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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화 3장. 용과 호랑이의 시대(2)
해소월은 삭주 지부의 후원을 홀로 거닐었다.
삭주에 온 지 벌써 몇 달이 되었지만, 아직도 이곳의 삶이 익숙하지가 않았다.
“응?”
홀로 후원을 걷던 해소월의 눈에 누군가 들어왔다.
달빛을 받은 채 홀로 서 있는 남자는 그녀도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운경 도장.’
화산파에서 현소 진인을 모셔 가기 위해 파견 나온 도사였다. 하지만 화산파 출신이라는 것보다 그가 담호의 사형이었다는 사실이 더 그녀의 호기심을 끌었다.
“아! 해 소저구려.”
운경이 해소월의 등장을 알아차렸다.
“죄송해요. 사색하시는 데 방해를 해서…….”
“아닙니다. 그런데 해 소저는 어쩐 일로 이 야심한 시각에 홀로 거니시는 겁니까?”
“그냥 잠이 오지 않아서요.”
“저도 그렇습니다.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는군요.”
“머무시는 데 불편함은 없으신지요?”
“해 소저와 지부장님 덕분에 편히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저희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현소 진인과의 일은 잘 진행되고 있으신가요?”
“하하! 부끄럽습니다. 아직 사숙의 앙금이 가라앉지 않으셔서 그런지 쉽지가 않습니다.”
운경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미 모든 것을 지켜본 해소월이었다. 이제 와서 숨겨야 할 이유가 없었다.
해소월이 잠시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런 해소월의 표정에서 운경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다.
잠시 망설이던 해소월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얼마 전 현소 진인과 만나셨을 때요.”
“예?”
“그때 하영이란 아이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삼촌 이야기를 하더군요.”
“삼촌?”
“현소 진인의 옛 제자를 그렇게 부르더군요.”
“아! 천경 말씀입니까?”
“그 사람의 이름이 담……호 맞나요?”
“그 아이가 그런 이야기도 했습니까? 사실입니다. 천경의 속명이 담호입니다.”
“그럼?”
“세상엔 권마라는 별호로 더 유명하더군요.”
해소월이 눈을 감았다.
하영이에게 들었을 때만 해도 크게 와 닿지 않았는데, 운경에게 직접 이야기를 들으니 이상하게 충격이 컸다.
해소월의 표정에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운경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렇습니까? 해 소저. 혹시 천경을 아십니까?”
“예전에 만난 적이 있어요.”
“그렇습니까?”
운경이 호기심을 드러냈다.
세상에 권마라는 별호로 유명한 담호였지만, 정작 화산파가 그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그저 세상에 알려진 단편적인 행보가 다였다.
“천경은 어떻습니까? 여전히 화산을 원망하고 있습니까?”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사문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없어요.”
“으음!”
짐작은 했지만 해소월에게 이야기를 들으니 더욱 가슴이 아팠다.
차라리 화산을 원망하고 그리워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가슴이 후련했을 텐데, 담호는 아예 화산파를 잊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지금 상황에선 화산파에 원한을 갖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런데도 사문의 어른들은 어떻게든 담호를 이용하기 위해 현소 진인을 끌어들이려고 했다.
운경은 참으로 몹쓸 짓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역시 화산에 속해 있는 도사. 장문인의 명을 어쩔 수 없이 받들어야 했다.
“혹시 천경이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무림맹에서 헤어진 이후 바로 이곳으로 왔기에 저도 알지 못해요.”
“그렇군요.”
운경이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을 때였다.
화학!
갑자기 삭주 지부 정문 근처에 있는 전각에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부, 불이다.”
“야습이다.”
뒤이어 사람들의 목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두 사람의 안색이 싹 변했다.
“무슨?”
먼저 반응한 이는 해소월이었다.
그녀가 경공을 펼쳐 불이 난 곳으로 달려갔다. 뒤이어 운경 도장이 몸을 날렸다.
“이럴 수가!”
정문에 도착하니 침입을 한 무인들과 삭주 지부의 무인들 간의 일대 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쉬가악!
검광이 번뜩일 때마다 무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삭주 지부를 침입한 무인들은 거칠 것 없이 살육을 자행하고 있었다.
“무량수불!”
원경은 망설일 틈도 없이 전장에 뛰어들었다.
저들의 정체가 무언지 모르지만, 일단 삭주 지부의 무인들을 구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반면 해소월은 차가운 시선으로 전장을 노려봤다.
“마교구나.”
그래도 몇 번 마교와 격돌한 적이 있는 그녀였기에 단숨에 침입자들의 정체를 눈치챘다.
마교의 무인들에겐 중원의 무인들과 다른 음습한 분위기가 존재했다. 일단 한번 경험하면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그 순간 마교 무인들 사이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하하! 내가 바로 신교의 대력패마(大力覇魔) 고산웅이다. 무림맹의 찌끄러기 따위는 단박에 쓸어 주마.”
대력패마 고산웅은 마교에서도 알아주는 고수였다.
그가 이끌고 온 무인들은 삭주 지부의 기를 꺾기 위한 일종의 선발대였다.
마음껏 날뛰고 파괴하라는 것이 그들이 받은 명령의 전부였다. 고산웅은 명에 충실해 학살을 자행하고 있었다.
탓!
해소월이 고산웅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녀의 애검 벽상이 시린 빛을 흩뿌렸다.
“냄새나는 암캐가…….”
고산웅이 겁도 없이 자신에게 덤벼드는 해소월을 향해 일권을 날렸다.
콰아아!
강력한 권기가 공기를 발기발기 찢어발겼다. 하지만 해소월은 고산웅의 권을 피하지 않고 검을 내리그었다.
쉬가악!
그녀의 검에 맺힌 검기가 폭발했다.
두 사람이 격돌했다.
그때까지도 그들은 몰랐다. 그들의 싸움으로 무림의 운명을 건 대전(大戰)이 시작되고 있음을.
이곳에서 시작된 싸움이 무림 전체를 전화로 번져 갈 것을.
***
낙양(洛陽)은 천 년의 역사를 가진 고도였다.
아홉 왕조의 도읍이라는 이야기가 돌 정도로 많은 나라들이 낙양에 수도를 두었었다. 특히 학문과 문화의 중심지로 이름이 높았으며, 수많은 문사들과 당대의 명인들을 배출했었다.
십만여 개의 불상이 있는 용문석굴(龍門石窟), 중원 최초의 불교사원이라는 백마사(白馬寺)가 유명했다.
무엇보다 낙양 인근에는 중원 무림의 태두라는 소림사가 있었다. 그 때문에 낙양이라는 도시는 불교적인 색채를 물씬 풍겼다.
진화객잔은 낙양의 남문 외곽에 위치한 제법 큰 객잔이었다. 비록 외곽에 있다고 하지만 제법 커다란 마사와 마당을 가지고 있기에 수많은 상단들이 이곳에 거처를 정하곤 했다.
진화객잔의 점소이는 정문으로 들어서는 두 필의 말을 보고 득달같이 달려갔다.
“어서 옵셔!”
말 위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목도리로 얼굴과 목을 둘둘 둘러싸서 진면목을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체형으로 미뤄 보아 한 명은 남자고, 또 한 명은 여자라는 사실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여자로 짐작되는 이가 물었다.
“방 있느냐?”
“물론입니다.”
“그럼 두 개를 준비해다오.”
“하나가 아니구요?”
“따로 잘 것이다.”
“알겠습니다요. 조그만 방 두 개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고맙다.”
“먼저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방은 말을 마사에 집어넣은 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점소이의 대답에 두 사람이 말에서 내려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이야! 끝내주는구나.”
점소이가 두필의 말을 보며 중얼거렸다.
진화객잔에서만 삼 년을 일했다. 당연히 수많은 말을 봐 왔다. 하지만 그 어떤 말도 방금 전 손님이 맡긴 검은 말처럼 멋있지는 않았다.
검은 말이 움직일 때마다 검은 털이 마치 비단처럼 물결치고 있었다. 그 모습이 황홀하기까지 했다.
“아!”
점소이가 자신도 모르게 검은 말의 어깨를 쓰다듬었을 정도였다.
마사 안으로 들어가자 다른 말들이 검은 말의 위세에 겁을 먹고 연신 투레질을 했다.
순식간에 마사 안에 말들의 울음소리로 시끄러워졌다.
여인이 객잔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목과 얼굴을 가리고 있던 목도리를 풀었다. 그러자 아름다운 얼굴이 드러났다.
“휴!”
그녀는 바로 종리연이었다.
종리연의 곁에 있는 남자는 바로 담호였다. 담호도 이제까지 얼굴을 가리고 있던 목도리를 풀고, 객잔 내부를 둘러봤다.
수많은 이들이 삼삼오오 탁자에 앉아 있었지만, 누구도 새로 들어온 두 사람에게 신경을 쓰는 자는 없었다.
종리연이 빈자리로 담호를 이끌었다.
“우리 저기 앉아요.”
담호는 묵묵히 그녀를 따랐다.
여강을 떠난 지 엿새 만에 이곳 낙양에 도착했다. 때문에 종리연의 얼굴엔 피곤한 빛이 가득했다.
명천이 사라지면서 가장 곤란하게 된 사람은 바로 종리연이었다. 갈 곳을 정하지 못한 종리연은 그냥 담호를 따라 이곳까지 왔다.
무슨 이유에선지 담호는 종리연을 내치지 않고 동행을 허락했다.
“정말 힘드네요.”
종리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별다른 사건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쉬지 않고 말을 달리다 보니 부쩍 체력이 떨어졌다. 그 때문에 그녀의 얼굴에는 피곤한 빛이 가득했다.
담호는 말없이 종리연을 바라봤다. 그에 종리연이 쑥스러운 표정으로 얼굴을 붉혔다.
그때였다.
“그 소문 들었는가?”
근처 탁자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그들의 귀에 들렸다.
대화에 열중하고 있는 이들은 오늘밤 객잔에서 묶는 상인들이었다.
“무슨 소문?”
“삭주에서 무림맹과 마교가 격돌했다고 하네.”
“그게 어디 한두 번 있었던 일인가? 작년에도 백은에서 싸움이 있었지 않은가?”
“이번에는 다르네.”
“뭐가?”
“싸움의 규모와 흉험함이 다르다 이 말이네.”
“단 하룻밤의 격돌에 불과할진대 벌써 수백 명의 사상자가 났다고 하네. 하마터면 삭주 지부가 괴멸할 뻔했다는 뜻이지.”
“으음!”
“마침 삭주에 파견 나가 있던 화산파의 운경 도장과 해남파의 해 소저의 도움이 없었다면 전멸할 뻔했다고 하네.”
“정말인가?”
담호가 자신도 모르게 상인들을 바라봤다. 그가 아는 두 사람이 언급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실도 모르고 상인들은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정말이라네.”
“어허! 그런 일이. 그럼 산서성 쪽은 더욱 험악해지겠군.”
“이르다 뿐인가? 무림맹에서도 삭주에 고수들을 더 파견했다는군.”
“그럼 마교도?”
“그렇겠지? 우리야 모르지만 이미 지원 병력이 가지 않았겠는가?”
“지옥도가 펼쳐지겠군.”
상인들이 몸서리를 쳤다.
천하를 떠돌면서 상행을 하는 상인들이었다. 난세가 오면 재물은 더 많이 벌겠지만, 대신 목숨이 위험했다.
특히 이렇게 직접적인 전쟁이 벌어지는 삭주 같은 곳은 정말 어지간한 각오가 없으면 갈 수가 없었다.
“당분간 산서성의 상행은 하지 말고 사태의 추이를 지켜봐야겠군.”
“나도 같은 생각일세. 돈이 아무리 중하다고 하지만 목숨을 잃으면 아무런 소용도 없으니까.”
“휴! 술이나 한잔하세. 도대체 세상이 어찌 되려고 이러는 건지.”
“내말이 그 말일세.”
“힘이 없는 놈은 그냥 조용히 죽어 있어야지.”
상인들이 씁쓸한 표정으로 술잔을 기울였다.
담호는 이상하게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운경이란 도호 때문도 아니었고, 해소월이라는 이름 때문도 아니었다. ‘삭주’라는 지명을 듣는 순간부터 그랬다.
담호가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