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권마-178화 (178/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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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화 1장. 세월은 새로운 인연을 만나게 한다(3)

담호가 옷을 갈아입었다.

가죽으로 만든 검은 상의와 하의, 그리고 상체와 무릎까지 덮는 피풍의. 담호의 모습은 마치 커다란 흑표를 연상시켰다.

“잘 어울리네요.”

종리연이 담호의 모습을 보며 감탄사를 토했다.

옷가게 주인의 호언장담처럼 정말 멋있는 옷이 나왔다. 그리고 그 옷은 담호에게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모양은 둘째치고 착용감이 마음에 들었다. 관절을 움직이는 데 어떤 거추장스러움도 없었다.

담호가 종리연을 바라봤다.

“고맙군! 잘 입지.”

“그거면 돼요.”

종리연이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이 말에 올라탔다. 이제 신양을 떠날 시간이었다.

종리연이 물었다.

“약속 잊지 않았죠? 여강까지 데려다준다는 것.”

“그래!”

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시라도 빨리 현소 진인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한 약속을 어길 수도 없었다. 어차피 화산이 있는 섬서성으로 가려면 여강을 통과해야 하기도 했다.

“여강엔 누가 있지?”

“의원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요.”

“그런가?”

“오랫동안 저 하나만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에요.”

“당신이 아무리 뛰어난 의원이라고 해도 결코 모든 사람을 구할 수는 없어.”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아니에요.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봐야죠.”

종리연이 웃었다.

밤새 고민했다.

자신에겐 담호처럼 절대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마음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그럴 자신도 없었고.

하지만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최선을 다했는데도 어쩔 수 없다면, 그건 그녀의 영역이 아니다. 그것이 그녀가 내린 결론이었다.

확고한 그녀의 말에 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가요!”

그녀가 먼저 말을 달렸다.

담호도 흑귀에 올라타 그녀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신양을 벗어나 북상을 했다.

저 멀리 웅장한 대별산의 모습이 보였다. 아름답기로 소문이 자자한 대별산이었다. 멀리서도 그 아름다운 모습이 여실히 드러났다.

“아쉽네요. 대별산도 꼭 가 보고 싶었던 곳인데.”

무림맹의 추적을 우려해 근처 남만호에 있으면서도 한 번도 가 보지 못했다. 그것이 못내 아쉬운 종리연이었다.

담호는 말없이 대별산을 바라보았다.

화산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그에게 대별산의 아름다움은 그다지 큰 감흥을 주지 못했다.

그렇게 상반된 분위기 속에서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을 달렸다.

종리연이 타고 있는 말은 흑귀처럼 뛰어난 명마는 아니었지만 지구력이 무척이나 뛰어났다. 때문에 오랜 시간을 달리고도 지친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 덕에 두 사람은 신양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상당히 먼 거리를 달려올 수 있었다.

“휴우! 여기서 잠시 쉬는 게 어떨까요?”

종리연이 이마 위로 흐르는 땀을 소매로 닦으며 말했다.

“그러지.”

그렇지 않아도 이제 슬슬 쉬어 갈 시간이었다. 흑귀와 종리연의 말에도 휴식 시간을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담호가 주위를 둘러봤다.

조그만 개울가 근처에 적당한 공터가 있었다. 공터 중앙에는 평평한 큰 바위가 있어 잠시 쉬어 가기 적당할 듯싶었다.

“저기서 쉬지.”

“네!”

두 사람은 함께 바위에 앉았다.

종리연이 봇짐을 뒤져 연잎으로 싼 조그만 주먹밥 두 개를 꺼냈다. 객잔을 떠나기 전에 미리 준비한 것이다.

그중 하나를 담호에게 건넸다.

“드세요. 급히 만든 거지만, 그래도 먹을 만할 거예요.”

담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먹밥을 받았다.

종리연이 만든 주먹밥은 제법 맛있었다. 겉모습은 투박해도 꽤 많은 재료가 들어 있어 한 끼 식사로 부족함이 없었다.

담호는 주먹밥을 먹으면서 방진보를 떠올렸다.

방진보가 동행했다면 분명 이곳에서 거하게 식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시절이 그립긴 하지만 아쉽지는 않았다.

패왕채에서 마교의 무인들과 싸우면서 확실히 깨달았다. 이 이상 방진보와 함께하다간 그가 위험할 것임을.

좋든 싫든 담호는 피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있었다. 그와 함께했다가는 방진보도 소용돌이 휘말리고 말 것이다.

패왕채라면 방진보가 좋아하는 요리를 마음껏 할 수도 있을 것이고, 자신의 이름을 내건 반점을 낼 수 있도록 밀어줄 것이다.

담호는 그것이 방진보를 위한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종리연은 주먹밥을 먹는 담호의 옆얼굴을 조용히 바라봤다. 강인한 턱 선과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

분명 얼굴은 예전과 변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종리연은 무언가 변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말없이 주먹밥을 먹고 있을 때였다.

“저곳에서 잠시 쉬어 간다.”

“예!”

갑자기 사람들의 목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고개를 드니 십여 대의 마차와 수십 명의 사람들이 보였다.

마차 지붕에 꽂힌 깃발에는 신화상단(晨火商團)이라는 네 글자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종리연이 깃발을 보고 중얼거렸다.

“신화상단?”

“알고 있나?”

“당연히 알지요. 천하제일의 상단인데. 천하 상계를 논할 때 신화상단은 항상 중심에 있어요. 그들이 가진 막대한 부는 천하를 아우를 정도라고 해요.”

“천하제일이라…….”

“그들이 지난 수십 년 동안 축적한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하지만 그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하남성 전체를 살 수도 있을 거예요. 그 정도로 그들이 쌓은 부는 대단해요.”

신화상단의 주인은 원회상이었다.

원회상의 별호는 만금충(萬金蟲).

돈 냄새를 맡는 데 귀신같은 재능을 갖고 있었고, 이권이 걸린 일이라면 그 어떤 험지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간다고 해서 붙여진 별호였다.

신화상단은 휘하에 표국까지 운영하고 있었는데, 신화표국에는 무척이나 강력한 고수들이 즐비하다고 했다. 그래서 거칠 것이 없는 녹림도들조차 신화표국을 상대하는 것을 꺼린다고 했다.

“선객이 있었군.”

신화 상단에서 누군가 앞으로 나왔다.

이제 삼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그는 무인이라기보다는 문사에 가까운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겉으로 보이는 모습일 뿐이다.

그의 이름은 윤사일, 신화상단의 외당주였고, 독심수라(毒心修羅)라는 별호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뛰어난 무인이었다.

신화상단의 외당주였지만, 그가 직접 상행에 나서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가 나섰다는 것 자체가 이번 상행이 무척이나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윤사일이 말을 몰아 담호와 종리연에게 다가왔다.

“본인은 신화상단의 외당주 윤사일이오. 먼저 온 선객들에게 폐를 끼치게 된 점 죄송하게 생각하오. 허나 인근에서 쉴 만한 곳이 이곳밖에 없으니 합석을 했으면 하오.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불청객들을 받아 줬으면 좋겠소.”

윤사일의 말은 매우 정중했다.

예의는 갖췄지만, 비굴하지 않았다.

담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다.

“고맙소!”

윤사일이 인사와 함께 일행들에게 돌아갔다.

“자, 이곳에서 잠시 쉬어 갈 테니 알아서 건량과 물을 섭취하거라.”

“예!”

신화상단의 무인과 상인들이 말에서 내렸다. 수많은 사람이 모여 있으면 시끄러울 법도 하건만 그들은 무척이나 질서 정연했고, 함부로 떠드는 사람도 없었다.

삼삼오오 모여서 건량을 먹으면서도 신화상단의 사람들은 절대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상인이나 무인이기보다는 군인에 더 가까운 모습이었다.

그런 신화상단의 모습을 보면서 종리연이 감탄사를 터트렸다.

“신화상단이 규율이 대단히 엄해 절대로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 말이 사실인가 보네요.”

그들은 담호와 종리연이 조용히 식사할 수 있도록 근처에 다가오지도 않았다. 종리연에겐 그런 광경이 예의 있는 모습으로 비춰진 것이다.

담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윤사일은 상단의 무인들과 상인들이 제대로 식사를 하는지 점검 후 가장 큰 마차로 다가갔다.

다른 마차들과 달리 큰 마차의 외부는 고급스러운 자재로 마감이 되어 있었고, 화려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봐도 마차 안에 무척이나 중요한 인사가 타고 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아가씨.”

윤사일이 조심스럽게 마차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을 불렀다. 그러자 잠시 후 마차의 문이 열리고 윤사일이 안으로 들어갔다.

담호와 종리연이 주먹밥을 거의 다 먹었을 무렵 윤사일이 마차 밖으로 나왔다.

윤사일은 곧장 담호와 종리연을 향해 다가왔다.

“저희 주인께서 두 분을 뵈었으면 하십니다. 혹시 괜찮다면 잠시 동석하시겠습니까?”

뜻밖의 제안에 종리연이 담호를 바라봤다. 담호가 싫다고 하면 굳이 마차에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담호가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담호의 대답은 그녀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그러지.”

담호가 마차를 향했다.

“같이 가요.”

종리연이 급히 담호를 뒤따랐다.

윤사일을 따라 들어간 마차 안은 무척이나 화려했다. 안에는 붉은 보료가 깔린 커다란 침상이 있었고, 그 위엔 묘령의 여인이 시비의 도움을 받아 손톱을 손질하고 있었다.

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여인은 얼굴에 면사를 쓰고 있어 진면목을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면사 위로 드러난 눈매가 무척이나 요염해 보였다.

윤사일이 여인에게 고개를 숙였다.

“모시고 왔습니다, 아가씨.”

“밖에서 대기해요.”

“알겠습니다.”

윤사일과 시비가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그제야 여인이 고개를 들어 담호와 종리연을 바라봤다.

“갑작스럽게 불러 죄송해요. 전 신화상단의 원설화라고 해요. 요 며칠 마차만 타고 오느라 통 다른 사람들을 보지 못해서 이야기나 하고자 결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청했습니다.”

“그럼?”

“맞아요. 신화상단의 주인이신 원회상 대협이 제 아버님이에요.”

“역시!”

“절 아시는가 보군요?”

“천하에서 원 대협과 원 소저를 모르는 사람도 있을까요?”

“그런가요? 그런데 두 분은 저를 아는데, 저는 두 분의 존성대명조차 모르는군요. 저에게도 두 분의 이름을 알 기회를 주지 않으시겠어요?”

“제 이름은 종리연이라고 해요.”

“아!”

순간 원설화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저를 아시나보군요?”

“신의 종리연 소저를 어찌 모를까요? 우연히 초대한 손님이 이런 거물일 줄은 정말 몰랐네요. 반가워요, 종리 소저. 아! 신의라고 불러야 하나요?”

“편하신 대로 부르세요.”

“그럼 종리 소저라고 부를게요.”

원설화의 요염한 눈이 곡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그녀의 시선이 이번엔 담호를 향했다.

“소협은?”

“저와 개인적인 친분으로 동행하시는 분이세요. 워낙 과묵하셔서 말을 잘 하지 않으니 이해해 주세요.”

종리연이 나서서 먼저 대답했다.

담호라는 이름이 가지는 무게와 공포를 누구보다 잘 아는 종리연이었다.

굳이 담호의 이름을 알려서 문제를 일으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 종리연의 생각이었다.

그녀의 생각을 알기라도 하듯이 담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원설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엔 수많은 사람이 존재하고, 그만큼 많은 사연이 존재하죠. 이해해요.”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별말씀을! 그 전에 이 답답한 면사부터 벗어야겠군요.”

원설화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면사를 벗었다. 그러자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모습을 드러내며 순간적으로 마차 안이 환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얼굴엔 귀티가 흐르고, 입술은 장미처럼 붉었다. 눈처럼 하얀 피부와 대조되는 검은 눈동자엔 요염한 빛이 은은하게 어려 있었다.

남자라면 누구나 혹할 만큼 뛰어난 미인이었다.

종리연이 그녀의 아름다움에 감탄했다.

“아름다우시군요.”

“종리 소저도 마찬가지예요.”

두 여인이 서로의 외모를 칭찬했고, 담호는 그 광경을 말없이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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