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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179화 (179/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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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화 2장. 혼돈의 바람은 북에서 불어온다(1)

담호는 마차를 나왔다.

지금 이 순간에도 두 여인의 대화는 이어지고 있었고, 그 사이에 담호가 낄 자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밖으로 나온 담호는 바위 위에 앉아 신화상단의 사람들을 바라봤다. 이곳에 온 지 꽤 되었지만, 그들은 전혀 흐트러진 모습이 아니었다. 확실히 일반 상단이나 표국에선 보기 힘든 강력한 규율과 절제력이 그들 사이에 공고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담호에게 다가왔다. 신화상단의 외당주 윤사일이었다.

“아가씨께서 장시간 원행에 지쳐 있었습니다. 보다시피 시커먼 사내들밖에 없어 말상대가 돼 줄만 한 상대가 없었고요. 다행입니다. 그쪽 일행께서 잠시나마 아가씨의 말동무가 되어 주셔서.”

“원행이라고?”

“소림사까지 가는 길입니다. 아직도 닷새는 더 가야 하죠.”

윤사일의 말에 담호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소림사라는 단어가 그의 흥미를 끈 것이다.

구대문파의 태두이자 강호 무림의 영원한 정신적인 지주.

강호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단어가 바로 소림사라는 세 글자였다.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수많은 전설과 신화를 품고 있는 곳.

강호에 몸을 담고 있는 자라면 누구나 동경해 마지않는 이름이 바로 소림사였다.

소림이라는 단어는 담호의 흥미를 끌기 충분했다.

“소림사는 왜 가는 거지?”

“상인이 움직이는 것은 돈이 될 때뿐이죠. 소림사에서 거래를 요청했습니다. 꽤나 규모가 큰 거래이기 때문에 아가씨까지 움직이게 된 거죠. 아무래도 상대가 상대인지라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으니까요.”

소림사는 누구나 인정하는 강호의 태두였다. 신화상단이 아무리 천하제일의 재력을 소유하고 있다고 하지만 소림사는 그들에게도 부담스러운 거래 상대였다. 그래서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원설화가 직접 움직이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원설화는 단순히 원회상의 딸이기 때문에 이번 임무를 맡은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아름다운 외모에 걸맞은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였고, 지금까지 꽤 많은 거래를 주도해 많은 커다란 이익을 냈다. 그래서 신화상단에서 일어나는 큰 거래를 도맡고 있었다.

“그러는 소협께서는 어디로 가는 겁니까?”

“섬서성.”

“천하가 혼란스러운데 먼 길을 가시는군요. 위험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차라리 중간까지 저희와 함께 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윤사일이 뜻밖의 제안을 했다.

담호가 의뭉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자 윤사일이 미소를 지었다.

“그쪽은 중간까지 편히 가시고, 저희 아가씨는 말벗을 얻으실 수 있으니 서로가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

“당장 결정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아직 시간이 남아 있으니 충분히 생각해 보십시오.”

윤사일은 그 말을 남기고 물러났다.

담호는 말없이 멀어지는 윤사일의 모습을 보았다.

이각이 지났을 무렵 종리연이 마차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오래 기다리셨죠? 죄송해요. 원 소저와 이야기하느라 시간이 그렇게 오래 지났는지 미처 몰랐어요.”

종리연이 사과부터 했다.

상인으로 잔뼈가 굵은 원설화는 무척이나 견문이 넓었다. 폭넓은 지식을 바탕으로 이야기마저 재밌게 하니 흠뻑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담호가 물었다.

“그녀와 함께 가고 싶은가?”

“아니요.”

뜻밖에도 종리연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담호의 의문을 풀어 주기라도 하듯이 말을 이었다.

“그녀와 이야기는 이미 충분히 나눴어요. 못 다한 대화는 인연이 다시 닿은 후에 나눠도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

“그녀는 분명 아름답고 현명한 사람이에요. 그녀와 대화를 하다 보면 시간이 가는 줄 모르죠. 그 때문에 환자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도 잊을 뻔했어요. 그런 경우는 처음이라서 저도 당황스러웠어요. 하지만 저는 의원이에요. 그녀보다 환자가 우선이에요. 환자에게 가는 길만큼이라도 어떻게 치료할지 한 번 더 생각하고 싶어요.”

종리연의 머릿속엔 자나 깨나 의술과 환자 생각밖에 없었다.

담호와 종리연은 신화상단과 작별을 고했다. 함께할 이유가 없으니 굳이 이곳에 머무를 필요가 없었다.

담호와 종리연이 떠난 후 윤사일이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윤사일이 극도의 공경스러운 모습으로 무릎을 꿇었다.

“아가씨!”

“그 남자는?”

“신의와 함께 떠났습니다.”

“흐음!”

원설화가 코끝을 찡그렸다. 약간의 표정 변화만으로도 공기가 후끈 달아오를 정도로 그녀의 모습은 뇌쇄적이었다.

“안타깝군요. 함께했으면 커다란 전력이 되었을 남자인데.”

“그의 정체를 아십니까?”

“그는 왼쪽 발을 살짝 절고 있었어요.”

“아!”

순간 윤사일이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그제야 자신이 놓치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것이다.

“그는 권마군요.”

“맞아요. 천하에 수많은 무인들이 존재하지만 그만큼 극명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이는 오직 그뿐이지요.”

“하지만 그는 작년 가을 모습을 감춘 걸로 알고 있는데.”

“다시 세상에 나온 모양이죠.”

원설화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겉모습과 달리 그녀의 머릿속은 무척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권마라는 별호가 주는 무게감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그가 가는 곳엔 항상 피바람이 불고, 많은 이들이 죽는다.

그의 손에 죽은 무인들의 수만 수백 명이 넘었고, 그중에는 강호를 쩌렁쩌렁 울리는 고수들도 다수였다.

“그는 참으로 골치 아픈 존재예요. 같은 편으로 두기도 부담스럽고, 그렇다고 적으로 돌리기도 버겁고.”

“그래 봤자 그는 일개인일 뿐입니다. 강호의 격랑을 홀로 감당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겠죠. 그래야 정상이구요. 하지만 왠지 개운치 않군요. 껄끄러워요. 마치 입안에 혓바늘이 난 것처럼요.”

“아가씨?”

“일단은 소림사와의 거래에 집중하기로 해요. 그게 가장 중요하니까요.”

“알겠습니다.”

“쉽게 오지 않는 기회예요. 소림사에 도착하기 전에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해요.”

“물론입니다.”

“혼자 있고 싶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쉬십시오.”

윤사일이 밖으로 나가고 마차 안에는 원설화 혼자 남았다.

“권마라……. 과연 소문처럼 그렇게 대단할까?”

그녀의 목소리가 묘한 여운을 남기며 흩어졌다.

***

말을 타고 가던 종리연이 문득 말을 걸었다.

“원 소저도 참 대단한 것 같아요.”

“뭐가?”

“천하제일 상단의 소주인이 직접 상행에 동행하는 것 말이에요. 물론 그만한 능력이 있으니까 참여하는 거겠지만, 그래도 얼마든지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며 편히 살 수 있잖아요.”

“그렇게 따지면 당신도 마찬가지겠지.”

“저요?”

“천하제일의 의술을 가지고 있잖아. 의방을 열면 알아서 사람들이 찾아올 텐데, 굳이 힘든 길을 걷고 있잖아.”

“전 경우가 다르죠. 그렇게 살겠다고 맹세했으니까요.”

“다를 것 하나 없어.”

“기분 좋네요.”

“뭐가?”

“당신의 칭찬 말이에요.”

“딱히 칭찬한 거 아니야.”

“후후!”

담호의 차가운 대답에도 종리연이 웃음을 흘렸다. 그런 종리연의 반응이 조금은 신경 쓰였지만, 담호는 이내 다른 생각에 빠져들었다.

‘원설화.’

천하제일상단인 신화상단의 소단주라는 여인.

상재가 대단히 뛰어나고 휘하에 있는 수하들에 대한 장악력 역시 대단했다. 종리연의 말처럼 쉽게 보기 힘든 여걸이었다. 하지만 그런 외적인 부분은 전혀 신경 쓸 것이 없었다.

원설화가 대단하다고 하지만 천하를 뒤져 보면 그녀보다 뛰어난 여인이 아주 없다고 볼 수는 없으니까.

당장 눈앞에 있는 종리연의 가치 역시 원설화보다 못하다고 볼 수 없었다. 그녀가 가진 천하제일의 의술은 사용하기에 따라 천하제일상단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으니까.

그보다 담호의 신경을 거슬린 것은 바로 원설화의 눈빛이었다. 요염한 눈빛 속에 숨겨진 뱀처럼 차가운 눈빛과 커다란 욕망.

일반적인 여인이 가질 수 없는 눈빛이었다.

‘그녀 역시 야망을 가지고 있군.’

난세다.

이제까지 숨을 죽이고 있던 잠룡들이 비상(飛上)하기 위해 꿈틀거리는 시기. 원설화 역시 그런 잠룡 중 하나일 가능성이 컸다.

담호는 원설화 역시 경계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굳이 그런 사실을 종리연에게 말해 줄 필요는 없었다.

종리연은 직관력이 무척이나 뛰어난 여인이었다. 원설화의 동행을 거절한 것 역시 본능적은 거부감 때문일 확률이 컸다.

문득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가장 잘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일이다.

반대로 종리연은 사람을 살리는 데 자신의 목숨을 건다.

그런 두 사람이 동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꽤나 희극적으로 느껴졌다.

“무슨 생각을 그리 깊게 하나요?”

종리연의 목소리가 담호의 상념을 깼다.

“아무것도…….”

“여강이 멀지 않았어요.”

“그런가?”

“앞으로 반나절만 더 가면 여강에 도착할 거예요.”

“여강에 환자가 있다고 했지?”

“맞아요.”

종리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환자지?”

“희귀한 절맥을 타고 태어난 환자예요. 너무 강한 양기를 품고 태어났기에 치료를 하지 못하면 스무 살이 넘기 전에 심맥이 타서 죽죠.”

“그런 질병도 있었나?”

“희귀한 절증이에요. 거의 백여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병이죠. 환자의 나이 올해 열여덟. 이대로 방치하면 이 년을 넘길 수 없어요.”

“치료할 자신은 있나?”

“최선을 다해 봐야죠. 그래도 노력하면 살릴 수 있을 거라 믿어요. 아니, 반드시 살려야죠. 그게 내 의무니까.”

종리연의 눈이 신념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사람을 살리는데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 그런 신념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종리연 역시 담호만큼이나 맹목적인 여인이었다. 환자 앞에서 그녀는 절대 타협하거나 물러서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종리연의 머릿속엔 온통 환자 생각뿐이었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여강에 도착할 수 있었다.

종리연은 담호를 데리고 여강 외곽에 있는 조그만 저택으로 향했다. 중정을 가운데 두고 저택을 사방으로 배치한 전형적인 사합원이었다. 북방의 혹독한 겨울을 나기 가장 적합한 저택 양식이었다.

쾅쾅!

종리연이 우가장의 정문을 두들겼다.

잠시 후 문이 살짝 열리고 늙은 노인이 고개를 내밀었다.

“누구…….”

“저예요.”

“아! 신의 아가씨 아니십니까?”

“제가 조금 늦었죠?”

“드디어 오셨군요.”

노인의 얼굴에 격동의 빛이 떠올랐다. 그가 급히 문을 완전히 열고 종리연의 손을 잡았다.

“공자님께서 아가씨가 오기만 기다리셨습니다.”

“늦게 와서 죄송해요. 그는 어때요?”

“아직까지 잘 견디고 있습니다.”

“다행이군요.”

종리연이 미소를 지었다.

노인이 종리연의 곁에 서 있는 담호를 바라봤다.

“그런데 이분은?”

“제 일행이에요.”

“아! 그러시군요.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어서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노인이 두 사람을 집안으로 들였다.

“누님!”

중정으로 들어서자마자 이제 이십여 세 정도로 보이는 소년이 그들을 맞이했다.

종리연이 활짝 미소를 지었다.

“살아 있었구나.”

“악착같이 살아 있으라면서요?”

“그랬지.”

“이제 치료할 자신이 생긴 건가요?”

“그래!”

종리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소년이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다.”

“이 누나만 믿으라고 했잖아.”

“믿고 있었어요.”

종리연과 소년은 마치 친 남매처럼 대화를 주고받았다.

소년의 시선이 종리연의 곁에 서 있는 담호를 향했다.

“저 형님은?”

“내 일행이야.”

“아! 제 이름은 명천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스스로를 명천이라고 밝힌 소년이 심유한 눈으로 담호를 바라봤다.

“내 이름은 담호다.”

“권마 담 대협이시군요.”

뜻밖에도 명천이 담호의 정체를 한눈에 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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