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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175화 (17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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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화 8장. 거센 바람이 불어와도 피 냄새를 지우지는 못한다(4)

공터의 한쪽에는 조그만 모옥이 있었다.

현소 진인과 운경, 화산파의 제자들이 들어가자 조그만 모옥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했다.

밖에서는 해소월이 아이들과 함께 놀아 주고 있었다. 남루한 복장의 아이들은 해소월을 신기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선녀처럼 예쁜 여인이 검을 차고 있으니 당연히 신기하고 보일 수밖에 없었다.

“누나는 무림인이에요?”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아이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해소월은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난감함을 느꼈다.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이 못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한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이제 겨우 네다섯 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 여아였다. 삐쩍 마른 데다가 얼굴에도 병색이 완연한 아이는 말없이 해소월의 소매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해소월이 여아를 안아들며 물었다.

“네 이름은 뭐니?”

여아는 대답대신 불안한 눈동자로 해소월을 바라봤다.

“하, 할부지 데려갈 거야?”

“할아버지?”

해소월의 시선이 모옥으로 향했다.

창문 너머로 화산파의 제자들과 마주앉아 있는 현소 진인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이 무슨 대화를 하는지 이곳에서는 들리지 않았다.

“정말 할부지 데려가려 온 거예요?”

“안 돼! 으아앙!”

여아의 물음에 다른 아이들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울음은 금방 전염이 되고 십여 명의 아이들이 모두 울기 시작했다.

“애, 애들아!”

해소월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현소 진인이 운경을 바라보았다. 운경은 그의 시선을 감히 마주 볼 수 없어 고개를 숙였다.

운경은 침묵의 시간이 견딜 수 없을 만큼 길게 느껴졌다.

한참을 운경을 바라보던 현소 진인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곳은 어떻게 찾았느냐?”

“속가제자들을 총동원했습니다. 그중 한 명이 사숙과 비슷한 분을 산서성에 보았다고 하더군요.”

“음!”

“산서성을 파고들다 보니 사숙 같은 분이 청류곡이라는 곳에서 고아들을 키우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리더군요. 그래서 혹시나 해서 와 본 겁니다.”

“고생이 많았겠구나.”

현소 진인의 담담한 목소리에 운경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바라봤다.

“사숙! 죄송합니다.”

“뭐가 말이냐?”

“천경을 버린 것……. 정말 죄송합니다.”

지난 십삼 년 동안 가슴 속에 꾹꾹 담아 두었던 말이었다. 사제를 버리고 왔다는 생각에 잠을 못 자기 일쑤였었다.

언젠가 현소 진인에게 사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아 미뤄 왔었다.

운경의 말에 현소 진인이 잠시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아직도 그의 가슴에 대못처럼 박혀 있는 이름 하나.

담호.

그의 유일한 제자였고, 자식이었던 그 이름.

담호를 잃은 후 현소 진인의 세상은 무너졌다.

한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절망 속에서 지냈다.

그가 정신을 차린 것은 담호를 잃고 거의 이 년이 지난 후였다. 그 긴 시간 동안 화산파에서는 단 한 명도 그를 찾아오지 않았다.

그 후로 또 몇 년을 혼자 지냈다.

수많은 도경을 읽으면서 마음을 추스르려 했다. 하지만 상처 입은 마음은 쉬이 아물지 않았고, 심신이 피폐해져만 갔다.

그때까지도 화산파에서는 누구 한 명 찾아오지 않았다.

그제야 현소 진인은 자신이 화산파에서 잊혀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저 헛웃음만 났다.

평생을 화산을 위해서 살아오고, 화산을 사랑했는데 혼자만의 외사랑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길로 현소 진인은 화산을 내려왔다.

자신이 화산파의 도사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더 이상 화산에 있기 힘들었다.

정처 없이 천하를 떠돌았다.

자신의 제자는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데 세상은 여전히 잘 돌아가고 있었다. 그 평범한 일상이 현소 진인의 가슴을 더 아프게 만들었다.

현소 진인은 그렇게 아픈 가슴을 보듬어 안은 채 천하 곳곳을 주유했다. 그 과정 중에 수많은 이들을 만났다.

비렁뱅이도 있었고, 병자도 있었고, 가슴 아픈 사연의 소유자도 있었고, 난리 통에 부모를 잃은 고아들도 있었다.

화산에 있었다면 절대 만나지 못했을 그런 사람들이었다.

현소 진인은 그들의 사연에 슬퍼하고, 웃고, 공감했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치유되었다.

현소 진인은 그제야 깨달았다.

진정한 도(道)란 산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낄 때야만 진정한 도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부터 현소 진인은 본격적으로 세상에 뛰어들었다.

몇 날 며칠을 굶어서 구걸을 하기도 했고, 악인을 제도하기도 했으며, 사기도 당해 봤으며, 험하다는 뱃일도 했다. 그렇게 세파에 자신을 내던지며 수많은 사람을 겪고 경험했다.

인간 현소 진인은 세상을 알고, 사람을 알고, 자신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고,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의 주위엔 십여 명의 어린 아이들이 있었다. 부모를 잃고 천하를 떠돌던 아이들을 하나 둘 거둬들이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혼자서 십여 명의 아이들을 키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안정적인 환경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곳 청류곡으로 들어왔다.

현소 진인은 아이들의 해맑은 얼굴에서 담호를 보았다. 그래서 더욱 사랑을 주고 아끼며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현소 진인이 손을 뻗어 운경의 어깨를 다독였다.

“괜찮다. 그것이 어찌 너 혼자만의 잘못일까? 그냥 운이 없었던 거야. 그 아이의 운이 거기까지였던 게지.”

“사……숙!”

현소 진인의 따뜻한 말에 운경의 어깨에 잔 경련이 일어났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눈물이 났다.

“흐흑!”

운경이 울었다. 그리고 현소 진인은 그런 운경을 따뜻하게 보듬어 안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화산파 무인들의 얼굴에 숙연한 빛이 떠올랐다.

운경 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근엄, 냉철, 차가운 이지 같은 것들이었다.

화산파에서 운경은 대사형 무경을 보좌하면서 누구보다 냉철하고, 차가운 이성으로 화산파가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자였다.

그는 단 한 번도 제자들 앞에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 준 적이 없었다.

그 때문에 모두가 그를 어려워하고 존경했다.

그런 운경이 무방비 상태로 현소 진인의 품에 안겨 울고 있었다. 그 생소한 모습이 화산파 제자들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잠시 후 운경이 감정을 수습하고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사숙!”

“장문인이 보냈느냐?”

“그렇습니다.”

“장문인은 여전히 건강하시지?”

“그렇습니다.”

“다행이구나.”

현소 진인이 미소를 지었다.

티끌 한 점 없는 순수한 그의 미소를 운경은 잠시 넋을 잃고 바라봤다.

외모는 여전히 그가 아는 현소 진인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낯설게 느껴졌다.

더 넓어지고, 깊어진 느낌. 마치 그의 등 뒤로 은은한 후광이 비추는 것 같았다.

화산에 있는 도력 깊은 장로들에게서도 이런 느낌은 받지 못했다.

‘어떻게?’

의문이 들었지만, 지금은 장문인의 말을 전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장문인께서는 사숙이 화산으로 다시 돌아오시길 바랍니다.”

“이제 와서 사형이 나를 찾다니? 화산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이냐?”

“그게…….”

운경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보며 현소 진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 있구나?”

“듣지 못하셨습니까?”

“무얼 말이냐?”

“천……경 말입니다.”

“천경? 지금 호를 말하는 것이냐?”

“듣지 못한 모양이시군요.”

“어서 말해 보거라.”

이제까지 굳건하게 유지되던 현소 진인의 평정심이 화강암에 내던져진 사기그릇처럼 산산이 깨졌다.

“천경……. 살아 있습니다.”

“그게 무슨?”

“진짜입니다. 어떻게 해서 그곳에서 살아남았는지 모르지만 그는 멀쩡히 살아 있습니다.”

“정말이냐? 정말 호가 살아 있느냐?”

“그렇습니다. 권마 담호. 현 강호에서 가장 유명한 무인입니다.”

“권마라고?”

“그렇습니다.”

“무시무시한 별호구나.”

“별호만큼 실력도 무시무시합니다. 강호의 최고수들이 그의 손에 무수히도 쓰러졌으니까요.”

“그렇구나.”

현소 진인은 더 이상 놀라지 않았다. 그런 현소 진인의 모습이 의외였는지 운경이 물었다.

“놀라지 않으십니까?”

“그 아이는 어려서부터 특별한 구석이 있었다. 끝없이 강함을 추구했고, 한 번 정한 목표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만큼 끈질겼다. 다리를 조금 저는 것? 그건 호에게 장애가 되지 못한다.”

“불행히 그런 사실을 아는 사람은 사숙밖에 없었죠.”

“편견이 눈을 가렸기 때문이란다. 부족한 자는 완성될 수 없다는 편견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원하는 것만 얻으려는 자들은 결코 그런 진실을 알아볼 수 없지.”

“저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지요.”

운경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절름발이기에 모든 상황에서 배제시키려고만 했지, 담호를 믿어 주지 못했다. 딴에는 그것이 담호를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하면 그것은 결국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장문인이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화산으로 다시 돌아오시길 바랍니다.”

“화산으로? 호 때문이더냐?”

“…….”

운경은 대답할 수 없었다.

현소 진인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렇구나. 장문인은 예전부터 화산파의 전력을 끌어 올리는 일이라면 뭐든지 했지. 그의 눈에는 호가 쓸 만한 도구로 비춰진 모양이구나.”

“죄……송합니다.”

“네가 죄송할 게 무에 있느냐? 장문인의 생각이 그러한데.”

“사숙!”

“나는 화산으로 돌아가지 않겠다.”

현소 진인의 선언에 운경이 화들짝 놀랐다. 설마 이렇게 단호히 화산으로 돌아가길 거부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숙…….”

“화산은 나의 고향이다. 언젠가는 돌아가야 하겠지. 허나 제자를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가 되기 위해 돌아가지는 않겠다. 그것이 나의 의지다.”

“사숙,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내 생각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못난 사부 때문에 인고의 길을 걸어야 했던 제자다. 또다시 나 때문에 제자가 그 험난한 길을 걷길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이미 호에게 자유롭게 살라고 말했다. 그 아이는 더 이상 화산의 제자가 아니다. 그러니 그 어떤 누구도 그 아이를 화산에 구속할 수는 없다.”

현소 진인의 음성엔 결코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 어려 있었다.

화산에 있으면서 단 한 번도 다른 누군가에게 목소리를 높여 본 적이 없는 현소 진인이었다. 그런 이가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이니 절로 위압감이 느껴졌다.

“때가 되면 내 발로 화산을 찾을 것이다. 그때까지 나를 내버려 두거라.”

“사숙!”

현소 진인이 더 할 말 없다는 듯이 눈을 감았다. 그에 운경의 얼굴에 난감한 표정이 떠올랐다.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힘으로 하자면 얼마든지 현소 진인을 데려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소 진인은 그의 사숙이었다. 함부로 손을 델 수도 없을뿐더러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만 돌아가거라.”

“사숙, 전 삭주를 떠나지 않을 겁니다. 무림맹 삭주 지부에 머물 테니 생각이 바뀌시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

“다시 찾을 때까지 강녕하십시오.”

운경과 화산파 제자들이 현소 진인에게 포권을 취한 후 밖으로 나갔다.

혼자 남게 되자 현소 진인이 눈을 떴다. 그런 그의 눈가엔 물기가 고여 있었다.

“살아 있었구나, 호야. 고맙다. 그렇게 살아 있어 줘서.”

늙은 사부의 뺨을 따라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현소 진인의 시선이 남쪽 하늘을 향했다.

구름이 시대의 격류를 타고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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