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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174화 (17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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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화 8장. 거센 바람이 불어와도 피 냄새를 지우지는 못한다(3)

유례없는 혹한이 올겨울을 지배했다.

수십 년 내 최악이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였다. 눈은 어른 키보다 높이 쌓였고, 기온은 사정없이 떨어져 동사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그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출을 자제하고 집안에만 처박혀 있어야 했다. 눈이 가득 쌓인 거리엔 인적이 끊겼다.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외부활동을 자제하고 있었지만, 단 한 부류만은 달랐다.

무인, 혹은 강호인이라고 불리는 이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지난겨울 무림맹과 마교는 중원 곳곳에서 격돌했다.

그중에서 가장 큰 충돌은 바로 감숙성 백은(白銀)에서 일어났다. 백은 감숙성의 성도인 난주 지척에 있는 큰 현이었다.

무림맹은 백은에 지부를 설치했는데, 이곳을 마교의 무인들이 습격한 것이다.

당시 백은 지부에는 사백여 명의 무인들이 있었는데, 천 명이 넘는 마교의 무인들이 급습했다.

처음엔 당연히 마교가 우세했다. 수적으로도 질적으로도 마교가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이다.

마교의 거칠 것 없는 대공세 앞에 백은 지부는 몰살당할 위기에 처했다. 그때 백은 지부를 지원한 곳이 있었으니 바로 같은 감숙성에 자리를 잡고 있는 공동파였다.

공동파에서는 오백 명의 정예를 보내 백은 지부를 도왔다. 그에 겨우 백은 지부는 마교를 물리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하지만 마교는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전력을 재정비한 마교는 다시 백은 지부를 공격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면서 사상자는 급속히 늘었다. 백은 지부는 다시 위기에 처했다.

이때 종남파의 지원 병력이 백은 지부를 공격하던 마교의 배후를 기습했고, 마교는 큰 피해를 입은 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마교를 물리치긴 했지만 무림맹과 공동파, 종남파가 입은 피해는 실로 엄청났다. 무려 천여 명에 달하는 무인들이 죽거나 다친 것이다.

백은에서 벌어진 마교와의 전쟁이 천하에 던져 준 충격은 그야말로 엄청난 것이었다.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고, 감숙성의 경제는 마비가 되었다.

백은 외에도 곳곳에서 무림맹과 마교는 충돌했다.

하얀 눈은 피로 붉게 물들었고, 부상당한 무인들의 신음성이 하늘에 울려 퍼졌다.

강호인들은 알고 있었다. 이게 겨우 시작임을.

십리무생 소천산을 비롯한 마교의 수뇌부들은 아직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 진정한 정마대전의 시작이었다.

그때가 되면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을지 감조차 잡히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게 천하는 혼란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무림맹과 강호의 문파들은 생존을 위해서 그 어느 때보다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게 모두가 분주히 움직일 때 정반대의 노선을 취한 문파가 하나 있었다. 바로 오대세가 중 하나인 남궁세가였다.

남궁세가는 어떻게 된 일인지 대문을 걸어 잠그고 외부에 나가 있던 세가의 무인들을 모조리 불러들였다. 그리고 무림맹에 파견 나가 있는 병력도 최소한으로만 유지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권마와 격돌로 큰 피해를 입었다고 했다. 남궁세가의 비밀조직인 검왕대가 몰살을 당하고, 가주인 남궁천마저 중상을 입었기에 어쩔 수 없이 취해진 조치라고 했다.

사람들은 진실을 궁금해 했지만 남궁세가는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에 사람들은 소문이 사실일 거라고 추측했다.

사람들은 이제 권마 담호의 행보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정작 소문의 당사자인 담호는 어쩐 일인지 강호에서 감쪽같이 모습을 감췄다.

담호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이름은 이제 강호 최정상에 자리를 잡았다.

사람들은 담호를 구대문파의 장문인과 동격, 혹은 그보다 높은 존재로 인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담호는 강호의 전설이 되어 가고 있었다.

삭주(朔州)는 산서성(山西省) 북쪽에 위치해 있다. 비록 성도인 태원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관도와 수로가 잘 발달되어 있어 산서성에서도 주요 도시에 속했다.

하지만 그런 지리적인 중요성과 달리 삭주는 무척이나 황량했다. 몽골과 인접한 북쪽 끝에 위치한 데다가 척박한 대지 때문이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삭주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지 않았었다. 하지만 작년 겨울 이곳에 무림맹의 지부가 들어서며 사정이 변했다.

무림맹은 산서성의 중요성을 감안해 이곳에 지부를 만들었고, 수많은 물자와 인력을 투입했다.

물자와 인력이 들어오니 돈이 돌았고, 돈이 돌다 보니 그를 쫓아 상인들과 기녀들이 들어왔다. 덕분에 삭주는 순식간에 환락의 도시로 변모했다.

거리를 돌아다니다 보면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는 이들이 무인들이었고, 또 그런 무인들을 홍등을 밝힌 기루의 기녀들이 유혹했다.

무림맹 삭주 지부는 삭주 외곽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담장의 높이만 해도 이 장이 넘었고, 둘레는 백여 장에 달해 조그만 성을 연상케 했다.

정문엔 십여 명의 무인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는데, 눈빛과 기세가 보통 살벌한 것이 아니었다.

백은 지부의 전투는 이곳에도 알려졌다. 그 때문에 삭주 지부의 경계 태세는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무인들의 얼굴에 경계의 빛이 떠올랐다.

저 멀리 삭주 지부를 향해 다가오는 일단의 무인들 때문이었다. 삭풍을 막기 위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으로 꽁꽁 동여 싼 십여 명의 무인들의 등장에 그들은 긴장을 했다.

‘마교인가?’

제일 먼저 든 생각이었다.

무기를 잡은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맨 뒤에 있는 이는 비상 호각을 불 준비를 했다.

조장이 낯선 무인들을 향해 소리쳤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삭주 지부로 다가오던 무인들이 걸음을 멈췄다. 그들 중 한 명이 얼굴을 가린 천을 내리며 말했다.

“우리는 화산파에서 나온 무인들이오.”

“화산파?”

“그렇소! 나는 화산파의 일대제자인 운경이라고 하오.”

“운경? 정말 화산파에서 나오셨습니까?”

조장의 목소리가 살짝 낮아졌다.

구대문파, 그중에서도 화산파의 일대제자가 갖는 위치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조장은 구대문파와 오대세가의 인명부를 외우고 있었기에 운경이 화산파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대사형 무경의 사제이자 화산파의 지낭.’

분명 머지않은 시일 안에 무경은 화산파의 문주가 될 것이다. 그때 운경도 화산파의 장로가 될 것이 분명했다.

조장으로선 감히 넘볼 수도 없는 지고한 신분이었다.

운경이 화산파의 제자임을 상징하는 신물을 조장에게 던졌다.

‘정말이구나.’

조장이 침음성을 흘렸다.

그가 신물을 공손히 돌려주며 말했다.

“확인했습니다. 운경 도장. 삭주엔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신지요?”

“산서성에 왔다가 도움을 받을까 해서 들렀소이다.”

“도움이시라면?”

“안에 들어가서 지부장을 뵙고 말씀드리고 싶소만.”

“아!”

무심코 물어보던 조장이 얼굴을 붉혔다.

상대는 화산파의 장로가 확실시 되는 지고한 신분이었다. 신분을 확인하고서도 그를 이곳에서 세워두는 것 자체가 큰 결례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고맙소!”

운경이 조장을 따라 삭주 지부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화산파의 제자들이 따랐다.

운경이 삭주 지부 내부를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곳곳에 보이는 무인들의 눈빛이 살아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조장은 운경과 화산파의 무인들을 빈객청으로 안내했다.

“이곳에서 기다리시면 될 겁니다.”

“고맙소!”

“그럼!”

조장이 서둘러 밖으로 달려 나가고 화산파 제자들만이 빈객청에 남았다.

“휴!”

그제야 운경이 한숨을 쉬었다.

그의 한숨을 신호로 화산파 제자들이 이제까지 입과 코를 가리고 있던 천을 풀었다.

“후!”

“정말 지독하군요. 이런 곳에서 사람이 어찌 사는지.”

제자들이 한마디씩 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화산에서도 경험하지 못했던 혹한을 온몸으로 감당해야 했기에 고초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화산파 제자들이 떠들 때 방문이 열리며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늘씬한 교구의 아름다운 여인. 이제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인의 등장에 운경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알기로 삭주 지부의 지부장은 사십 대 장년의 무인이었기 때문이다.

여인이 운경에게 포권을 취했다.

“해남파의 해소월이 귀빈을 뵙습니다.”

“아! 해 소저셨구려. 본인은 화산파의 운경이라 하외다.”

운경도 마주 포권을 취했다.

눈앞에 있는 여인은 강호 최고의 후기지수라는 구무룡의 일원이었다. 작년에 산서성에 파견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설마 아직까지 이곳에 있을 줄은 그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지난여름 해소월은 마교의 근거지를 찾는 임무를 가지고 이곳 삭주로 왔다. 휘하의 제자들과 함께 몇 달을 산서성 북방을 헤매고 다녔다.

하지만 어디서도 마교의 근거지를 찾을 수는 없었다. 산서성 남부를 뒤지고 다니던 초연운과 백전문의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몇 달을 허탕 친 그들은 바로 무림맹 본단으로 복귀하려 했다. 하지만 무림맹에서 이곳에 지부를 설치하기로 결정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무림맹에서는 삭주 지부가 안정이 될 때까지 해소월에게 삭주에 남아 있기를 명했다. 그 때문에 해소월은 본의 아니게 이곳에서 겨울을 나야 했다.

평생 따뜻한 해남에서 살아왔던 해소월과 해남파의 제자들에게 혹독한 북방의 생활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교가 언제 급습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개인의 이유를 들어 거부할 수도 없었다.

그것이 지금 해소월이 이곳에 있는 이유였다.

“지부장은 어디 가고 해 소저가?”

“잠시 자리를 비우셔서 제가 대신 임무를 맡고 있습니다.”

해소월의 입가에 잠시 쓴미소가 떠올랐다.

이곳에서 벌써 몇 달째 허송세월을 하는지 몰랐다. 하지만 지부장이 그다지 유능한 사람이 아니기에 계속해서 발목이 붙잡히고 있었다.

검객으로 자유롭게 강호를 주유하며 살고 싶었지만, 강호란 세계는 계속해서 그녀에게 큰 책임을 강요하고 있었다.

표정을 수습한 해소월이 물었다.

“그런데 화산파에서 연락도 없이 이곳엔 어인 일이신지?”

“도움을 받을 일이 있어 이렇게 염치불구하고 찾아왔소이다.”

“화산파의 요청이라면 당연히 도와드려야지요.”

“혹시 이곳에 청류곡이라는 곳을 아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곳을 찾아야 하는데 저희는 이곳 지리를 잘 알지 못해서.”

“청류곡?”

해소월이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어디선가 한 번 들어 본 듯한 단어였기 때문이다.

한참을 기억을 더듬던 해소월은 마침내 어디서 들었는지 떠올렸다.

‘북계산 청류곡.’

해소월이 눈을 빛냈다.

북계산은 삭주 외곽에 위치한 제법 높은 산이었다. 그곳 북쪽에 있는 조그만 계곡 이름이 청류곡이라고 들었다.

“아시는 모양이군요?”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잘됐군요. 저희를 그곳까지 안내해 주시겠습니까?”

“안내해 드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청류곡을 왜 찾는지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곳에 저희가 찾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누군지 알 수 있을까요?”

“아직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분이 그곳에 있는지 확실한 게 아니라서. 하지만 그곳에 있다면 절로 아시게 되실 겁니다.”

“알겠습니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해 소저.”

운경이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바로 가시죠.”

해소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부장이 자리를 비우면서 본의 아니게 계속해서 지부 내에서만 있어야 했기에 꽤나 답답하던 차였다.

해소월은 지부 밖으로 나오자마자 경공술을 펼쳤다. 운경과 화산파 제자들도 경공을 펼쳐 그녀의 뒤를 따랐다.

청류곡은 북계산에서도 무척 은밀한 곳에 숨겨져 있었다. 안내자 없이 왔다면 몇 날 며칠을 헤매야 했을 것이다.

해소월과 화산파 제자들은 청류곡을 거슬러 올랐다.

겨울이 아직 끝나지 않아 모든 것이 삭막했지만, 봄이 오고 꽃이 핀다면 무척이나 아름다울 듯싶었다.

‘청류곡이 이런 곳이었나?’

해소월조차도 청류곡의 풍경에 감탄을 했을 정도였다.

화산파의 제자가 계곡 가에 있는 모래사장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여기 사람의 흔적이 있습니다.”

모래사장에 사람의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여기도 있습니다.”

다른 제자도 사람의 흔적을 찾아냈다.

운경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으음! 정말 이곳에 계신건가?”

그때였다.

“사백님! 저기…….”

제자 중 한 명이 갑자기 큰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제자가 가리킨 방향을 보니 제법 널따란 공터가 보였다.

공터에는 십여 명의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와아아!”

아이들의 활기찬 목소리가 계곡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들의 중앙에 그가 아는 얼굴의 노인이 보였다.

“사, 사숙?”

운경의 목소리가 계곡에 크게 울려 퍼졌다. 그러자 노인이 고개를 들어 운경을 바라봤다.

노인의 눈동자가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크게 흔들렸다.

“운경이냐?”

“현소 사숙.”

노인의 도호는 현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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