거야.”
충혈된 남궁천의 두 눈엔 광기가 가득했다.
남궁세가의 무인들은 광기 안에 깃든 한 줄기 두려움의 편린을 엿보았다.
‘가주께서 왜?’
‘설마 가주께서 권마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건가?’
남궁세가 무인들의 뇌리에 의문이 떠올랐다.
그 순간 남궁천이 다시 외쳤다.
“반드시 놈을 추적해 죽여랏. 무슨 수를 쓰더라도…….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결국 남궁세가 무인들이 힘껏 대답했다.
남궁천이 핏발 선 눈으로 담호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반드시 놈을 죽여야 한다. 살아 있다면 놈은 커다란 재앙이 될 것이야. 우웨엑!”
남궁천이 피를 토하며 기절했다.
“가주님!”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쓰러지는 남궁천의 몸을 부여잡았다.
***
“응?”
방진보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왜 그러니?”
황혜령이 그런 방진보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기분이 좀 이상해서요.”
“그래?”
“별거 아닐 거예요. 헤헤!”
방진보가 특유의 웃음을 흘렸다.
담호가 산을 내려간 이후 방진보는 황산에 남아 적응하고 있었다.
윤충과 조윤산의 반란 이후 황경문은 패왕채 녹림을 새롭게 정비하고 있었다.
반란에 동조한 자들과 마교의 잔당을 축출하고 믿을 수 있는 인물들을 새로 뽑았다.
그 때문에 패왕채와 녹림에는 한바탕 피바람이 휘몰아쳤다. 녹림을 휩쓴 피바람은 실로 무서워서 수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쳤다.
방진보는 그 모든 광경을 두 눈으로 보았다.
황경문은 무자비하게 배신자들을 응징했다. 패왕도라는 별호가 아깝지 않은 철혈 행보에 많은 녹림도들이 공포에 떨어야 했다.
그런 황경문의 행보를 두고 많은 말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방진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담호와 함께 천하를 주유했던 방진보였다.
이보다 더한 광경과 폭력도 목격했었다. 그 때문에 황경문이 그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받아들이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지만 적어도 이전처럼 무작정 거부감을 갖지는 않았다.
“가자!”
“어디를요?”
“아빠가 부르셔.”
“총채주님께서요?”
“응!”
황혜령의 대답에 방진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패왕채에 남은 지 벌써 한 달이 넘었지만 그동안 황경문이 자신을 찾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방진보는 황혜령을 따라 황경문의 거처로 향했다.
“어서 오너라.”
황경문이 방진보를 반가이 맞이했다.
“저를 부르셨다구요?”
“그래! 내가 줄 것이 있어서 말이다.”
“줄 거요?”
“그래!”
황경문이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철혈의 통치로 배신자들을 응징한 황경문이었지만 방진보를 바라보는 눈빛엔 인자함이 가득했다.
그가 품을 뒤져서 서책 하나를 꺼냈다.
“산채를 정리하다 보니 이런 게 나오더구나.”
“오행군자공(五行君子功)?”
“그렇다. 강호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오행의 기운을 이용하는 상승의 무공이다.”
“이걸 왜?”
“그가 그러더구나. 너에겐 오행의 기운을 다스리는 무공이 어울린다고.”
“형이요?”
“그래!”
방진보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담호가 이곳을 떠난 지 벌써 한 달이 넘었다. 그동안 담호를 부단히도 그리워했던 방진보였다.
말도 없이 떠났기에 조그만 원망도 했었는데 이렇게 끝까지 자신을 생각해 줬을 줄은 미처 몰랐다.
‘형!’
문득 담호가 보고 싶었다.
황경문이 방진보에게 오행군자공을 내밀었다.
“이것을 익히거라.”
“하지만 전 무공의 기초도 없는 걸요.”
“걱정하지 말거라. 내가 직접 가르쳐 줄 테니.”
“총채주님께서요?”
“그렇다.”
“하지만 번거로우실 텐데.”
“그에게 큰 은혜를 입었는데 이 정도는 해 줘야지. 마침 녹림 정리도 끝나고 했으니 지금이 딱 좋은 시기 같구나.”
“고맙습니다. 저 열심히 익힐게요.”
“그래야지.”
황경문이 감격하는 방진보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방진보가 오행군자공을 대성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상승의 무공이라는 것이 아무나 익힐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자신이 도와준다면 최소 오 성 이상의 성취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그 정도만 해도 강호에서 자신의 한 목숨 보존하는 덴 문제가 없을 것이다.
“내일부터 가르칠 테니 새벽 일찍 찾아오거라.”
“그럴게요.”
“이만 물러가 보거라.”
“예!”
방진보가 황경문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후 밖으로 뛰어나갔다. 방진보가 나가자 황혜령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시간을 낼 수 있겠어요?”
“없어도 내야지. 안 그러면 그 친구가 찾아올지도 모르는데.”
황경문이 가리키는 ‘그 친구’가 누군지 알기에 황혜령이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오라버니는 잘 있겠죠?”
“누가 감히 그를 어찌할 수 있을까? 잘 있을 거다. 걱정하지 말거라.”
“네!”
황혜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경문이 그런 황혜령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자신이 담가령이라는 사실을 알고 난 이후에도 황혜령은 변함없이 황경문에게 살갑게 대했다.
그런 딸이 고마우면서도 대견했다.
황혜령이 문득 물었다.
“녹림을 정비하는 일은 다 끝난 건가요?”
“그렇단다.”
“고생 많으셨어요.”
“생각보다 그들의 뿌리가 깊더구나. 그래서 더 많은 피를 봐야만 했다.”
황경문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런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피곤해 보였다.
수십 년을 녹림에 몸담아 온 황경문이었다.
그가 숙청한 이들은 모두 수십 년 동안이나 얼굴을 보아 온 사이였다. 그런 이들을 처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해야 했다.
윤충은 실로 오랜 세월에 걸쳐 녹림을 오염시켰다. 그들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서는 많은 피를 봐야 했다.
그런 일련의 행위들은 황경문을 무척이나 피곤하게 만들었다. 육체적인 피로가 아닌 정신적으로 지치고 타격을 입은 것이다.
“두렵구나.”
“뭐가요?”
“다른 문파에도 마교도들이 잠입해 있는 것이 아닌가 해서.”
“그건…….”
황혜령은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황경문이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갔다.
“녹림에 분 피바람은 미풍에 불과하다. 더 크고 흉포한 바람이 천하를 집어삼킬 게야. 그때를 대비해 힘을 비축해 놓아야 해.”
“아……빠!”
“그 중심에 분명 네 오빠가 있게 될 거다. 그는 자유롭게 살길 원하겠지만, 강호란 세상에 발을 디딘 이상 그것은 불가능한 일.”
황혜령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황경문이 그런 황혜령의 어깨를 두들겼다.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네!”
“그 어떤 환란도 그를 어찌할 수는 없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