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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187화 (187/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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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화 4장. 운명은 때로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른다(3)

종리연은 마치 고양이처럼 담호를 은밀히 훔쳐보았다.

평소처럼 표정 없는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마치 철갑을 씌운 듯한 얼굴이었다.

종리연은 담호가 화가 났다고 생각했다. 남들이 보기엔 똑같은 얼굴이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미묘하게 달라 보였다.

지금 담호는 화가 나 있었다. 그것도 매우 많이.

‘사부 때문인가?’

현광 진인에게 사부가 화산이 아닌 삭주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담호는 저랬다.

너무 무서워서 함부로 말을 붙일 수도 없었다.

종리연은 입술을 꾹 다문 채 담호의 뒤를 따랐다. 소신대로 살기에 거칠 것이 없는 종리연이었지만, 그녀에게도 눈치라는 게 있었다.

담호는 원래 머물던 객잔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가 머물던 객잔은 반파되어 더 이상 머물 수 없었다. 결국 담호와 종리연은 간단히 짐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그나마 마구간은 멀쩡해서 흑귀와 종리연의 말은 무사했다.

두 사람이 말을 끌고 밖을 나올 때였다.

“아미타불! 시주, 잠시 멈춰 주시겠습니까?”

누군가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그들은 바로 소림사의 광해와 젊은 승려들이었다.

담호의 시선이 광해를 향했다.

“뭐지?”

담호의 눈빛을 정면으로 받는 순간 광해가 움찔했다.

‘무슨 눈빛이?’

소림사의 장로인 그조차도 가슴이 섬뜩해질 만큼 광포한 기운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는 소림의 장로였다. 재빨리 정신을 수습하고 말문을 열었다.

“소승은 소림의 광해라고 합니다.”

“그래서?”

“시주께서 바쁘신 줄은 알지만 잠시 대화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

“시주를 귀찮게 하거나 발목을 잡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잠시만 시간을 내주셨으면 합니다.”

“난 권마야.”

“알고 있습니다.”

“무림맹이 강호의 공적으로 지목했지.”

“그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아미타불! 그렇습니다.”

광해가 담호를 빤히 바라봤다. 그런 그의 눈빛은 무척이나 맑고 순수해서 그 어떤 다른 의도도 엿보이지 않았다.

“따라와!”

담호가 낙양 남문을 빠져나왔고, 종리연과 소림의 승려들이 그 뒤를 따랐다.

한가한 곳에 도착하자 담호가 광해를 바라봤다.

“말해 봐.”

“아미타불!”

불호를 외우는 광해의 얼굴에 잠시 갈등의 빛이 떠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그가 말을 이었다.

“나중에 시간이 되실 때 한번 본파에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소림에?”

“그렇습니다.”

“내가 왜?”

“시주께 꼭 소개해 드리고 싶은 분이 있습니다.”

담호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기분 나쁜 표정으로 오해했는지 광해가 급히 말을 이었다.

“시주께도 나쁜 일은 아닙니다. 그것은 제가 소림의 명예를 걸고 보증할 수 있습니다.”

“누구지?”

“그건 지금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시주께 절대로 해가 되는 분은 아니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담호가 광해를 빤히 바라봤다. 광해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봤다. 그런 그의 눈에는 굳은 신념이 담겨 있었다.

평생을 불법에만 전념해 온 노승의 눈에 담긴 순수한 의도를 읽지 못할 만큼 담호는 어리석지 않았다.

“언제 간다고 약속할 수는 없어. 하지만 시간이 된다면 한번 가지.”

“아미타불!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감사합니다, 시주. 어려운 부탁을 들어주셔서.”

“…….”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저희 소림은 시주께서 강호의 공적이라는 것엔 하나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러니 시주께서도 신경 쓰지 마십시오.”

담호는 광해와 승려들을 죽음의 위기에서 구해 줬다. 세상의 평가가 어떻든 간에 입은 은혜는 반드시 갚아야 한다. 특히 명문정파인 소림사라면 더욱더 말이다.

담호는 분명 마인이었다.

마교의 무인들을 상대하는 그의 손속엔 한 치의 자비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담호의 심성이 마(魔)에 물들었다는 것은 아니었다.

비록 광포하기는 하지만 담호의 눈에 사기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심성이 마로 물든 자는 결코 저런 눈빛을 가질 수 없었다.

더군다나 상대는 화산파의 진전을 이은 자였다. 제아무리 사문을 부정하고 독자적인 노선을 걷고 있다고 하더라도 현문정종 화산의 가르침을 받은 자가 마도에 빠질 것 같지는 않았다.

“소림에 오셔서 광해를 찾아왔다고 전하면 안내해 줄 겁니다.”

“그러지!”

“어려운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광해가 담호에게 고개를 깊숙이 숙여 보였다.

소림의 장로라면 어지간한 문파의 장문인들보다 훨씬 더 영향력이 막강한 자리였다. 강호에서의 위치 또한 그랬다.

그런 광해가 담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는 사실 자체가 강호가 경악할 일이었다.

광해의 시선이 종리연을 향했다.

“신의께서도 시간이 되면 함께 올라오십시오.”

“저도요?”

종리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광해가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어요.”

잠시 담호를 힐끗 쳐다본 종리연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신의의 모습에 광해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마가 반듯하고, 정기가 가득하구나. 좋은 기운이 충만한 대지의 상(像)을 갖고 있으니 거목이 그 안에서 싹을 틔우리라.’

담호가 광해에게 말했다.

“이제 용건은 끝났나?”

“아미타불! 그렇습니다.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담호는 잠시 광해를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바로 삭주로 출발하려는 것이다. 그런 담호의 곁으로 종리연이 따라붙었다.

“같이 가요.”

두 사람이 말을 타고 멀어져 갔다.

광해는 한참 동안이나 제 자리에 서서 그들이 멀어지는 모습을 보았다.

그때 광해의 곁으로 제자 현천이 다가왔다.

“사부님, 어쩌시려고 그를 소림에 부르신 겁니까?”

“내 뜻이 아니다.”

“그럼?”

“이곳으로 오기 전에 사조님께서 말씀하셨다. 이곳에서 새로운 인연을 맺을 거라고. 악연일 수도 있지만, 잘만 하면 선연으로 바뀔 수도 있음이니 꼭 자신에게 데려오라 말씀하셨지. 나는 그저 화산파의 만남을 염두에 두고 그런 말씀을 하신 게 아닌가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권마와의 만남을 이미 알고 계셨던 게 아닌가 싶구나.”

“그런…….”

현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소림엔 살아 있는 전설이 존재한다. 지금 광해는 그 전설을 언급한 것이다.

***

동정호 변에서 보는 무림맹의 위용은 실로 무시무시했다. 마치 산처럼 우뚝 솟은 수많은 전각군은 보는 이의 숨을 막히게 하기 충분했다.

신창 남천산이 맹주가 된 이후 무림맹의 위상은 더욱 올라갔다. 특히 그의 명성을 흠모해 자발적으로 무림맹에 들어온 무인들이 많았다.

군사부는 무림맹의 심처에 위치해 있었다. 군사부의 주인은 바로 남궁창이었다. 군사부에는 남궁창 이외에도 수십 명의 문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들의 임무는 군사부로 들어오는 수많은 정보들을 분류하고 가공해서 남궁창이 읽기 편한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들어온 수많은 정보를 토대로 남궁창은 정세를 판단해 무림맹의 운용 방안을 수립한다.

“휴!”

남궁창이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금 전까지 그가 앉아 있던 자리엔 수많은 서신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남궁창이 군사가 된 이후 가장 먼저 한일은 바로 체계적인 정보망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그를 위해 하오문의 힘을 빌렸고, 여타 다른 문파에도 손을 뻗쳤다.

흡수할 수 있는 곳은 흡수하면서 무림맹만의 독자적인 정보망을 구축했다. 아직 초기 단계이긴 하지만 이대로 일이 년 정도만 시간이 흐른다면 천하에서 가장 방대한 정보망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때까지 어떻게 버티느냐였다. 마교는 지금 이 시간에도 중원 전역에서 도발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왜 그렇게 광범위하게 도발을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가슴이 답답했다.

전술의 기본 중 하나는 전력을 쓸데없이 분산시키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마교는 전력을 분산시켜 중원 전역의 문파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남궁창은 그 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얼 노리는 거지?”

적의 의도를 알아야 확실히 대응할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하다 보니 쓸데없이 소모전만 길어지고 있었다.

남궁창이 엄지로 양쪽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운공을 할 수도 있지만, 이렇게 하는 것이 혼탁해진 정신을 깨우는 데 훨씬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한참이나 관자놀이를 누르던 남궁창의 눈빛에 한기가 어렸다.

갑자기 본가인 남궁세가가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권마…… 그자 하나 때문에 남궁세가가 초토화되었구나.”

남궁세가 최후의 보루라는 검왕대가 전멸했고, 가주인 남궁천마저도 그에게 중상을 입고 돌아왔다.

신의를 데려와 소가주인 남궁무진의 주화입마를 치료하겠다는 계획도 실패로 돌아갔다. 그 때문에 지금 남궁세가의 분위기는 초상집이나 다름없었다.

남궁창은 무림맹의 군사였지만, 남궁세가의 직계이기도 했다. 남궁세가의 힘이 약해질수록 무림맹에서의 그의 입지 역시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권마…… 그자를 제거해야 해.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생각 같아서는 무림맹의 힘을 이용해서라도 담호를 제거하고 싶었다. 하지만 마교와 곳곳에서 충돌을 일으키고 있는 시점에서 따로 병력을 빼서 담호를 처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오죽했으면 강호 공적으로 지목했지만, 그를 추살하기 위한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을까.

남궁창이 입술을 질겅 깨물 때였다.

“군사님!”

문밖에서 누군가의 급박한 목소리가 들렸다.

남궁창은 상념에서 깨어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냐?”

“북방에서 급보입니다.”

“급보? 어서 안으로 들어와라.”

남궁창의 허락이 떨어지자 문사 한 명이 잰걸음으로 들어왔다. 그가 남궁창에게 붉은 첩지를 바쳤다.

남궁창이 급히 첩지를 펼쳤다. 첩지를 읽어 내리는 남궁창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이게 사실인가? 고현의 청운방이 멸문을 당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리들이 삭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

“정황상 마교의 무리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런데 그 전력이 심상치 않아 보입니다.”

“음!”

“청운방이라면 그래도 고현 지역의 패자인데 하룻밤 만에 전멸했습니다. 이대로라면 삭주 지부는 북쪽과 남쪽에서 동시에 협공을 받게 됩니다.”

“놈들의 전력은 얼마나 되나?”

“그게 아직 파악이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순식간에 청운방을 멸문시킨 것으로 봐서 대단한 전력을 갖췄다고 판단됩니다.”

“으음!”

남궁창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삭주가 있는 산서성엔 구대문파나 오대세가와 같은 거대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조그만 중소문파들이 많이 있지만, 그들의 힘은 고만고만해서 감히 마교에 대항할 수 없었다.

현재 산서성에서 그나마 마교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무림맹의 삭주 지부뿐. 만일 삭주 지부가 무너져 내리면 산서성은 마교에 의해 장악되고 만다.

마교가 단순한 무림 문파였다면 일개 성을 장악하는 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제아무리 거대 문파라 할지라도 일개 성을 넘어서는 영향력을 발휘하긴 힘들었으니까.

하지만 마교는 일반적인 문파가 아니라 종교 집단이었다. 종교가 민초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력을 끼치는지 남궁창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밑바닥 민심이 마교로 돌아서는 순간 그들의 교리는 전염병처럼 중원 전역으로 퍼져 나갈 것이다. 일단 한번 퍼져 나가면 절대로 막을 수 없다. 종교의 힘이란 그런 것이었으니까.

“지금 삭주로 보낼 수 있는 병력이 뭐가 있지?”

“현재 쓸 만한 전력들은 운남과 산동 쪽에 파견 나가 있는 상태입니다. 그들을 불러들인다고 해도 최소 한 달 이상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때면 늦어.”

“아! 백전문의 초연운 소협이 근처에 있습니다. 그들이라면 약간의 도움은 될 겁니다.”

“그럼 우선 그와 인근의 문파들을 삭주에 먼저 파견해. 나는 소림과 화산, 종남에 서신을 보내서 도움을 요청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문사가 급히 밖으로 달려 나가고 남궁창이 홀로 남았다.

“언제까지 이렇게 끌려다닐 수는 없어. 확실한 대응책이 필요해.”

쾅!

남궁창이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주먹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남궁창은 고통조차 느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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