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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화 1장. 세월은 새로운 인연을 만나게 한다(1)
하남성 신양(信陽)은 대별산 자락에 자리를 잡고 있는 도시로 예로부터 차로 유명했다. 이곳에서 재배하는 차는 모첨차(毛尖茶)라 하여 중원에서도 손꼽히는 명차에 속했다.
신양에는 또 남만호(南灣湖)라는 호수가 유명했는데, 항주의 서호보다 무려 열두 배나 더 큰 데다가 예순한 개의 크고 작은 섬들을 품고 있었다.
비췻빛 맑은 호수 물과 푸른 진주처럼 푸른 숲이 가득한 섬은 환상적인 조화를 이뤄, 보는 이들의 가슴속까지 시원하게 만들었다.
남만호에서도 가장 심처에 위치한 조그만 섬. 남만호에서 어업을 하는 어부들이 아니면 알 수 없을 정도로 은밀한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조그만 섬은 다른 섬들과 마찬가지로 푸른 숲이 울창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때문에 밖에서 보아서는 섬 안의 상황을 절대 알 수 없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다고 알려진 섬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섬 안에는 언제부턴가 일 남 일 녀가 머물고 있었다.
급하게 만든 것처럼 초라한 모옥 한 채.
모옥 앞에는 조그만 평상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 묘령의 여인이 앉아 있었다.
“흐흥!”
콧노래를 부르며 물이 끓는 주전자를 바라보는 여인은 바로 종리연이었다.
종리연은 마침내 물이 끓자 차를 우려 조금씩 홀짝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맛있단 말이야.”
그녀가 마시고 있는 차는 바로 신양의 특산품인 모첨차였다.
지난겨울 이곳에 들어온 이후 종리연은 모첨차를 입에 달고 살았다.
모첨차는 입맛이 까다로운 그녀의 기호에도 딱 맞아떨어졌다. 덕분에 이곳에 머무는 동안 입이 즐거웠다.
종리연은 모첨차를 마시면서 우거진 숲을 바라봤다.
“오늘도 안 나오려나?”
담호가 숲으로 들어간 지도 벌써 석 달째였다. 그동안 그는 단 한 번도 숲 밖으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휴!”
종리연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차를 마셨다.
그들은 남궁세가의 추적대를 피해 이곳까지 도주했다. 추적대에 몇 번이나 붙잡힐 뻔했지만 그때마다 종리연의 기지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당시 담호는 거의 빈사상태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담호는 그런 최악의 몸 상태로도 추적대의 우두머리를 죽였다. 결국 남궁세가는 추적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남궁세가의 추적을 뿌리친 이후 그들은 이곳으로 숨어들어 왔다. 하남성은 소림사의 영역, 남궁세가의 영향력이 통하지 않는 곳이었다.
남궁세가에서는 소림사의 협조를 요청했고, 소림사도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추적에 합류했다. 하지만 남만호에 숨어든 담호와 종리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는 없었다.
겨울이 오고 많은 눈이 내리면서 결국 그들은 추적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담호는 종리연의 신묘한 침술의 도움을 얻어 빠르게 몸을 회복했다. 몸을 어느 정도 회복하자 그는 숲 안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남궁천과의 싸움은 담호의 투지에 불을 지폈다. 지금의 무력으로는 남궁천보다 더 강한 자들을 상대할 수 없다는 위기감이 그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가끔씩 숲 저 너머에서 소름 끼치는 살기가 발산되곤 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종리연도 진저리를 칠 정도로 강력한 살기가.
“휴!”
종리연은 그런 담호의 집념에 기가 질린 상태였다.
그녀는 단 한 번도 담호처럼 집요하면서도 맹목적인 남자를 본 적이 없었다.
“도대체 어떤 과거를 가져야 저렇게 집념이 강할 수 있을까?”
종리연 역시 무척이나 집중력이 강한 편이었지만, 담호처럼 미친 수준의 몰입도를 보일 순 없었다.
다시 차 한 잔을 우렸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그녀도 쉬고 있지만은 않았다. 의술에 대해 더 공부하고 침술을 완숙한 경지로 펼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 덕분에 그녀의 실력 역시 일취월장한 상태였다.
종리연이 찻잔을 입으로 가져갈 때였다.
콰아아!
갑자기 강렬한 기파가 폭풍처럼 수풀 전체를 휩쓸며 종리연까지 덮쳤다.
“꺄아악!”
기파에 직격당한 종리연이 비명을 지르며 찻잔을 떨어트렸다. 그녀의 머리는 온통 헝클어지고, 안색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도대체?”
종리연이 두려운 시선으로 기파의 근원을 바라봤다.
담호가 있던 숲 속이다.
이제까지 담호가 있던 숲에서는 항상 사나운 기파가 들끓었었다. 그 때문에 종리연은 감히 그쪽으로는 접근할 엄두도 내지 못했었다.
그런데 방금 전 폭풍처럼 휩쓸고 지나간 기파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사나운 기파는 느껴지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그녀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정적이 숲 속에 내려앉았다. 바람마저 멈춘 것 같았다.
종리연은 숨을 멈춘 채 숲을 바라보았다. 잠깐의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순간 종리연의 눈이 크게 치떠졌다.
숲 속에서 담호가 걸어 나왔기 때문이다.
‘달라졌어.’
종리연은 한눈에 담호가 달라졌음을 알아차렸다.
담호의 전신에서는 기이한 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던 열기는 신기루처럼 금방 사라졌다.
짐승처럼 포악하고 열기로 가득하던 눈빛은 마치 얼음장처럼 차갑게 변해 있었다. 그래서 더 무섭게 느껴졌다.
담호가 종리연이 앉은 평상으로 걸어왔다. 종리연이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나, 나왔어요?”
“음!”
“수련은 모두 끝난 건가요?”
“대충은.”
담호가 건성으로 대답하며 평상에 앉았다.
종리연은 그에게 방금 우린 차를 건넸다.
“이것 좀 마셔요.”
갓 우린 차라 향긋하기 그지없었다. 담호는 뜨거운 차를 조금씩 마셨다.
“좋군!”
“모첨차라고 해요. 천하에서도 알아주는 명차예요.”
“그런가?”
“부상은…… 모두 회복된 건가요?”
“그래!”
“그럼 이곳을 떠나겠네요?”
종리연이 기꺼운 표정을 지었다.
본의 아니게 겨울을 이곳에서 보내야 했던 종리연이었다.
비록 남궁세가의 추적을 뿌리쳤다고 하지만 아직은 안심할 단계가 아니었다. 행여 그들의 손에 걸렸다가는 어떤 꼴을 당할지 불 보듯 명확했다.
최소한 하남성을 벗어나기 전까지는 담호와 함께해야 했다.
“언제 떠날 건가요?”
“지금!”
“알았어요.”
담호의 대답을 듣자마자 종리연이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짐이라고 해 봐야 조그만 봇짐이 전부였다. 봇짐 안에는 여벌의 옷과 은침이 들어 있었다.
“가요.”
종리연이 봇짐을 등에 맨 채 말했다.
담호는 찻잔을 내려놓고 그녀와 함께 해변가로 향했다.
“흑귀.”
그가 부르자 숲 속에서 흑귀가 달려 나왔다.
담호가 숲에 처박혀 있는 동안 흑귀도 숲 속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녔었다. 홀로 겨울을 보낸 흑귀의 털에서는 윤기가 났고, 덩치가 더 커져 있었다.
“잘 있었느냐?”
담호가 흑귀의 얼굴에 자신의 이마를 대며 물었다. 그러자 흑귀가 기분 좋은 울음과 함께 꼬리를 풍차처럼 휘저었다.
담호는 한동안 흑귀와 해후의 정을 나누다가 섬에 들어올 때 이용했던 조각배에 올라탔다. 뒤이어 종리연과 흑귀까지 타자 조그만 조각배가 금방이라도 가라앉을 것처럼 휘청거렸다.
담호가 노를 저었다. 그가 한 번씩 노를 저을 때마다 조그만 배가 마치 쾌속선이라도 되는 것처럼 십여 장씩 앞으로 쭉쭉 나갔다.
“후아!”
종리연이 선수에 서서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아직은 한기를 머금은 바람이 그녀의 폐를 청량하게 만들었다.
겨우내 가슴속에 쌓였던 답답함이 모조리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얼굴에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흑귀도 기분이 좋은지 연신 투레질을 하며 꼬리를 흔들었다.
조각배는 순식간에 남만호 변에 도착했다. 담호는 미련 없이 배를 버리고 신양으로 향했다.
모첨차의 고향답게 신양 거리는 차향으로 가득했다. 시장 안에는 다루와 객잔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잠깐만요.”
종리연이 갑자기 멈춰 섰다.
담호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종리연이 배시시 웃었다.
“그런 복장으로 계속 돌아다닐 수는 없잖아요?”
종리연은 담호가 입은 옷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궁세가와의 싸움으로 담호는 그동안 입고 있었던 검은 가죽 장포가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 그 후 인근 농가에서 허름한 옷을 구해 지금까지 입고 다녔다. 그 때문에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농부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종리연이 멈춰 선 곳은 바로 옷가게 앞이었다. 그녀가 담호의 손을 잡아끌었다.
“여기서 옷을 맞춰요.”
담호는 순순히 옷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통통하게 살이 찐 주인이 그들을 맞이했다.
“천 좀 볼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요. 저희 가게는 서역에서 들여온 모피부터 동방에서 가져온 모피까지 없는 종류가 없답니다.”
“질기고 튼튼한 가죽 종류도 있나요?”
“물론이지요. 천산에서 구한 늑대 가죽부터 남방에서 가져온 악어가죽까지 종류도 다양하답니다.”
주인은 아예 가죽을 종류별로 내놨다.
종리연은 한참 동안이나 가죽을 꼼꼼히 살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보고, 냄새까지 맡았다. 그렇게 해서 그녀가 최종적으로 고른 것은 남만에서 들여왔다는 흑표의 가죽이었다.
“이것으로 할게요.”
“잘 선택하셨습니다. 저희도 어렵게 구한 것으로 원래는 황실에 진상하려는 물건이었습니다.”
“이것으로 옷을 만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요?”
“최대한 빨리 서두르면 내일까지도 가능합니다. 물론 그러려면 돈이 많이 들겠지만요.”
“얼만가요?”
“가죽 대금과 수공비까지 합치면 금 스무 냥은 필요합니다.”
“금 스무 냥?”
순간 종리연의 얼굴에 갈등의 빛이 떠올랐다.
금 스무 냥이라면 어지간한 무관이 일 년 동안 벌어들일 만큼 큰 금액이었다. 그런 어마어마한 금액을 겨우 옷 하나 사는 데 쓰자니 망설여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종리연은 언제 고민했었냐는 듯이 품에서 금자 열 개를 꺼냈다.
“착수금으로 금자 열 냥을 먼저 드릴게요. 나머지는 옷을 받은 후 치르죠.”
“화끈하시군요.”
“대신 옷은 확실히 만들어 주셔야 해요.”
“물론입니다. 아마 하남성을 모두 뒤져 봐도 저희만큼 옷을 확실히 만드는 곳은 드물 겁니다.”
주인이 자신의 가슴을 치며 호언장담했다.
담호가 종리연을 바라봤다.
“무리하는 것 아닌가?”
“당신에겐 그만큼 신세를 졌으니까요. 빚은 꼭 갚아야 한다는 게 내 신조예요.”
“그런가?”
“네! 그러니 부담 갖지 않아도 돼요.”
“그렇게 하지.”
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이 자를 들고 와 담호의 치수를 쟀다. 담호는 주인에게 자신이 원하는 옷의 형태를 말해 줬다.
“그러니까 피풍의 형태를 원하시는군요. 무공을 펼칠 때 걸리는 것이 없게끔 말이죠. 맞나요?”
“맞아!”
“알겠습니다. 손님의 몸에 맞는 최상의 옷을 만들어 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 가게 옷은…….”
주인은 담호가 무섭지도 않은지 연신 떠들어 댔다. 담호는 주인의 이야기를 더 듣지도 않고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바로 인근의 객잔으로 향했다.
방 두 개를 잡았다. 종리연은 오랜만에 따뜻한 물로 수욕을 하겠다고 말하고 들어갔다. 짐이 없는 담호는 바로 일 층의 식당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가을에 섬에 들어가 봄이 다 되어서 나왔다. 본의 아니게 네다섯 달이나 세상과 격리되어 살아야 했다.
그 긴 시간 동안 담호는 오직 무공일도만 집중했다.
천금마옥을 나온 이후 이렇게 오랫동안 무공에만 전념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세상에 나와 수많은 싸움을 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다른 무인들이라면 평생을 살아도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할 흉험한 싸움을 수도 없이 겪었다.
그 과정 중에 적잖은 심득을 얻었지만, 체계적으로 정리할 시간이 부족했었다. 특히 남궁천과의 싸움은 암형권이 발전해야 할 방향을 명확하게 깨닫게 했다.
담호는 부상을 당한 지금이 그동안의 심득을 정리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남만호의 섬에서 부상을 치료하면서 그동안 얻은 심득을 차곡차곡 정리했다.
담호가 주먹을 꽉 쥐었다.
수많은 격전을 치르면서 그의 손등에도 많은 상처가 생겼다. 손에 난 상처가 담호가 살아온 인생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내 손에 더 이상 상처가 생기지 않는 날이 곧 나의 마지막 날이겠지.’
그때가 되어도 후회가 남는 일이 없도록 모든 것을 불태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