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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196화 (196/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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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화 7장. 독(毒)보다 독한 의지도 있다(3)

일전에 있었던 마교의 침공 이후 삭주 지부엔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인근에 있던 문파들에서 지원이 도착했고, 무림맹에서도 급히 지원 병력을 파견했다.

삭주 지부를 침공했던 마교의 무인들은 인근 항산(恒山)에 진을 치고 전력을 추스르고 있었다.

항산과 삭주의 거리는 이백여 리 정도에 불과했다. 경공이 뛰어난 무인이라면 하루 안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전운은 하루가 다르게 고조되고 있었고, 사람들의 얼굴엔 긴장감이 가득했다. 삭주에서 시작된 전운은 인근의 산음현은 물론이고 정양까지 번져 갔다.

삭주 지부에서 마교와 무림맹이 충돌한 소문은 현소 진인의 귀에도 들어갔다.

“허! 결국은 충돌하였는가?”

그가 탄식을 터트렸다.

마교와 무림맹의 충돌은 그가 있는 북계산에도 알려졌다. 당연히 현소 진인은 걱정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당장 아이들을 데리고 떠날 수도 없고…….”

그가 책임지고 있는 아이들만 십여 명이 넘는다. 그 정도 인원을 데리고 움직이는 것도 힘들뿐더러, 새로운 거처를 얻는 것은 더욱 힘들었다.

“휴!”

이래저래 현소 진인의 걱정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할부지.”

저 멀리서 하영이 아장거리며 걸어왔다. 근심이 한가득인 현소 진인이었지만 하영의 얼굴을 보는 순간 미소가 피어올랐다.

“왜 그러느냐?”

“쩌기…….”

“응?”

“따른 할부지가 있어.”

“다른 할부지?”

“응!”

하영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소 진인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그분에게 안내해 줄래?”

“응!”

하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현소 진인의 손을 잡았다. 조그만 손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따스한 온기에 현소 진인이 잠시 근심을 잊고 미소를 지었다.

하영은 아장거리며 현소 진인을 잡아끌었다.

“진짜요?”

“그게 정말이에요?”

하영이 안내한 곳은 청류곡의 초입이었다. 계곡물이 흐르는 그곳에 현소 진인이 보살피고 있는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누군가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허허! 정말이다 말고. 한번 보여 줄까?”

“네!”

“그런데 지금은 몸이 좋지 않아서 힘들겠구나.”

“에이! 역시 거짓말이었네.”

“허허허!”

아이들의 야유에도 너털웃음을 터트리는 노인.

현소 진인보다 십여 세는 족히 많아 보이는 노인의 머리카락은 마치 눈이 내린 것처럼 새하얗기 그지없었다.

노인은 옅은 미소를 지은 채 아이들을 바라봤다. 그런 그의 눈에는 따스한 빛이 가득했다.

노인이 문득 현소 진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이쿠! 이거 객(客)이 소란을 피워 주인께서 나오셨군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저는 천오경이라고 합니다. 근처를 지나다가 이곳 풍광이 아름다워 허락도 없이 들렸습니다.”

“아닙니다. 저 역시 잠시 기거하는 곳일 뿐, 대자연에 어찌 따로 주인이 있겠습니까?”

“허허!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본인을 천오경이라 밝힌 노인이 미소를 지었다. 현소 진인은 천오경의 말투와 눈빛에서 깊은 현기를 느꼈다.

‘그는 보통 사람이 아니구나.’

화산파의 사형들에게서도 느끼지 못한 깊이 있는 눈빛은 현소 진인에게 깊은 울림을 남겼다.

“바쁘시지 않으시면 차라도 한잔하시지 않겠습니까? 제가 한잔 대접하고 싶습니다만.”

“제가 폐를 끼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그럼 염치 불고하고 신세 좀 지겠습니다.”

천오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탈속한 풍모가 더욱 도드라졌다.

‘신선이 있다면 저와 같은 모습이겠구나.’

현소 진인이 천오경을 보며 내심 감탄했다.

그도 도를 추구하는 도사였지만, 천오경의 모습은 그가 생각하는 선인(仙人)의 풍모를 연상시켰다.

현소 진인의 곁으로 아이들이 몰려왔다.

아이들이 꺄르르 웃으며 떠들었다.

“저 할아버지 무지 웃겨요.”

“뭐가 그리 웃기더냐?”

“글쎄요! 하늘을 날수 있다지 뭐예요.”

“뭐?”

“웃기죠? 어떻게 사람이 하늘을 날아요? 그래서 날아 보라고 하니 지금은 힘들어서 안 되겠대요. 하하하!”

아이들이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천오경이 멋쩍은 뒤통수를 긁적였다. 현소 진인이 그런 천오경에게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아이들이 워낙 짓궂어서 곤란하게 했나 봅니다.”

“아닙니다. 오랜만에 순수한 아이들을 만나서 저도 즐겁습니다.”

“그렇게 봐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참! 도장의 도명은 어찌 되십니까?”

“제가 도사인 것은 어찌 아셨습니까?”

현소 진인의 얼굴에 이채가 떠올랐다. 지금 그는 도사복이 아닌 평복을 입고 있었다. 적어도 겉모습만으로는 그가 도사라는 사실을 알 수 없었다.

천오경이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현기를 뿌리는데 어찌 모르겠습니까?”

“현기요?”

현소 진인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천오경의 미소가 깊어졌다.

천오경의 미소를 잠시 넋 놓고 바라보던 현소 진인은 이내 자신의 실태를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무량수불! 저는 현소라고 합니다.”

“현소 진인이셨군요.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혹시 차 말고 곡주는 없습니까? 입안이 텁텁한 것이 곡주가 더 간절하군요.”

천오경의 말에 현소 진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작년 가을에 담근 매화주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매화주 좋지요.”

“담근 지 오래되지 않아 맛이 완전히 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드실 만할 겁니다.”

“하하! 이 늙은이가 오늘 운이 좋군요. 도장같이 현기가 가득한 분을 만난 것도 모자라 맛있는 매화주까지 얻어 마시게 되었으니. 이 보답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두 사람은 아이들을 데리고 거처로 돌아왔다.

천오경은 평상에 앉아 주위의 풍경을 즐겼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천오경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올렸다.

“좋구나. 좋은 곳이야.”

북계산 전체를 보면 삭막한데 이곳 청류곡만큼은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니 이보다 좋은 명당이 있을 듯싶었다.

그때 현소 진인이 매화주를 담근 술독을 들고 나왔다. 뚜껑을 열지도 않았는데 향긋한 주향이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안주는 따로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안주가 무에 필요하겠습니까? 이렇게 멋있는 풍광과 좋은 벗, 그리고 시원한 바람이 있는데.”

천오경의 말이 현소 진인의 가슴속 깊은 곳을 울렸다.

현소 진인은 망설이지 않고 술의 봉인을 뜯었다. 그러자 주향이 더욱 강렬하게 풍겨 나왔다.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나눴다.

서로의 신분도 정확히 모르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진정한 술꾼이란 그런 것이었다. 술맛을 아는 자들끼리 만나면 그 순간이 중요할 뿐이다.

현소 진인은 천오경에게 알 수 없는 친근함을 느꼈고, 천오경 또한 현소 진인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몇 순배나 술잔이 돌았을까?

두 사람의 얼굴에 어느새 붉게 물들었다.

“정말 좋구먼. 이렇게 아우님과 술잔을 나눌 수 있으니, 오늘이 내 인생에서 두 번째로 좋은 날인 듯하군.”

어느새 그들은 서로를 형, 아우라 부르고 있었다.

알고 보니 천오경이 현소 진인보다 스무 살 이상 많았기 때문이다. 천오경은 많은 나이만큼이나 모르는 것이 없었다.

천문, 지리, 도경, 군사 등 지식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 덕에 현소 진인이 그 어떤 주제를 꺼내든 간에 막힘없는 대화를 할 수 있었다.

현소 진인은 그런 천오경에게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제까지 평생 그가 만나 왔던 그 어떤 사람도 천오경만큼 그를 감탄시키지 못했다.

“형님은 정말 대단하십니다. 저 역시 형님과 교분을 나누는 오늘이 인생에서 두 번째로 좋은 날입니다.”

“자네도 그러한가? 첫 번째는 언제였는지 궁금하군.”

“제 제자를 받아들였을 때입니다.”

“허! 자네도?”

“그럼 형님도?”

“그렇다네. 나 역시 제자를 거뒀었지. 그 아이가 커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순간이었지.”

천오경이 술잔을 들이켰다.

하얀 수염을 따라 술이 살짝 흘러내렸다.

제자를 추억하면서 마시는 술은 각별히 맛있었다. 그것은 현소 진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담호를 생각하며 술잔을 들이켰다.

자연 두 사람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 또한 비슷했다.

현소 진인이 물었다.

“자네의 제자는 지금 어디 있는가?”

“글쎄요. 잘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지금은 어디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자유롭게 사는 모양이군.”

“자유? 진정으로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그런가? 나 역시 그렇다네. 그러고 보니 제자를 못 본 지도 벌써 사 년이나 지났군.”

“그럼 사 년 동안 제자를 보지 못했단 말씀입니까? 어찌 지내는지 궁금하진 않으십니까?”

“아무 소식 없는 것 보니 잘 살고 있겠지.”

“허허! 원래 그렇게 초탈하십니까?”

“세상만사가 내 뜻대로 되면 얼마나 좋은가? 다 큰 녀석을 언제까지 구속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어차피 짧은 인생, 제 뜻대로 살겠다는 것을 어찌 말릴까?”

“그래도 제자를 많이 믿으시는 모양입니다.”

“믿어야지. 많이 부족한 놈이지만 그래도 내 심득을 칠 성이나 이어받았으니.”

“그렇습니까?”

현소 진인이 천오경의 자부심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천오경이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쓸모가 있다고 데려갔으니 잘 쓰겠지.”

“네?”

“그런 게 있다네.”

천오경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런 천오경의 미소에서 현소 진인은 초강자의 여유를 봤다.

문득 현소 진인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비록 세상에 벽을 쌓고 지내는 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목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알고 있는 한 정파에 천오경 같은 분위기를 가진 무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현소 진인의 속내를 읽기라도 한 것처럼 천오경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아직 술이 남아 있지 않은가? 이런 좋은 술을 앞에 두고 골치 아픈 생각은 하지 마세. 그 후에야 어떻게 되든.”

“알겠습니다.”

“고맙네. 이해해 줘서…….”

천오경이 술잔을 들이켰다. 입안에서 매화향이 감돌았다.

현소 진인도 덩달아 술잔을 들이켰다. 천오경이 그런 현소 진인을 보며 말했다.

“자네도 이미 짐작하겠지만 나는 신교 출신이라네.”

“그……렇습니까?”

“그리고 자네는 화산파 출신이겠지? 그렇게 현묘하면서도 매화향이 가득한 선기는 오직 화산에서만 쌓을 수 있으니까. 참으로 불행한 일이야. 다 같은 강호인끼리 이렇게 싸워야만 한다는 것이.”

“형……님은 참전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신교도라고 해서 모두가 싸움을 원하는 것은 아니라네. 나같이 전쟁을 원치 않는 지파(支派)도 존재하지.”

“신교 내에 많은 지파가 존재하는 모양입니다.”

“그만큼 역사가 오래되었으니까. 강호인들이 알고 있는 신교의 모습은 그 일부분에 불과해. 사람들은 그 옛날 정마대전 당시 신교가 몰락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주전파(主戰派)가 몰락한 것에 불과해. 나머지는 건재해. 그리고 지금 주전파도 예전의 성세, 아니 그 이상을 회복했지.”

천오경이 현소 진인에게 잔을 내밀었다. 현소 진인이 천오경의 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그의 속내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했다.

마교 출신이면 마인이 분명할진대, 천오경의 모습은 선인을 방불케 했다. 실제로 그의 말투에도 기품이 담겨 있었다.

그런 천오경을 마교 출신이라고 해서 단순히 마인이라 부를 수 있을까? 정파 출신이라고 해서 다 정의로운 자라고 볼 수 있을까?

정파의 태두 중 하나인 화산파 내에서도 온갖 부조리한 것을 보았던 현소 진인이었다.

‘무엇이 정(正)이고, 무엇이 마(魔)인가?’

끊임없는 의문이 현소 진인의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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