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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189화 (189/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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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화 5장. 모르는 사이에 원한이 쌓인다(2)

담호는 흘러가는 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그가 앉아 있는 곳은 운마도강선의 갑판 위였다. 그의 마음은 이미 삭주에 가 있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삭주로 가기 위해선 수많은 산과 드넓은 강을 건너야 했다. 그 과정이 순탄할 리 없었다.

서두른다고 될 일이 아니었기에 담호는 오히려 느긋하게 마음먹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굳은 심지 하나뿐…….’

그러면 하늘이 알아서 길을 열어 줄 것이다.

하늘이란 것이 정말 있다면 말이다.

잠시 하늘을 바라보던 담호가 갑판 한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 종리연이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안색이 좋지 않은 노인을 진료하는 종리연. 그녀의 주위로 몸이 좋지 않은 이들이 모여들었다.

개중에는 무척이나 더러워 악취가 진동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종리연은 인상 한번 쓰지 않고 진맥했다.

“이 약방문을 가지고 약방에 가면 약을 만들어 줄 거예요. 하루에 두 번, 빠지지 않고 복용하세요. 알겠죠?”

“알겠습니다, 의원님. 정말 감사합니다.”

노인이 종리연의 손을 붙잡고 감사의 인사를 했다. 종리연은 그런 노인에게 몇 가지 당부를 한 뒤 다른 이들도 진맥했다.

대부분이 사정이 좋지 않은 이들이었다. 고가의 약을 살 형편이 되지 않는 것이다. 종리연은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약초들을 주재료로 약방문을 썼다.

종리연은 마지막 환자의 약방문까지 써 주고 난 다음에야 담호의 곁으로 돌아왔다.

“휴!”

그녀는 담호의 옆에 앉자마자 소매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 냈다. 잠시 앉아 있자니 뱃속이 요동쳤다.

“아! 배고프다.”

배를 탄 지 벌써 반나절이 지나고 있었다. 그동안 쫄쫄 굶었으니 배가 고픈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종리연이 담호를 바라봤다.

“숨겨 놓은 것 없어요?”

“…….”

“음식요. 없어요?”

“없어!”

“쳇!”

종리연이 크게 실망한 표정으로 굶주린 배를 부여잡았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담호는 방진보가 있었으면 좋았을 거라 생각했다.

방진보가 있었다면 금방 음식 한 그릇을 뚝딱 만들어 냈을 것이다. 하지만 담호는 더 이상 방진보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방진보는 황산에 남아 있었고, 그곳에서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갈 것이다.

그렇게 담호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의원님!”

앳된 목소리가 그의 상념을 깨웠다.

고개를 드니 이제 십여 세 정도로 보이는 어린아이가 조그만 보따리를 들고 앞에 서 있었다.

아이가 종리연에게 보따리를 내밀었다.

“저희 아빠가 의원님 드리래요.”

“너희 아빠가?”

아이의 아빠는 종리연이 맨 마지막에 진맥했던 환자였다. 오랜 기간 배앓이 때문에 고생했었는데, 제대로 된 의원을 만나지 못해 꽤나 악화되었던 상태였었다.

종리연이 바라보자 아이의 아빠가 어서 먹으라는 손짓을 했다.

보따리를 풀자 삶은 감자가 나타났다.

“와아! 이거 정말 먹어도 돼? 너희는?”

“저흰 또 있어요. 그럼 맛있게 드세요, 의원님!”

아이가 종리연에게 꾸벅 인사를 한 후 부리나케 아비에게 달려갔다.

종리연이 감자를 집어서 담호에게 건넸다.

“드세요.”

“…….”

“아빠의 정성이잖아요. 드세요.”

그러고는 자신도 감자를 크게 한입 베어 먹었다. 그녀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떠올랐다.

종리연은 겨우 감자 한 알로 행복해했다. 마음만 먹는다면 세상의 모든 재화를 긁어모을 수 있는 의술을 소유하고서도 겨우 이 정도에 만족을 하다니.

보통 사람이라면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종리연의 세계관이었다. 하지만 담호는 그런 그녀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백 명의 사람이 있으면 백 가지 서로 다른 가치관이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종리연은 자신만의 신념을 가지고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걷고 있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녀는 존중받기 충분했다.

담호는 종리연을 따라 감자를 크게 베어 물었다. 잘 삶아진 감자가 입안에서 으깨졌다.

“맛있죠? 그렇죠?”

옆에서 종리연이 재잘거렸다.

담호의 대답이 없어도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어떤 때는 혼자 질문하고 대답하기도 했다.

담호는 묵묵히 감자를 먹고, 종리연은 떠들었다. 그 모습이 묘하게 어울렸다.

감자를 다 먹었을 때 배가 강 건너에 도착했다. 배가 뭍에 닿기 전부터 내릴 준비를 했던 선객들이 서둘러 내렸다.

“의원님, 저희 먼저 가겠습니다.”

아들을 통해 감자를 보내온 아비가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하고 배를 내려갔다.

“안녕히 가세요.”

감자를 주었던 아이가 손을 흔들었다.

종리연도 미소로 그들을 보내 주었다.

“조심해서 가세요. 제가 준 약방문대로 꼭 약을 지어 먹고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을에 도착하는 대로 약을 지어 먹겠습니다.”

종리연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약방문대로 약을 지어 먹을 것을 당부했다. 그녀에게 진맥받은 사람들은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고 배에서 내렸다.

모든 사람을 보내고 나서야 종리연이 담호를 바라봤다.

“이제 우리도 내릴까요?”

“음!”

담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자를 먹어선지 몸이 제법 가볍게 느껴졌다.

담호가 흑귀를 데리고 배에서 내리려 할 때였다.

“저것 봐.”

“시, 시신이다.”

갑자기 선원들이 시끄럽게 떠들어 댔다.

강을 따라 십여 구의 시신이 떠내려 오고 있었다. 시신들의 몸에는 하나 같이 깊은 자상이 나 있었다.

“무림인들인가?”

“상류 쪽에서 싸움이 일어난 모양인데. 어휴! 무서워라.”

선원들의 얼굴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중원 전역에서 무림맹과 마교 간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단순한 무림 문파 간의 분쟁이 아니라, 천하의 운명을 건 전쟁이다. 그 여파는 이미 천하 곳곳에 미치고 있었다.

“당분간 선박 운행을 쉬어야겠구만. 괜히 횡액을 당하고 싶지 않으니까 말이야.”

선장의 말에 선원들이 한마디씩 더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휴! 언제 이 전쟁이 끝날지 암담하기만 합니다.”

“괜히 무림인들 간의 전쟁 때문에 우리 같은 사람들만 피해를 입는다니까.”

“쉿! 입조심하게. 무인들이 들으면 어떡하려는가?”

결국 듣다 못한 선장이 선원들 입단속에 들어갔다. 그제야 선원들이 담호가 아직 배에서 내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눈치를 봤다. 하지만 다행히도 담호는 별다른 말없이 흑귀를 데리고 배에서 내렸다. 그제야 선원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이 사람들아, 항상 입조심하게. 저들이 화가 나면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냥 씨 몰살이니까.”

“알겠습니다요.”

등 뒤로 들리는 선장과 선원들의 대화를 뒤로 하고 담호는 걸음을 옮겼다.

종리연이 담호의 곁으로 다가왔다.

“머지않은 곳에서 무림맹과 마교의 전쟁이 벌어진 모양이네요. 이곳에서는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갈지.”

그녀의 안색은 무척이나 어두웠다. 아무래도 생명을 살리는 것을 업으로 하는 의원인지라 이런 광경을 보면 가슴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가요. 괜히 우리도 휘말리기 전에.”

종리연이 먼저 말에 올라타 출발했다. 담호도 흑귀를 타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얼마나 갔을까?

갑자기 담호가 흑귀를 멈춰 세웠다. 뒤따라오던 종리연도 덩달아 말을 멈추며 물었다.

“왜 그러세요?”

“저기.”

담호가 고개로 전방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방향에 수많은 새 떼가 허공을 선회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종리연은 잘 알고 있었다.

“아!”

“그들의 싸움이 이곳까지 이어진 것 같군.”

담호의 말처럼 새떼가 선회하는 곳에는 수많은 시신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무척이나 치열한 싸움이 있었던 듯 시신들의 상태는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담호는 그 모든 광경을 담담한 시선으로 바라봤지만, 종리연의 안색은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이건 대체?”

아무리 봐도 타인의 죽음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크게 흔들렸다.

담호는 흑귀의 등에서 내려 시신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아직도 시신에서는 온기가 느껴졌고, 바닥에 고인 피도 완전히 굳지 않았다. 이들이 죽은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담호가 조금 더 자세히 살피기 위해 시신을 들췄다. 시신 등이 푸르뎅뎅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시신에서 순간적으로 악취가 느껴졌다.

“물러서요.”

갑자기 종리연이 크게 외쳤다. 그에 담호가 시신에게서 물러서며 종리연을 바라봤다.

“독이에요.”

“독?”

종리연의 말에 담호가 숨을 멈추고 뒤로 물러났다.

순간적으로 현기증이 찾아왔다.

처음 느끼는 아찔한 느낌에 담호의 신형이 잠시 휘청였다.

“벌써 중독됐어요. 이걸 복용하고 운공해서 독기를 몰아내야 해요.”

담호는 종리연이 내민 단환을 복용한 후 급히 운공을 하기 시작했다. 종리연이 준 것은 바로 제독단(制毒丹)이었다. 그녀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으로 어지간한 독 정도는 복용하는 것만으로도 해독할 수 있는 귀물이었다.

하지만 담호의 몸에 침투한 독은 어찌나 지독한지 제독단을 복용했는데도 전혀 사그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담호는 암혼심공을 운용해 독기를 몰아내려 했다. 순식간에 담호의 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들었다.

“지독하구나.”

담호처럼 강대한 내공을 가진 사람도 순식간에 중독 증상을 보일 정도의 극독이었다.

종리연은 품속에서 사슴 가죽으로 만든 장갑을 꺼내 손에 낀 후 제독단을 복용했다. 그것도 모자라 천으로 입과 코를 꼭꼭 막고 시체에 접근했다.

그녀는 방금 전 담호가 뒤집었던 시신을 살폈다. 시신의 등은 끔찍한 악취와 함께 벌써 녹기 시작했다. 마치 중독된 흔적을 지워 버리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종리연은 눈을 부릅뜨고 녹아내리는 시신을 노려봤다.

시각, 후각, 청각, 모든 감각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그녀는 조금이라도 더 독에 대한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독의 냄새, 시신이 녹아내리는 형태, 그리고 피의 색깔까지 꼼꼼히 폈다.

관찰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머리가 아파왔다. 중독 초기 증상이었다. 이 이상 가까이서 독을 관찰하는 것은 위험했다.

“후아!”

시신에서 급히 물러선 종리연이 사슴가죽 장갑을 벗어던졌다. 잠시나마 시신에 닿았던 사슴가죽 장갑의 끝이 어느새 녹색으로 변해 있었다.

조금만 더 시간을 끌었더라면 사슴가죽 장갑마저 녹아내렸을 정도로 독은 지독했다.

“미친!”

종리연이 급히 담호를 바라봤다.

담호의 운공은 최고조에 달했는지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현재 담호의 몸속에서는 독기와 내기 사이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평생 수많은 사투를 해 온 담호였지만, 흉험하기로 따지면 지금 그의 몸 안에서 벌어지는 독기와의 사투가 제일이었다.

보완을 거듭하면서 어느 정도 완벽하게 다듬어졌다고 생각했던 암혼심공이 독기에 취약하다는 것을 담호는 처음 알았다.

담호는 제독단의 도움을 받아 몸 안에 침투한 독기와 싸우면서 허실을 파악했다. 그리고 자신의 오만을 반성했다.

암형권, 독행류는 아직 완벽한 무공이 아니었다.

아직 보완할 점이 많은 미완성의 무공이었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 심득 한 구절이 떠올랐다.

‘무도(武道)는 무도(無道)구나’

왜 그런 생각이 떠올랐는지 몰랐다.

그저 불현듯이 떠오른 심상이었는데, 갑자기 그의 내기가 요동쳤다. 어항에 담긴 물처럼 크게 출렁이던 내기가 순식간에 꽈배기처럼 꼬이더니 그대로 독기를 향해 해일처럼 밀려갔다.

콰앙!

순간 담호의 몸이 들썩였다.

그의 코와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아!”

종리연이 눈을 크게 치떴다.

처음엔 담호의 내상이 크게 도진 줄 알았다. 하지만 담호의 코와 입으로 흘러나오는 피가 죽은피라는 사실을 깨닫고 안도의 표정으로 바뀌었다.

담호의 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지만, 흡입했던 독기를 외부로 배출한 것이 분명했다.

독기가 담긴 죽은피를 배출하고 나서도 담호의 운공은 끝나지 않았다.

후웅!

담호의 전신을 에워싼 공기가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종리연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 사람 또 진보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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