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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180화 (18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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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화 2장. 혼돈의 바람은 북에서 불어온다(2)

“나를 아나?”

담호의 물음에 명천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세상의 모든 혜지를 다 담고 있는 듯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 아직 어린 소년의 눈빛이라고 보기엔 너무나 깊고 현묘했다.

“담 대협은 생각보다 유명하시거든요. 그리고…….”

명천의 시선이 담호의 다리를 향했다.

그 짧은 시간 안에 담호가 다리를 전다는 사실을 파악한 것이다.

담호의 눈빛이 깊이 가라앉았다.

어린아이답지 않은 표정과 말투, 그리고 사람의 속내를 꿰뚫어보는 듯한 눈빛이 묘하게 거슬렸다.

명천은 천재였다. 하나를 들으면 백을 아는 문일지백(聞一知百)의 천재.

그런 천재는 정말로 흔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하늘이 내렸다고 볼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였다.

하지만 뛰어난 두뇌와 달리 그는 너무 허약했다. 그가 하루에 깨어 있는 시간은 겨우 두 시진 남짓. 그 이상 깨어 있으면 심맥에 무리가 가서 칠공으로 피를 토했다.

하늘은 그에게 시대를 압도할 만한 두뇌를 주었지만, 그를 뒷받침할 만한 육체는 주지 않았다.

그래서 명천을 아는 사람들은 그를 깨어나지 않는 천재라고 불렀다.

그에게 유일한 희망은 종리연뿐이었다.

명천이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네요. 누나가 약속을 지켜서. 그렇지 않아도 슬슬 힘에 부치던 참이었는데.”

“내가 말했잖아. 반드시 낫게 해 주겠다고.”

“고마워요.”

“대신 너도 나와 약속한 것 꼭 지켜야 해.”

“물론이에요.”

명천의 대답에 종리연도 미소를 지었다.

담호는 두 사람의 인연이 꽤 오래전부터 이어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치료는 언제부터 하실 생각이에요?”

“당장!”

“그렇게 빨리요?”

“쇠뿔도 단김에 빼는 게 좋으니까.”

“그럼 저야 좋죠. 늘 기다려 왔던 순간이니까요.”

종리연이 담호를 바라봤다.

“여기까지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약속이었으니까.”

“세상 많은 사람들이 약속을 남발하지만, 실제로 지키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죠. 그런 면에서 당신은 무척 특별한 사람이에요.”

“낯간지러운 소리나 듣고자 데려온 거 아니야.”

“알아요. 그래도 고마워요.”

종리연이 그윽한 미소를 지었다.

담호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나는 나가 있지.”

“제가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노인이 담호를 데리고 거처로 갔다.

멀어지는 담호의 뒷모습을 보며 명천이 중얼거렸다.

“부끄러움이 많으신 형님이시군요.”

“그런 면이 없잖아 있지.”

“우리 첫째 형님하고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형님이 있었어?”

“몰랐어요? 저 위로 형님 몇 분하고, 누님 한분이 계세요.”

“그런데 내가 왜 몰랐지?”

“제가 말 안했으니까요.”

“응?”

“하하하!”

명천이 호탕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그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오랜만에 크게 웃었더니 심맥이 아파 왔다. 코에서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야말로 저주받은 육체였다.

‘그래도 괜찮아! 이젠 나도 형님한테 도움이 될 수 있을 테니까.’

평생을 기다려 왔던 순간이다.

오늘을 위해 그의 형님은 종리연의 사부와 인연을 맺고,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그리고 그의 노력은 십 수 년 만에 결실을 맺게 됐다.

참으로 오래 기다렸다.

남만호의 섬에 있을 때 그녀가 가장 신경 쓴 것은 명천의 치료법이었다. 토대는 그녀의 사부가 마련해 놨지만, 그 치료법은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치료법을 보완할 방법을 연구했고, 그 결과 사부의 심득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

“아프지 않게 해 줘요, 누나.”

“웃기지 마. 가장 큰 대침을 사용할 테니까 무지 아플 거야.”

“그것 참 무섭네요.”

“애늙은이 같으니라구.”

“후후!”

명천이 웃음을 흘렸다.

그 모습을 보며 종리연이 고개를 저었다.

선대의 인연 때문에 알게 된 명천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명천에 대해 아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애늙은이 같은 모습이 쉽게 적응되지 않았다.

“우리도 들어가자. 긴 밤이 될 거야. 그리고 무척 고통스러울 거야.”

“네!”

명천이 힘차게 대답했다.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안으로 들어갔다.

명천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속옷 하나만을 남기고 다른 옷을 모조리 벗었다. 뼈가 드러날 정도로 앙상하게 마른 몸이 종리연의 눈에 들어왔다.

종리연의 얼굴에 안타까운 빛이 떠올랐다.

“밥 좀 많이 먹고 있으라고 했잖아.”

“아무리 먹어도 안 찌더라고요.”

명천이 처연한 얼굴로 웃었다. 그런 그의 표정이 종리연을 더 가슴 아프게 만들었다.

“시작하자.”

“예!”

“많이 아플 거야.”

“각오하고 있어요.”

명천이 이를 꽉 깨물었다.

종리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침을 꺼냈다.

“후우!”

잠시 숨을 크게 들이쉰 종리연이 이내 침술을 펼치기 시작했다.

노인은 담호에게 가장 외진 방으로 안내했다.

“이곳에서 쉬십시오.”

“음!”

“감사합니다. 신의를 무사히 이곳까지 모셔와 주셔서.”

“…….”

“덕분에 공자님께서 사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명천과는 오랜 세월 알고 지낸 모양이지?”

“태어난 그 순간부터 모셨습니다. 제 자식과 다름이 없지요.”

“그런가? 그는 운이 좋군.”

“예?”

“노인장처럼 강한 무인에게 극진한 보살핌을 받고 있으니.”

“…….”

순간 노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어색한 표정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이내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

“저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노인이 급히 밖으로 나갔다.

혼자 남은 담호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누구에게나 비밀 한 가지는 있는 법이지.”

담호가 팔짱을 낀 채 창밖을 바라봤다.

여러모로 특이한 양식의 저택이었다. 북방 특유의 사합원 형태는 외부의 시선을 차단하고, 가운데 있는 중정을 향해 모든 공간이 열린다.

그에 반해 담호가 배정받은 방은 중정으로 향한 시선이 차단되었고, 반대로 거리를 조망할 수 있는 조그만 창문이 존재했다.

외부는 볼 수 있지만 내부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공간을 배치한 것이다.

거리에 어둠이 내려앉는 모습이 보였다.

그때 저택 안쪽에서 희미한 내력의 유동이 느껴졌다. 종리연이 치료를 시작한 듯했다.

담호는 벽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수많은 상념이 스쳐 지나갔다.

담호는 상념을 통제하려 하지 않았다. 상념이 가지를 뻗으며 스스로 덩치를 불려가는 과정을 관조했다.

아관(我觀).

내면을 바라봄으로써 나라는 존재를 정확히 파악한다.

지난겨울 섬에서 머물면서 깨달은 수련법이다.

자신을 냉철하게 바라봄으로써 한계를 명확히 파악한다. 거기엔 어떤 감정도 개입되지 않는다.

마치 칼을 휘두르듯 선을 그어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명확히 구별한다.

일련의 수련을 반복함으로써 어떤 상황에서도 칼날처럼 날카로운 이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이런 민가에서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가장 효율적으로 스스로를 단련할 수 있는 수련법이었다.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갔다.

내면으로 집중되었던 감각은 이제 외부로 향했다.

일 장, 이 장……. 감각은 끝없이 확장되었고, 종국에는 저택 전체가 그의 감각의 영역 아래 놓였다.

수많은 벽들이 가로막고 있었지만, 그의 감각을 막을 수는 없었다.

각기 다른 숨소리가 느껴졌다.

깊으면서도 끊임이 없는 호흡 하나.

담호를 안내해 준 노인의 호흡이었다.

‘거북이.’

담호는 노인의 호흡에서 심해에 들어간 거대한 바다거북을 떠올렸다. 단 한 번의 호흡으로 수십, 수백 리를 헤엄칠 수 있는 거대한 거북 같은 강대한 내공이 느껴졌다.

담호의 감각에 또 다른 호흡이 느껴졌다.

안정적이면서도 변화가 적은 호흡의 주인은 바로 종리연이었다. 그녀는 의술을 펼치는 데 도움이 될 정도의 내공만 가지고 있다.

담호의 감각은 다시 다른 사람을 감지했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미약하면서 희미한 호흡의 주인은 바로 명천이었다.

이제까지 살아 있는 게 기적일 정도로 희미한 호흡은 종리연이 침을 꽂을 때마다 거칠게 요동치고 있었다.

담호는 명천의 호흡에서 가뭄이 든 연못의 잉어를 떠올렸다. 몸이 거의 드러날 정도로 바닥 난 수면, 겨우 아가미만 물에 잠긴 채 가쁜 숨을 이어가는 커다란 잉어.

수면이 더 내려가면 잉어는 결국 죽게 되고 말 것이다.

종리연의 침술은 그런 잉어의 연못에 물을 보충하고 있었다. 원리야 어떻든 간에 담호에겐 그렇게 느껴졌다.

명천의 연못에 물이 조금씩 유입되고 있었다. 가쁜 숨만 이어 가던 커다란 잉어의 몸에 조금씩 활력이 돌아오고 있었다.

위기도 있었다.

유입되는 물줄기가 막혔는지 점차 줄어들었고, 반대로 빠져나가는 배수구가 터져 겨우 모아 두었던 물이 터져 나갔다.

종리연의 손길이 바빠졌다.

이제까지 안정적이던 호흡이 가빠지고, 이마 위로 땀이 쉴 새 없이 흘렀다.

그녀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는지 빠져나가는 물줄기가 줄어들고, 유입되는 물줄기가 많아졌다. 말라붙었던 연못에 다시금 물이 찼다.

종리연이 손을 분주히 움직였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운 연못 벽을 보강하고, 유입되는 통로를 넓혔다. 일련의 과정은 고도의 정신 집중을 요구했다.

종리연은 그 모든 과정을 훌륭히 해냈다.

명천의 연못에 물이 차고 있었다. 명천의 등까지 적신 물은 끝을 모르고 차올랐다. 거대한 연못에 물이 가득 고였다.

잉어는 자유를 얻었고, 언제 숨이 가빴냐는 듯이 물속을 자유롭게 헤엄쳤다. 하지만 연못은 좁아서 잉어가 마음껏 활개 치기 힘들었다.

잉어는 더 큰 연못을 원했다. 그리고 종리연은 그런 잉어를 위해 연못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콸콸콸!

물이 아예 강을 이뤄 연못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연못은 이제 더 이상 연못이라고 부를 수 없게 될 만큼 확장됐다. 연못은 호수가 되었고, 잉어는 답답함을 느끼지 않았다.

잉어는 더 큰 자유를 느끼기 위해 육체를 탈피하기로 했다. 잉어의 본체를 덮었던 비늘들이 하나둘씩 떨어져나가고 맨몸이 드러났다.

구속하던 비늘이 떨어져 나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몸이 꿀렁꿀렁 요동쳤다. 몸이 길어지고, 확장됐다. 주둥이가 쭉 삐져나오고 이빨이 자랐다. 두 줄기 수염이 크게 길어지고, 미끄러운 몸통에 새로운 비늘이 돋아났다. 그리고 두 쌍의 다리가 생겨났다.

잉어는 그렇게 용이 됐다.

용은 하늘로 올라갔다.

담호는 그 광경을 빠짐없이 지켜보았다.

실제로 그 순간 명천은 이제까지 자신을 지배해 오던 지긋지긋한 천형을 벗어던지고 새로 태어나는 중이었다.

뼈가 뚜둑거리는 소리와 함께 최적의 위치로 이동을 하고, 피부가 벗겨졌다. 새롭게 살이 돋아나고, 볼품없이 마르기만 했던 육체에 근육이 만들어졌다.

“타, 탈태환골(脫態換骨)?”

종리연이 비명성을 내뱉었다.

그녀의 침술은 명천의 병을 치료하기 위한 것. 그 안에는 탈태환골을 일으키는 묘용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이, 이건 내 침술 때문이 아니야. 도대체…….”

누군가 명천의 몸에 무언가 안배를 해두었다. 종리연의 침술이 안배를 깨우는 촉매가 되었고.

영문을 알지 못하는 종리연은 눈앞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입만 뻐끔거리고 있을 뿐이다.

담호는 감각의 영역을 확장시켰다.

순간 이제까지 걸리지 않던 그 무언가가 감각에 걸렸다.

산악만큼이나 거대하고 단단한 존재감을 가진 무언가가.

담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담호가 그를 인지하는 순간, 그 역시 담호를 인지했다.

우웅!

순간 공명이 일어났다.

공명은 널리널리 울려 퍼졌고, 담호는 그 속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담호의 눈빛이 깊이 침잠됐다.

그는 열린 창문으로 몸을 날려 건너편 집 지붕 위로 올라갔다.

지붕 위에는 그 말고도 선객이 있었다.

칠 척의 거구를 가진 거한, 커다란 덩치와 어울리지 않는 순박한 얼굴, 하지만 어둠 속에서도 그의 눈은 마치 화등잔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의 허리엔 광목천으로 둘둘 만 커다란 도가 덜렁거리고 있었다.

우우웅!

그와 마주하자 둘 사이의 공명음이 걷잡을 수 없이 증폭됐다.

공명은 같은 크기의 울림을 가진 존재가 만났을 때야만 일어난다. 그 말은 곧 눈앞에 있는 상대가 담호만큼이나 크고 강력한 울림을 갖고 있다는 뜻.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렇게 보게 되는군, 권마.”

“너는?”

“내 이름은 검율천일세.”

남자, 검율천이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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