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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177화 (177/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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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화 1장. 세월은 새로운 인연을 만나게 한다(2)

종리연이 식당으로 내려왔다. 물기가 완전히 마르지 않은 촉촉한 머리카락이 묘한 색감을 불러일으켰다.

그 때문인지 식당 안에 있는 많은 이들이 종리연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종리연은 그런 사람들의 시선이 익숙한 듯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담호의 앞자리에 앉았다.

“많이 기다렸어요?”

“아니!”

담호가 고개를 저었다.

탁자 위에는 반쯤 술이 비워진 술병과 간단한 안줏거리가 놓여 있었다.

“저도 한잔 주시겠어요?”

“음!”

담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종리연이 단숨에 술잔을 들이켰다.

단지 술 한 잔 마셨을 뿐인데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종리연이 웃었다.

“쓰지만 좋네요.”

담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들이켰다.

기분 좋은 화끈함이 식도에서 느껴졌다. 객잔 주인이 직접 담갔다는 술은 무척이나 독했다. 그래서 기분 좋은 취기가 올라왔다.

종리연이 술을 홀짝였다. 어느새 그녀의 눈동자도 취기로 인해 몽롱해져 있었다.

그녀는 한손으로 턱을 괸 채 담호를 바라봤다.

“그거 알아요?”

“…….”

“당신 참 재수 없는 사람인걸. 성격도 제멋대로이고, 타협할 줄도 모르고. 가는 곳마다 사건 사고를 일으키고, 적들도 많고…….”

취기 때문인지 그녀의 목소리는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담호는 그런 종리연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괜찮아요? 그렇게 많은 적을 만들어도.”

“그러는 당신은 남궁세가를 적으로 돌렸는데 괜찮나?”

“괜찮을 리 있겠어요? 지금도 겁나 죽겠는데. 그래도 후회하지는 않아요. 그 덕분에 연이의 생명은 구했으니까요. 만일 연이를 구하지 못했다면 더 큰 후회를 했을 거예요.”

종리연이 목이 타는 듯 다시 술 한 잔을 들이켰다.

“사부님은 항상 그랬어요.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을 중히 여기라고. 그리고 실제로 그런 삶을 사셨지요. 하지만 저에겐 무척이나 벅차네요. 사부는 어떻게 그렇게 사셨을까요? 사부는 겁이 나지 않았을까요?”

담호를 향했던 질문은 어느새 종리연의 넋두리가 되어 있었다.

겉으론 담담한 척했어도 그녀의 속은 무척이나 여렸다. 단지 의원이라는 생명을 다루는 직업을 가지고 있기에 당당해지려 노력하고 있을 뿐이다.

종리연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을지언정 의원으로서의 역할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확실히 자각하고 있었다.

“이제 당신이 말해 봐요. 괜찮아요?”

“괜찮아.”

“정말요?”

“이미 벌어진 일. 되돌릴 수도 없잖아. 그렇다면 앞으로 나가야지. 그 어떤 결과가 기다리더라도.”

“당신은 정말 강하군요. 부러워요. 나에게도 그런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있다면……. 사부는 왜 하필 나를 제자로 택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종리연이 이내 탁자에 고개를 처박았다. 술에 취해 정신을 잃은 것이다.

담호는 그런 종리연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정신을 잃은 종리연은 깨어날 기색이 전혀 없었다. 담호는 그런 종리연을 놔둔 채 남은 술을 마저 마셨다.

마침내 술 한 병을 모두 비운 담호는 종리연을 업고 그녀의 방으로 올라갔다.

술에 완전히 취한 종리연의 옷매무새는 흐트러져 뽀얀 속살이 그대로 보이고 있었다.

붉게 달아오른 종리연의 얼굴은 무척이나 아름다워 누구라도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담호는 그렇게 아름다운 종리연을 보면서도 별반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잠시 종리연을 내려다보던 담호가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고 종리연 혼자만이 방 안에 남겨졌을 때였다.

“하!”

의미 모를 한숨이 방 안에 울려 퍼졌다.

***

고현(古縣)은 산서성 남부에 위치한 도시였다. 동서남북으로 주요 관도가 교차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많은 사람이 몰릴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몰리면서 자연스럽게 재화가 몰렸다. 재화는 다시 사람을 부르면서 고현은 제법 커다란 도시로 발전했다.

더군다나 고현은 산서성 남부에 있다 보니 상대적으로 마교로부터 안전하다는 인식이 있었다. 그 때문에 산서성 북쪽 삭주엔 무림맹 지부가 들어섰지만, 이곳엔 그런 것이 없었다.

척박한 산서성에는 구대문파와 오대세가 같은 거대 문파는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고만고만한 규모의 중소 문파나 조그만 무관 들이 많았다.

고현도 마찬가지였다. 고현에는 다섯 개의 조그만 무관과 청운방(靑雲房)이라는 방파가 존재했다. 상대적으로 규모가 큰 청운방은 고현의 맹주를 자처했고, 그 결과 가장 많은 이권을 차지하고 있었다.

마교의 등장으로 인해 천하 곳곳에서 혈풍이 불고 있었지만, 고현은 상대적으로 안전하다는 인식 때문에 오히려 많은 재화가 몰리면서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덕분에 청운방도 번창을 하고 있었다.

“이번 달은 저번 달보다 이득이 삼 할이나 늘었군. 하하!”

“방주님, 감축드립니다. 이대로만 나가면 저희 청운방도 구대문파 못지않은 거대 문파가 될 수 있을 겁니다.”

“하하! 이를 말인가?”

방주의 거처에서 너털웃음이 터져 나왔다.

청운방의 방주인 소도철과 부방주인 장명이 마주 앉아 웃고 있었다.

“참, 무림맹에서 공문이 날아왔다면서?”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방주님께 드리려고 챙겨 왔습니다.”

장명이 품에서 서찰을 꺼내 소도철에게 바쳤다. 서신을 읽어 내리는 소도철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장명이 궁금증을 드러냈다.

“무슨 내용입니까?”

“뻔하지. 무림맹에 돈을 바치라는 내용이지. 인력도 알아서 파견하고.”

“날도둑놈 같은 심보군요.”

“누가 아니라는가? 모두 알다시피 이곳 산서성은 마교와 얽힐 일이 전혀 없는데 우리가 왜 무림맹에 돈과 인력을 바쳐야 한다는 말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외면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그렇지! 그들이 뒤끝이 얼마나 심한데.”

소도철이 턱을 긁었다.

그의 얼굴엔 귀찮다는 빛이 역력했다.

무림맹의 요구가 과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는 없었다. 오대세가와 구대문파뿐만 아니라 천하의 유력 문파 대부분이 무림맹에 속해 있었다.

무림맹의 요구를 거부했다가는 후환이 끝이 없을 터였다.

“제기랄! 어쩔 수 없군. 적당히 생색을 내는 수밖에. 부방주가 알아서 적당한 금액을 산출해 봐. 무림맹에 보낼 아이들도 좀 뽑고.”

“아이들은 몇 명이나 보낼까요?”

“한 오십 명 정도면 적당하지 않겠는가? 이번에 새로 뽑은 제자들 위주로 선발하라고.”

“알겠습니다.”

장명이 미소를 지었다.

새로 뽑은 제자들은 아직 가르칠 게 많았다. 제대로 된 무인이라고 보기엔 부족함이 많은 것이다.

그런 제자들을 무림맹에 파견하는 것은 청운방에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대신 돈을 좀 많이 보태면 되겠군요.”

“그래! 돈이야 또 벌면 되니까. 흐흐!”

“알겠습니다. 그리하겠습니다.”

“부방주는 말이 잘 통해서 참 좋단 말이야.”

“저도 방주님을 언제나 존경하고 있습니다. 현세에도, 내세에도 오직 방주님만 믿고 따르겠습니다.”

“하하하!”

장명의 아부에 소도철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의 대에서 청운방이 크게 부흥을 할 거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한 방파를 이끄는 수장으로 이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 있을까?

“내 옆자리는 항상 자네 차지야. 알지? 우리는 끝까지 함께 가는 거야.”

“암요. 이 장명이 방주님 곁을 보좌해야지, 누가 하겠습니까? 지옥 끝까지라도 방주님과 함께하겠습니다.”

“그래! 기분도 좋은데 술 한잔하지.”

“시비들한테 안주상을 준비시키겠습니다.”

“으음!”

소도철이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크아악!”

“아악!”

갑자기 비명성과 함께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무슨 일이지?”

소도철의 안색이 싹 변했다.

장명이 급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아니, 같이 나가지.”

두 사람은 함께 밖으로 나왔다.

“이럴 수가!”

외부로 나온 순간 두 사람의 표정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청운방은 정체 모를 적들의 습격을 받고 있었다. 붉은 무복을 입은 수백 명의 무인들이 난입했고, 그들은 청운방의 무인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피가 튀고, 비명이 울려 퍼졌다.

쓰러지는 자 대부분은 청운방의 무인들이었고, 붉은 무복을 입은 무인들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전력이었다.

“대, 대체 저들이 누구기에?”

소도철의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그때 장명의 비명과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교입니다. 놈들은 마교도가 분명합니다.”

“마교?”

그제야 소도철이 냉정한 시선으로 전장을 바라볼 수 있었다.

가공할 무위, 무자비한 손속, 그리고 감정이 담기지 않은 살육자의 눈빛을 한 수백 명의 무인.

천하에 수많은 문파들이 있지만, 이렇게 확실한 특징을 가진 전력을 소유한 곳은 마교, 단 한 곳뿐이었다.

“마교가 왜?”

소도철이 분노해야 한다는 사실도 잊은 채 망연히 중얼거릴 때였다.

“청운방주 소도철, 맞나?”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목소리가 소도철과 장명의 귓전에 울려 퍼졌다.

“헉! 언제?”

“으음!”

바로 지척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소도철과 장명이 소스라치게 놀라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마치 핏물에 담근 듯 시뻘건 무복과 방립을 쓰고 있는 무인이 보였다.

방립 아래 드러난 무인의 얼굴에는 핏빛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어 이목구비를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무인은 등에 커다란 천으로 둘둘 만 기다란 물체를 짊어지고 있었다.

무인을 보는 순간 소도철과 장명은 마치 뱀 앞에 선 개구리마냥 꼼짝하지 못하고 얼어붙어 버렸다.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핏빛 무인이 자신들과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감히 대항할 마음을 품지도 못했다.

“으아악!”

“사, 살려 줘!”

그 순간에도 청운방의 무인들은 속절없이 죽어 나가고 있었다. 청운방의 전멸은 기정사실이었다.

핏빛 무인이 물었다.

“제자들을 살리고 싶은가?”

“그, 그렇소.”

소도철이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이대로 청운방을 멸문시킬 수는 없었다.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청운방의 명맥만은 잇게 해야 했다.

순간 핏빛 무인이 등에 짊어지고 있던 천으로 둘둘 만 물체를 꺼냈다. 천을 풀자 세 자루의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핏빛 무인은 그중 두 자루를 꺼내 소도철과 장명의 발치에 던졌다.

“싸워라.”

“무슨?”

“방주 소도철, 네가 이기면 나머지 청운방도들을 살려 주지. 부방주 장명, 네가 이기면 가족들을 살려 주겠다.”

“크으!”

“싸워라.”

장내의 싸움은 이미 끝나 있었다. 살아남은 청운방의 무인들은 모조리 무릎을 꿇은 채 마교의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쪽에는 장명의 가족들 목에 칼이 대어져 있었다.

“문주님.”

“여, 여보!”

청운방의 문도와 장명의 가족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익! 악마 같은…….”

소도철이 분노에 찬 시선으로 핏빛 무인들을 노려봤다. 하지만 그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것은 장명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이 핏빛 무인이 던진 검을 집어 들었다.

“미안하네.”

“저도 죄송합니다.”

서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그들은 싸워야 했다.

채챙!

두 사람의 검이 격돌했다.

불꽃이 피어오르고, 선혈이 낭자했다.

이십 년 동안 혈육처럼 지내 온 두 사람은 마치 철천지원수라도 되는 듯 서로를 향해 살초를 펼쳐 냈다.

핏빛 무인이 팔짱을 낀 채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어려 있던 핏빛 아지랑이가 서서히 사라지며 본 모습이 드러났다.

광대뼈가 툭 튀어나왔고, 두 눈은 움푹 들어갔다. 매부리코 위쪽으로 보이는 붉은 눈동자엔 기이한 열기와 광기가 혼재하고 있었다.

핏빛 무인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가 가진 검은 모두 세 자루.

그중 두 자루는 지킬 것이 있는 자들을 싸우게 하기 위해 사용한다.

눈앞에서 치열하게 싸우는 소도철과 장명처럼.

핏빛 무인의 이름은 등천소였다.

등천소의 눈에 피를 흘리며 싸우는 소도철과 장명의 모습이 보였다.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있는 자들의 사투는 흥미 이상의 쾌감을 준다.

등천소가 입을 열었다.

“다음 목표는?”

“삭주입니다.”

“교주께서는 뭐라고 하시던가?”

“생존자는 필요 없다 하셨습니다.”

부관의 대답에 등천소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그게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이지.”

그때였다.

푸욱!

“커헉!”

장명의 비명이 전장에 울려 퍼졌다. 소도철의 검이 장명의 심장을 찌른 것이다.

“무, 문주님.”

“미안하네.”

소도철이 고개를 돌려 장명의 시선을 외면했다.

허우적거리던 장명의 몸이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부릅뜬 그의 눈엔 소도철을 향한 원망이 가득했다.

“아악! 여보!”

“아빠!”

장명의 가족들이 비명을 질렀다.

소도철은 애써 그들의 비명을 외면하며 등천소를 바라봤다.

“크흑! 내가 이겼으니 문도들을 살려 주시오.”

그의 눈물에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등천소가 세 번째 검을 쥐었다.

매끄러운 손잡이가 손에 착 달라붙었다.

“사과하지.”

“무슨?”

“이기면 방도들을 살려 준다는 말. 거짓이었어.”

“서, 설마?”

“나는 너희들이 말하는 마교도잖아.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등천소가 웃었다.

푹!

검이 소도철의 가슴을 두부처럼 파고들었다.

불같은 통증에 소도철이 눈을 크게 치떴다. 등천소가 그런 소도철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너무 억울해하지 말라고. 다른 이들도 너의 뒤를 따를 테니까.”

소도철의 눈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그것이 소도철의 최후였다.

세 번째 검의 용도. 그것은 바로 두 자루의 검으로 싸워 이긴 자의 목숨을 취하는 것이다.

등천소가 세 자루의 검을 수거하며 명령을 내렸다.

“개미 새끼 한 마리 남기지 말고 모조리 죽여. 본교의 무서움을 만천하에 알리도록.”

“존명!”

살아남은 청운방도들에게 죽음이 떨어졌다.

피와 죽음이 난무하는 광경을 보며 등천소가 웃었다. 그의 웃음은 청운방도뿐 아니라 같은 마교의 무인들마저도 두렵게 만들었다.

등천소의 별호는 혈해판관(血海判官).

광기로 죽음의 판결을 내리는 자. 그는 마교가 자랑하는 칠대마인의 일인이었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오직 피의 바다만이 남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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