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
188화 5장. 모르는 사이에 원한이 쌓인다(1)
초연운이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봤다.
현재 그가 있는 곳은 황량한 관도 위였다. 보이는 것이라는 척박한 대지와 누런 하늘뿐이다.
황량한 풍경은 초연운과 사제들의 가슴까지도 처지게 만들었다.
“휴!”
초연운이 한숨을 내쉬었다.
마교의 근거지를 찾아 중원 북부를 헤맨 지도 벌써 넉 달이 넘어갔다. 그동안 산서성 곳곳 뒤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하지만 어디서도 마교의 근거지라고 할 만한 곳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초연운과 사제들도 한참 지쳐 있는 상태였다.
곁에 있던 사제 정견휘가 은근한 목소리로 초연운을 불렀다.
“사형?”
“왜?”
“이제 그만 돌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글쎄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이상 산서성을 뒤져서 나올 것이 없습니다. 이 정도까지 했는데도 나오지 않는다면 산서성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내 생각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대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답답하구나.”
평소라면 격의 없이 농담을 주고받을 그들이었지만, 기약 없는 오랜 여정은 그들을 지치게 만들어 웃음기마저 앗아 갔다.
그때였다.
“대사형!”
일행 중 가장 나이가 어린 사제 상관수가 초연운을 불렀다.
“왜 그러느냐?”
“저기?”
상관수가 손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하늘에 매 한마리가 제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초연운의 눈이 빛났다.
“전서응?”
그가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매가 쏜살같이 내려와 그의 팔뚝 위에 앉았다.
매의 다리엔 조그만 연통이 매달려 있었다. 연통 안에는 조그만 서신이 돌돌 말려 있었다.
서신을 읽어 내리는 초연운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정견휘가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사형.”
“지금 당장 삭주 지부로 합류하라는 명령이다.”
“삭주 말입니까?”
“그렇다. 아무래도 삭주 지부가 마교의 표적이 된 모양이구나. 그래서 우리 보고 삭주 지부에 합류해 방비를 단단히 하라는 명령이다.”
“전황이 생각보다 심각한 모양이군요.”
“벌써 수많은 이들이 죽은 모양이야. 아무래도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할 것 같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형. 저흰 백전문의 무인들입니다. 각오는 진즉에 단단히 했습니다.”
“그래!”
초연운이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그들이 서 있는 관도 반대쪽에서 일단의 무리들이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먼 길을 온 듯 그들의 머리와 어깨 위에도 짙은 먼지가 쌓여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두 대의 짐마차를 끌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일대를 지나가는 표국이나 상인들 같았다.
“사형?”
“비켜서 그들이 지나가게 해 주거라.”
“알겠습니다.”
초연운의 명을 받은 정견휘가 사제들에게 명령해 길 한쪽으로 물러나게 했다. 그러자 무리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방립을 살짝 들어 감사의 뜻을 표했다.
초연운도 살짝 고개를 숙여 예를 취했다.
드드득!
마차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관도 위에 울려 퍼졌다.
초연운은 길 한쪽에 서서 그들 앞을 스쳐 가는 이들의 행색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하나같이 방립에 피풍의를 쓰고 있었고, 허리엔 고풍스러운 문양이 새겨진 검집이 걸려 있었다.
그들이 끌고 가는 짐마차 위에는 방립으로 얼굴을 가린 남자가 홀로 누워 있었다. 그는 잠을 자고 있는지 초연운 일행에겐 눈길도 주지 않았다.
방립을 쓴 무인을 바라보던 초연운은 마치 바늘로 미간을 쿡쿡 찌르는 느낌을 받고 흠칫했다.
‘뭐지?’
뒤를 이어 비릿한 혈향이 그의 후각을 자극했다.
초연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순간 마차 위에 있던 남자가 손을 들었다. 그러자 마차와 일행이 멈춰 섰다.
그가 몸을 일으켜 초연운을 바라봤다. 방립 사이로 그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감이 좋군.”
“너?”
“쯧! 어지간하면 그냥 지나가려 했는데.”
초연운이 사제들을 향해 외쳤다.
“모두 조심하거라.”
그의 목소리를 들은 사제들이 급히 뒤로 물러나 낯선 무리들을 경계했다.
방립을 쓴 남자가 고개를 흔들며 마차에서 내렸다.
초연운이 그를 노려봤다.
“너는 누구냐?”
“강호 초출이라 말을 해도 모를 거야.”
남자가 방립을 벗었다. 그러자 영준한 얼굴이 드러났다.
수려한 이목구비와 굳게 다문 입술, 그리고 날카로운 눈매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남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초연은 등골이 찌르르 울리는 것을 느꼈다. 남자의 몸에서 발산되는 기세가 그를 긴장되게 만든 것이다.
남자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특별히 자네에게만은 가르쳐 주지. 내 이름은 조자경이라네.”
“조자경?”
“이제 그쪽 이름을 밝히시지.”
“내 이름은 초연운이다.”
“취운룡?”
“나를 아나?”
“생각보다 거물이었군. 하필 이곳에서 만나다니.”
스스로를 조자경이라 밝힌 남자가 살짝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엔 이내 미소가 어렸다.
“어차피 만난 것 할 수 없지. 언제고 한번은 구무룡이라는 자들과 겨뤄 보고 싶었거든. 취운룡이라면 구무룡 대신으로 충분하겠지.”
그의 목소리에 살기가 실렸다.
초연운의 미간에 골이 패였다.
“마……교인가?”
무심코 내뱉은 한마디였다. 조자경은 그의 말을 부인하지 않았다.
“신교 번천대(翻天隊)의 대주 조자경이 내 진정한 신분이지.”
“그럼?”
“길에서 만난 것은 우연이지만, 자네와는 승부를 내고 싶군. 자네와 구무룡에 대해 하도 많이 들어서 말이야.”
조자경이 웃었다.
초연운이 맡은 혈향은 조자경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너무 많은 이들을 죽였기에 자연스럽게 혈향이 몸에 밴 것이다.
초연운이 이빨을 꽉 깨물었다.
“번천? 하늘을 뒤집는다고? 광오하군.”
“광오한지 아닌지는 경험하면 알게 될 걸세.”
조자경이 웃으며 초연운에게 다가왔다.
강력한 살기가 초연운을 덮쳐 왔다. 무공이 절정에 달한 이들도 위축되게 만들만큼 강력한 살기였다. 하지만 초연운은 추호도 위축되지 않았다.
이 정도의 살기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이보다 몇 배는 더한 살기의 소유자를 만나 본 적이 있었다. 그와 함께한 경험이 있기에 가공할 살기 아래서도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사제들은 아니다.
조자경의 살기에 압도당한 사제들이 전신을 경직시킨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초연운이 소리쳤다.
“모두 정신 차려.”
그의 사자후가 사제들의 정신을 일깨웠다.
순간 조자경의 수하들이 초연운의 사제들을 덮쳐 왔다.
그것을 신호로 초연운과 조자경이 격돌했다.
쉬익!
조자경의 검이 공간을 갈랐다.
어떠한 형식도, 초식도 없이 그저 최단 공간을 가를 뿐이다. 하지만 그 단순한 검술이 소름 끼칠 정도로 날카로웠다.
초연운의 신형이 속절없이 뒤로 밀렸다. 조자경은 한번 잡은 승기를 절대 놓치지 않았다.
그의 검이 마치 독사처럼 초연운의 요혈을 파고들었다.
쉬쉭!
살갗을 에는 검풍이 초연운의 피부를 아프게 자극했다.
초연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 녀석, 검로가 살아 있다.’
그 순간에도 조자경의 검은 초연운의 미간을 노리고 쏘아져왔다.
검신일체(劍身一體).
그러면서도 검기나 검강처럼 기(氣)를 소모하는 극단적인 수법은 하나도 쓰지 않는다.
지극히 효율적이면서도 극단적인 검공이었다.
단순히 초식을 수없이 반복해서 익힐 수 있는 검법이 아니다. 수많은 싸움과 혈투를 경험하면서 자연스럽게 몸에 배인 검법이었다.
초연운의 생각을 읽었는지 조자경이 싸늘히 말했다.
“전검류(戰劍流)라고 하지.”
쉬가악!
그러면서도 검은 멈추지 않았다.
마교의 역사는 천 년이 넘었다. 그 긴 세월 동안 수많은 지파(支派)가 마교 내에서 명멸했다.
전검류도 그중 하나였다. 천년이 넘도록 살아남은 지파. 그만큼 독특하고, 강했다.
전검류에 형(形)이나 초식(招式)처럼 틀에 박힌 검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때, 그때 상황에 맞게 검을 휘두르고, 살아남는다.
살아남을수록 강해지고, 끝까지 살아남은 자는 마교의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조자경은 전검류의 당대 전승자였다.
그의 검은 무척이나 독랄하고 무서웠다. 초연운의 전신에 상처가 생겨났다.
가벼운 피부의 상처부터 제법 깊은 상처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흥!”
하지만 초연운은 전혀 위축되지 않고 코웃음을 쳤다.
그가 전검류의 계승자라면 자신에겐 팔황신권(八荒神拳)이 있다. 그리고 팔황신권의 계승자는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
“하앗!”
그가 팔황신권의 절초를 펼쳐 냈다.
콰앙!
처음으로 검과 권이 격돌했다.
폭음과 함께 들썩이는 두 사람의 동체.
분명 적잖은 충격을 입었을 텐데도 누구 한 명 물러서지 않았다.
“제법이구나.”
“너야말로.”
두 사람의 검과 주먹이 다시 한 번 격돌했다.
까가가가강!
쇠로 만든 검과 피륙으로 된 주먹이 격돌했는데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챠앗!”
초연운이 팔황신권의 절초인 팔황만추(八荒萬椎)를 펼쳤다.
만근의 무게감을 지닌 공격이었다.
쩌어엉!
이제까지와 차원이 다른 쇳소리와 함께 조자경의 몸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그의 입가에 혈흔이 옅게 내비쳤다. 어느 정도 내상을 입은 것이다.
하지만 초연운의 안색이라고 딱히 좋지는 않았다. 그 역시 기혈이 들끓는 것을 느끼고 필사적으로 진정시키고 있었다.
조자경은 검기도 검강도 펼치지 않았지만, 그의 검에는 침투경과 같은 기운이 어려 있었다.
검으로 펼치는 침투경이라니? 듣도 보도 못한 공부(工夫)였다.
탓!
조자경의 몸이 가볍게 대지를 박찼다.
크게 곡선을 그리며 다가오던 조자경의 검이 반월(半月) 형의 검기를 발출했다.
반월겁(半月劫).
일반적인 검기와는 다른 전검류만의 독자적인 검기.
콰앙!
“크윽!”
처음으로 초연운의 입에서 답답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마치 거대한 쇠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전신이 아파 왔다.
분명 팔황신권의 절초로 해소를 했는데도 이 정도의 충격이라니.
초연운이 잠시 비틀거렸다. 하지만 이내 억지로 기혈을 다스리며 조자경을 향해 달려들었다.
“챠아앗!”
팔황신권의 절초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팔황복마(八荒伏魔), 팔황무적(八荒無敵).
콰콰쾅!
연신 폭음이 터져 나왔다.
폭풍 같은 기파가 사방으로 몰아치고, 부서진 돌 조각이 암기처럼 날아다녔다.
두 사람은 그야말로 미친 듯이 싸웠다.
싸우고, 또 싸우고, 그야말로 자신의 모든 것을 태우며 싸웠다.
두 사람의 전신은 피로 물들었다. 그런데도 누구 한 명 물러서지 않았다.
그야말로 싸움에 미친 악귀들 같았다.
서걱!
쾅!
초연운의 옆구리가 길게 베어져 나가고, 조자경이 바위에 얻어맞은 것처럼 큰 충격을 받고 튕겨 나갔다.
이번 상처는 꽤나 컸는지 두 사람 모두 엎어져 움직일 줄 몰랐다.
“사형!”
“대주!”
초연운의 사제들과 번천대의 무인들이 급히 두 사람에게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