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
184화 3장. 용과 호랑이의 시대(3)
현광 진인은 화산파의 현 자 배 장로 중 한 명이었다. 원래 조용한 성품을 가진 데다가 현 자 배 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어리다 보니 대외적으로 나설 일이 거의 없었다.
그 때문에 화산파에서도 일대제자를 제외한 이들은 그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평소 화산의 산문 밖으로 나오는 일이 거의 없는 현광 진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화산의 산문을 벗어났을뿐더러 하남성 낙양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낙양의 남문 근처에 있는 화양객잔에 머물고 있었다. 화양객잔은 낙양에서도 가장 크고 화려한 객잔이었다. 가난한 자들이나 낭인들은 감히 발도 들일 수 없는 곳이었다.
현광 진인은 화양객잔의 별채에 머물고 있었다.
“휴! 평생 화산 밖으로 나올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그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십니까? 사부님.”
바로 곁에 있던 호경이 물었다.
호경은 현광 진인의 하나뿐인 제자였다. 그 역시 현광만큼이나 조용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부의 수발을 들기 위해 동행하고 있었다.
호경은 평생을 화산에서 보냈다. 그가 산문 밖을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현광 진인이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호경을 바라봤다.
“아무것도 아니다. 불편한 곳은 없느냐?”
“없습니다.”
“나 때문에 너까지 번거롭게 만들었구나.”
“아닙니다. 사부님과 함께할 수 있어 저는 오히려 기분이 좋습니다.”
“말만이라도 고맙구나.”
“빈말이 아닙니다.”
“알고 있다.”
제자의 순수함에 현광 진인이 잠시 시름을 잊었다.
현광 진인이 화산을 내려와 낙양에 온 것은 바로 소림사와 접촉을 하기 위해서였다.
화산파의 장문인이 현천 진인은 소림사와 보다 긴밀한 협조를 하길 원했다. 아무래도 무림의 태산북두라는 소림사와 연계를 하면 좀 더 수월하게 마교에 대응할 수 있을 거란 판단 때문이었다.
현재 화산파의 주요 인사들은 각각 다른 중요한 임무를 맡아 여유가 없었다. 그 때문에 상대적으로 한가한 현광 진인을 보내 소림사와 협조 방안을 의논케 한 것이다.
호경이 물었다.
“사부님, 그럼 소림사엔 내일 올라가시는 겁니까?”
“우리는 소림사에 올라가지 않는다.”
“예?”
호경이 의뭉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림사에서 사람을 보낼 것이다.”
“이곳으로 말입니까?”
“그렇다.”
“누가?”
“나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주요 인사가 오지 않겠느냐?”
“그냥 저희가 올라가면 되는 것이 편하지 않습니까?”
“이곳에도 분명 마교의 시선이 있을 터. 화산파가 소림사와 접촉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들이 가만있을 것 같으냐?”
“그렇군요.”
그제야 호경이 이해가 되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생을 화산의 울타리에서만 보내다 보니 호경은 너무나 순수했다. 그 때문에 속세의 더러움이나 음모 같은 것을 알지 못했다.
자신의 제자만큼은 될 수 있으면 속세의 때를 묻히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이 어지러우니 언제까지 자신의 욕심만을 고수할 수는 없었다. 그 점이 못내 안타까운 현광 진인이었다.
현광 진인이 창밖을 바라봤다.
마교의 등장으로 인해 천하 곳곳이 혼란에 빠져들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 낙양은 마치 별세계인 양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예전보다 위축된 것은 분명하지만, 수많은 이들이 밤거리를 거닐면서 술을 마시거나 여흥을 즐기고 있었다.
그 모습이 못내 이해가 되지 않는 현광 진인이었다. 산에서만 평생을 살아온 그에겐 이런 백성들의 모습이 이질적으로 보였다.
“참, 그 이야기 들으셨습니까?”
“무슨 이야기 말이냐?”
“운경 사형 말입니다.”
“응?”
현광 진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에 호경이 말을 이었다.
“운경 사형이 삭주에 머물고 계시다 합니다.”
“그 아이가 왜 삭주에? 혹시 현소 사형을 찾은 것이더냐?”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당분간 삭주에 머물 거라는 전서를 보내왔다고 합니다.”
“으음!”
현광 진인의 표정이 굳었다.
현소 진인은 그에게 사형이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친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각자의 사부가 다르고, 또 서로 간에 워낙 번잡한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현소 진인이 담호를 제자로 들이고 곤란을 겪는 것을 알면서도 딱히 도와주거나 나서지 않았다. 일련의 행위들은 현광 진인에게 마음의 부담으로 남아 있었다.
“잘 지내고 계시는지 모르겠구나. 부디 아무 일도 없으셔야 할 텐데.”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그래도 화산파의 장로신데.”
“하지만 무공을 익히지 않았으니 최소한의 자구책도 없지 않느냐?”
“그런 분 밑에서 어떻게 권마가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호경도 담호를 알고 있었다.
다리를 저는 화산의 제자.
장로들은 담호를 배척했고, 제자들은 담호를 비웃었다.
부끄럽지만 호경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다리를 저는 담호를 보며 절름발이가 화산의 물을 흐린다고만 생각했었다.
그 때문에 담호가 십삼 년 전에 화산으로 돌아오지 못했어도 크게 아쉽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담호가 있었단 사실마저도 잊어버리고 살았다.
그렇게 기억 속에서 잊혀졌던 담호가 다시 살아난 것은 불과 몇 달 전이었다.
수많은 무인들을 쓰러트리면서 강호에 악명을 떨친 권마가 사실은 화산파의 수치였던 담호라니.
처음엔 소문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화산파의 최고 기재였던 명경마저 담호에게 패배를 인정하자 믿을 수밖에 없었다.
모두에게 천시받던 담호는 어느새 절대의 고수가 되어 있었고, 화산뿐 아니라 천하에서도 인정을 받고 있었다.
비록 강호 공적으로 몰려 배척을 받고 있었지만, 천하를 압도하는 무력만큼은 진짜였다.
현광 진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휴! 모두가 잘못한 게야. 도를 쌓는 도사가 어찌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그리 배척을 했는지.”
“부끄럽습니다. 저 역시 천경 사제의 겉모습만 보고 멀리했으니까요.”
“이제 와서 무슨 면목으로 그 아이를 다시 화산으로 끌어들이려는 건지. 도무지 장문인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구나. 더구나 무림맹에서는 그 아이를 강호 공적으로 지목하지 않았더냐?”
“그쯤은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차피 무림맹을 완전히 믿는 것도 아니구요.”
“그렇겠지. 조삼모사 하는 것이 사람 마음이라지만 화산이 이럴 줄은 정말 몰랐구나.”
현광 진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때였다.
똑똑!
갑자기 누군가 별채의 문을 두들겼다.
현광 진인과 호경의 눈에 긴장의 빛이 어리는 순간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광 진인, 전 소림에서 온 광해라고 합니다.”
“광해?”
현광 진인과 호경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광 자 배라면 소림의 장로 항렬이었기 때문이다.
현광 진인이 서둘러 문을 열어 주었다. 그러자 허연 수염을 가슴까지 기른 노승려의 모습이 보였다.
이마에 찍힌 아홉 개의 붉은 계인, 그리고 눈에 어린 혜광.
누가 설명해 주지 않아도 노승이 소림사의 승려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무량수불! 저는 화산에서 온 현광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소림의 고승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고승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원래라면 광문 사형이 오셨어야 하지만 예상치 못한 상처를 입어 제가 대신 왔습니다.”
“저런!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광해가 대답대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세상에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현재 소림사는 큰 피해를 입은 상태였다. 얼마 전 외인의 침입으로 백팔나한은 물론이고 광문까지 큰 내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림의 희망이라 불리던 소천까지 중상을 입고 치료를 받고 있었다.
흉수는 단 두 명이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소림에 피해를 끼친 이는 남자 한 명이었다. 그 때문에 지금 소림사는 초상집 분위기였다.
소림사가 굳이 약속 장소를 낙양에 정한 것도 상처투성이 소림사의 모습을 보여 주기 싫었기 때문이다.
광문의 등 뒤로 젊은 승려들 십여 명이 보였다. 광문을 따라온 소림사의 일, 이대 제자들이었다. 그들은 호기심이 담긴 시선으로 현광 진인과 호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현광 진인이 호경에게 말했다.
“너는 나가서 저들과 함께 별채를 지키거라.”
“예! 사부님.”
호경이 대답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이번 기회에 소림사의 젊은 승려들과 인연을 맺으라는 사부의 배려였다. 원래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호경이었지만, 그런 사부의 배려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아미타불!”
소림사의 젊은 승려들이 미소로 호경을 맞아 주었다.
제자들이 모두 나가자 현광 진인과 광문이 마주 앉아 의논하기 시작했다.
화산파와 소림사를 대표해 나온 두 사람이었다. 그들은 각자 자파의 입장을 전달하고 의견을 조율하기 시작했다.
그 시간 호경은 소림사의 제자들과 함께 별채 정문에서 대화를 하고 있었다.
“화산은 어떻습니까? 아무래도 전방에 위치하다 보니 많이 불안하실 것 같은데요.”
“사실입니다. 아무래도 삼십 년 전의 일이 있다 보니 더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마교의 침공이 더 거세지고 있으니 걱정입니다.”
“무림맹이 잘 막아 주지 않겠습니까? 누가 뭐래도 전 무림의 힘이 결집된 단체니까요.”
“아미타불!”
소림이나 화산이나 불안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호경과 소림사의 제자들은 아직 젊었다. 젊은 만큼 패기가 넘치기도 하지만, 확신할 수 없는 미래 앞에서는 절로 심신이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들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눌 때였다.
“미안하네만 이곳이 소림사와 화산파의 비밀 회합이 벌어지고 있는 곳 맞는가?”
“헉!”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호경과 소림사의 승려들이 기겁을 했다.
고개를 돌리니 바로 앞에 적발(赤髮), 적염(赤髥)의 노인이 생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노인의 등 뒤로 십여 명의 무인들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 언제?”
호경의 얼굴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비록 한가하게 대화를 하고 있었다지만 감각마저 닫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노인과 무인들은 그들의 감각을 감쪽같이 속인 채 바로 앞에까지 다가와 있었다.
노인이 마음만 먹었다면 그들은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호경이 마른침을 억지로 삼키며 물었다.
“노, 노인장은 뉘시오?”
“허허! 예의를 모르는 후학이군. 질문은 내가 먼저 한 것 같은데. 이곳에서 소림과 화산의 회합이 벌어지냐고.”
호경과 승려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노인이 활짝 웃었다.
“내가 쓸데없는 걸 물은 것 같군. 이렇게 민 대머리가 눈앞에 있는데 말이다. 당연히 소림사에서 나왔겠지. 그리고 너희들은 화산파에서 나왔을 테고.”
노인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하지만 호경과 승려들은 그 웃음을 보는 순간 정체를 알 수 없는 공포를 느끼고 몸을 흠칫 떨었다.
그들이 경공을 펼쳐 뒤로 물러나며 소리쳤다.
“습격이다.”
“쯧! 정말 예의가 없는 녀석들이로고.”
노인이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저었다. 마치 날벌레를 쫓듯 간단한 동작이었지만 그 속에 엄청난 경력이 담겨 있었다.
쩌어엉!
강렬한 충격에 공기가 터져 나갔다.
“커헉!”
“흡!”
호경과 승려들이 피를 토하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흑심마수(黑心魔手), 노인이 펼친 무공의 이름이었다.
일인 전승으로 내려져 오는 무공으로, 그만큼 강대한 위력을 자랑했다.
“호경아!”
“현천, 우천.”
현광 진인과 광해가 튀어나왔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제자들의 모습을 본 그들이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노인을 향해 각자의 절기를 펼쳤다.
매화청심장(梅花淸心掌)과 적멸조(敵滅爪).
화산파와 소림사 내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절기였다.
콰아아!
두 사람의 장심에서 발출된 엄청난 경기가 노인을 향해 밀려갔다.
콰앙!
하지만 그들이 펼친 무공은 노인의 흑심마수에 의해 간단히 파훼됐다.
“큭!”
“아미타불!”
그들이 쿵쿵거리면서 뒤로 물러났다. 그들이 디딘 바닥에 깊은 족적이 새겨졌다.
노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
“쓸데없는 반항은 고통만 가중시킬 뿐이지.”
“당신은 뉘시오?”
현광 진인이 입가에 묻은 피를 소매로 닦으며 물었다.
“이미 알고 있으면서 뭐하러 묻는 겐가?”
“마교?”
“내 이름은 온상천이라고 하네.”
온상천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저 미묘한 웃음만 지었을 뿐이다.
현광 진인은 상대의 반응으로 마교도라고 확신했다. 마교의 무인이 아니고서야 그들을 습격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온상천이 양손을 활짝 펼쳤다. 그러자 그의 양손이 검게 물들어 갔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현광 진인과 광해가 눈빛을 교환한 후 합공했다.
콰아앙!
화양객잔에 굉음이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