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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197화 (197/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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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화 8장. 혼돈은 늪과 같아서 모든 것을 끌어들인다(1)

“휴우! 드디어 도착했구나.”

초연운이 저 멀리 보이는 삭주 지부의 정문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그를 따라온 백전문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길었습니다.”

“이제 숨을 돌릴 수 있겠군요.”

그들의 얼굴엔 피곤의 빛이 가득했다.

평소라면 격의 없이 농담을 주고받았을 그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시시껄렁한 농담도 건네기 힘들만큼 지쳐 있었다.

‘조자경.’

그 모든 것이 번천대와의 싸움 때문이었다. 특히 번천대주 조자경과의 싸움은 초연운을 한계까지 몰아붙였다.

결과는 양패구상.

승자는 없고, 패자만 있는 이 싸움에서 초연운과 조자경은 모두 중상을 입었다. 번천대와 백전문 제자들의 싸움도 마찬가지였다.

서로의 한계를 확인한 싸움 덕분에 그들이 느끼는 허탈감과 피로감은 장난이 아니었다. 때문에 이곳까지 오는 여정이 그 어떤 행로보다 힘들 수밖에 없었다.

“초 소협!”

삭주 지부에 들어가자 해소월이 초연운과 백전문의 제자를 가장 먼저 맞이했다.

“해 소저!”

초연운이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인연이 있다고 아는 얼굴이 반겨 주니 즐거웠다.

해소월이 초연운과 백전문 제자들의 초라한 행색을 보며 애처로운 눈빛을 보냈다.

“오는 길이 쉽지 않았나 보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그러는 해 소저도 만만치 않게 고생을 하신 것 같군요.”

초연운의 말에 해소월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대력패마(大力覇魔) 고산웅이 이끈 마교의 정예들은 삭주 지부에 큰 피해를 입혔다. 수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쳐서 삭주 지부는 초상집과 다름없는 우울한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죽은 이들 중에는 해남파의 무인들도 다수 있어 해소월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초연운도 그런 분위기를 느꼈다.

“하하! 이거 분위기가 너무 어둡군요. 이래서야 어디 마교의 침공에 제대로 대응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일부러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아무도 호응해 주지 않아 이내 머쓱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의 눈에 한 사람이 들어왔다.

“저 사람은?”

해소월의 시선이 초연운이 보고 있는 곳을 향했다. 그곳에 익숙한 사람이 보였다.

“화산파의 운경 도장이에요.”

“운경 도장이면…….”

“그 사람의 사형이에요.”

“음!”

“그 사람의 사부가 이 근처에 머물고 있어요. 화산파는 그분을 모셔 가려고 해요.”

“그런 거군.”

“그런 거예요.”

“흠!”

초연운이 손으로 턱을 문질렀다.

담호의 명성은 이미 천하를 울리고 있었다. 비록 강호 공적으로 지목되었다지만, 그를 영입해서 얻을 이익이 불이익보다 더욱 컸다.

담호를 외면했던 화산파가 이제 와 마음을 바꿨다고 해도 아주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운경이 누군가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보였다. 화산파의 일대제자인 운경이 고개를 숙이는 대상이 누구인지 확인하려 했지만, 아쉽게도 운경의 등에 얼굴이 가려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해소월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죠. 거처를 배정해 드릴게요.”

“예!”

대답을 하면서 초연운이 주위를 둘러봤다.

수많은 사상자가 나왔기 때문인지 삭주 지부의 공기가 유독 서늘하게 느껴졌다.

코끝이 간질거렸다. 얼마나 많은 이가 죽었는지 아직 지워지지 않은 혈향이 후각을 자극하는 것이다.

“젠장!”

“익숙해져야 할 거예요.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하니까.”

“시작?”

“저들의 전력이 계속 항산에 모이고 있어요. 그들의 전력이 다 모이는 순간 대침공이 있을 거예요.”

“이쪽에서 먼저 치면 되지 않나요?”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에요.”

“무슨?”

“여기 있어 보면 알 거예요.”

그녀의 말은 여러모로 많은 여운을 남겼다.

해소월은 씁쓸한 미소를 지은 채 걸음을 옮겼다.

***

“감사합니다, 종리 소저.”

창백한 얼굴의 무인들이 종리연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금무대에게 버림받고 마을에 남겨진 무인들이었다.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조금씩 생기가 돌아오고 있었다.

그것은 마을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독에 중독되어 생사를 오가던 그들의 얼굴에 핏기가 돌고 있었다.

“하!”

그제야 종리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밤 그렇게 필사적으로 노력한 끝에 종리연은 마을 사람들을 해독할 약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효과를 장담할 수 없기에 이제까지 긴장을 유지한 채 사람들의 상태를 지켜봐야 했다. 그 때문에 그녀의 피로도는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 종리연이 의자에 주저앉을 때였다.

“수고했군.”

등 뒤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종리연이 뒤돌아보자 담호가 보였다. 피투성이에 엉망이 된 담호의 모습을 본 순간 종리연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당신 그 상처는…….”

“별거 아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담호가 대답했다. 그런 담호의 모습에 종리연이 잠시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담호에게 다가갔다. 담호 앞에 서자 혈향이 훅하고 코끝을 자극했다.

너무나 짙은 혈향에 종리연이 살포시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그녀가 담호의 상처를 지혈하기 시작했다.

담호는 그런 종리연의 모습을 말없이 바라봤다. 마지막 상처까지 지혈한 종리연이 허리를 펴고 담호를 바라봤다.

“다 됐어요. 당신은…….”

종리연이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담호는 그런 종리연의 허리를 붙잡아 부축했다.

종리연이 극심한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혼절한 것이다. 담호는 그녀의 몸을 안아 든 채 침상으로 향했다.

푹신한 침상에 종리연을 눕히자 임이청의 아들이 다가왔다.

“누나는 괜찮나요?”

“괜찮을 거다.”

“다행이다.”

그제야 소년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

임이청이 뒤따라와 담호에게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신의 님이 아니었다면 저희 마을 사람들은 모두 죽었을 겁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임이청은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종리연이 아니었으면 마을 사람들은 모두 몰살을 당했을 터였다. 그녀가 마을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했는지 임이청은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원해서 한 일이야. 감사의 인사는 그녀가 깨어나면 직접 해.”

“그렇게 하겠습니다.”

임이청이 거듭 인사를 한 후 밖으로 나갔다.

그 후 찾아온 이는 금무대의 무인들이었다. 종리연의 도움을 받아 건강을 회복한 그들은 임이청처럼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런 그들의 머릿속엔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조장인 유진문과 동료들은 그들을 버리고 도주했는데 생판 남인 종리연에게서 구명받았기 때문이다.

금무대에 소속된 이후 그들의 자부심은 하늘을 찔렀었다. 자신들이 강호의 정의를 지키기 위해 선택된 사람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그들의 마음은 흔들리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이 정의이고, 강호를 위하는 길인지 헷갈렸다. 그래서 그들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금무대의 무인들이 나가고 나서야 담호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의 몸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외상도 심했지만,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내상이었다. 아직 사우연의 독을 완전히 몰아내지 못했다.

담호는 가부좌를 튼 채 암혼심공을 운공하기 시작했다. 그는 시간의 흐름도 잊고 운공 삼매경에 빠져들었다.

담호의 운공이 절정에 달해있을 때 종리연이 눈을 떴다.

종리연이 침상에 누운 채 눈만 끔뻑거렸다. 어떻게 자신이 이곳에 누워 있는 건지 영문을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곁에서 운공을 하고 있는 담호를 본 순간 그녀의 입가에 배시시 미소가 떠올랐다.

몸에 붙은 피딱지가 채 떨어지지 않은 담호의 모습은 흉신악살을 연상케 했다. 그런데도 무섭지가 않으니 이상했다.

종리연이 자신도 모르게 담호에게 손을 뻗다가 흠칫 멈췄다. 담호가 운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운공 중인 사람에게 함부로 손을 댔다가는 주화입마를 당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그 때문에 무림에서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절대 운공하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그만큼 나를 믿는단 건가? 이 사람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기분이 묘했다. 그래도 싫지는 않았다.

그때였다. 운공을 깼는지 갑자기 담호가 눈을 떴다. 두 사람의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놀란 종리연이 말도 못하고 눈만 끔뻑거렸다. 여전히 그녀의 손은 담호를 향한 채였다.

“이, 일어났어요.”

“…….”

“날씨 좋죠?”

밖엔 비가 내리고 있었다.

“…….”

할 말을 잃은 종리연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 그녀의 얼굴은 새빨간 홍시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담호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도 전신이 수백 개의 송곳으로 일시에 찌르는 듯 아팠다. 하지만 이 정도의 고통은 담호에게 너무나 익숙했다.

그가 물었다.

“몸은?”

“푹 찼더니 괜찮아요.”

“그럼 움직이지.”

담호가 밖으로 나갔다. 그에 종리연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그가 나간 문을 바라봤다.

“저 멍청이.”

종리연이 고개를 흔들며 침상에서 일어섰다.

말은 괜찮다고 했지만 몸이 무거웠다. 그녀는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겨우 뗐다.

밖에 나오니 담호가 어느새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종리연은 마음 같아서는 며칠 더 이곳에서 머물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한적한 산골 마을인 이곳조차 마교의 마수가 뻗쳤는데, 다른 곳이라고 안전할 리 없었다.

정마대전으로 인하여 세상은 더 혼란스러워지고 있었다. 늦기 전에 현소 진인이 있는 삭주로 가야 했다.

종리연이 해독했다고 하지만 중독되었었던 사람들은 아직 움직이기 힘들었다.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이 그들을 간호하느라 담호와 종리연이 마을을 떠나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나마 임이청 부자가 눈치채고 따라 나왔다. 두 사람은 그들의 배웅을 받으며 마을을 떠났다.

종리연이 뒤를 돌아보니 임이청의 아들이 힘차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종리연은 그에게 손을 흔들어 준 후 말을 달려 담호를 따라갔다.

오랫동안 마구간에 갇혀 있었던 분을 풀기라도 하듯 흑귀는 마음껏 질주했다. 담호는 흑귀에 몸을 맡긴 채 생각에 잠겼다.

‘사부는 무사할까?’

그가 가장 신경을 쓰는 것은 강호의 정의나 질서 따위가 아니라 사부 현소 진인이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현소 진인만 무사하다면 상관없었다.

담호의 뒤를 따르는 종리연의 눈빛은 무척이나 복잡했다.

“하아!”

눈빛만큼이나 복잡한 심경이 담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어쩌다 보니 담호와 동행하게 되었고, 헤어져야 할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이제 와서 담호와 따로 떨어져 행동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

‘어쩔 수 없지. 이렇게 된 이상 끝까지 함께 가는 수밖에.’

어느 순간 그녀의 눈빛이 단호해졌다.

담호를 태운 흑귀가 어느새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종리연이 말의 옆구리를 박차며 소리쳤다.

“같이 가요.”

그녀의 목소리가 바람에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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