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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198화 (198/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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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화 8장. 혼돈은 늪과 같아서 모든 것을 끌어들인다(2)

현소 진인은 평상에 앉아서 멍하니 해가 지는 풍경을 바라봤다. 아이들은 그런 현소 진인을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천오경이 아침에 떠난 후부터 현소 진인은 저런 상태였다. 마치 넋이 나간 사람처럼 하루 종일 저 모습 그대로 앉아 있었다.

몸은 이곳에 존재하지만 마치 영혼은 다른 곳에 존재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평소라면 아이들이 달려들어 귀찮게 굴었을 것이다. 하지만 무언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아이들도 현소 진인을 방해하지 않고 멀찍이서만 지켜보고 있었다.

현소 진인의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상념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수많은 상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고 사라지길 반복했다.

명멸해 가는 수많은 상념들.

현소 진인의 눈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산에 있을 때는 열심히 수양하면 언젠가는 신선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갈구하던 도(道)는 화산에 존재하지 않았다.

‘인간지도(人間之道).’

대신 그의 머릿속을 채운 화두였다.

제자를 잃고 화산을 내려와 세상을 헤맨 지 벌써 수 년이었다. 그동안 현소 진인은 수많은 인간 군상을 경험했다.

어떤 이들은 재물 욕심에 눈이 멀었고, 어떤 이들은 권력욕에 자아를 잃었다.

어떤 이들은 불행하게 살고, 또 어떤 이들은 분에 넘치는 행복을 누리고 산다.

‘무엇이 인간을 그렇게 가르는 걸까? 애초에 타고난 욕망이, 아니면 주변의 환경이…….’

그의 상념은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간절한 궁구(窮究)는 그의 정신을 아득히 먼 곳으로 데려갔다.

그곳엔 구름이 있었고, 발밑으로는 세상이 널려 있었다. 화산을 나올 때만 하더라도 그렇게 넓게 보였던 세상이 손바닥만 하게 보였다.

현소 진인이 더 높은 곳을 바라봤다.

그의 정신은 만족을 모르고 더 높은 곳을 향했다. 손을 뻗으면 그토록 간절히 원하던 세상의 이치가 잡힐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사제!”

차가운 목소리가 현소 진인의 상념을 송두리째 깼다.

세상이 바뀌었다.

눈을 뜨니 구름 위의 세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차가운 인상의 중년인이 보였다.

마치 검을 벼려 놓은 것처럼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인을 보는 순간 현소 진인의 입에서 탄식 섞인 음성이 흘러나왔다.

“현……검 사형.”

“오랜만이구나.”

외모만큼이나 차가운 음성을 내뱉는 이는 바로 화산제일검이라 불리는 현검 진인이었다. 그의 등 뒤로 운경이 송구한 표정으로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현소 진인이 아쉬운 눈빛으로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깨달음은 모래와 같아서 무심하게 그의 손가락 사이로 속절없이 흘러내렸다. 조금만 더 시간이 주어졌다면 무언가 얻었을 것 같은데 그의 손은 텅 비어 있었다.

언제 또 이런 순간이 올지 몰랐다. 어쩌면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

현소 진인은 아쉬움을 가벼운 한숨과 함께 털어 버리고 몸을 일으켰다.

“사형이 어찌 이곳에?”

“삭주에 왔다가 네가 이곳에 있다 해서 잠시 들렀다.”

“…….”

“언제까지 나를 세워 둘 것이냐?”

“앉으시지요.”

현소 진인이 평상 맞은편을 권했다. 어젯밤 천오경이 앉았던 그 자리였다.

천오경은 나타났던 것만큼이나 홀연히 사라졌다. 하지만 그가 현소 진인에게 남긴 여운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그와의 대화는 현소 진인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와 대화를 할 때는 무척이나 즐거웠는데, 현소 진인과 마주하게 되자 가슴이 턱 막혔다.

‘과연 마인(魔人)과 정인(正人)의 차이는 무엇인가?’

마교 출신인 천오경은 오히려 정파의 무인 같았고, 명문 화산파 최고의 검객이라는 현검 진인에게서는 마인처럼 패도적이면서도 날카로운 기세가 느껴졌다.

현검 진인은 검만큼이나 날카로운 눈빛으로 현소 진인의 전신을 훑어보았다.

“세월이 그만큼 흘렀는데 너는 예전 그대로구나.”

“사람이 어찌 변하지 않겠습니까? 저 역시 많이 변했습니다.”

“그 눈빛을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구나.”

“사형?”

“아직도 나를 원망하느냐?”

“…….”

“그런 모양이구나.”

현검 진인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그의 눈빛이 검처럼 날카롭게 현소 진인의 가슴을 후벼 파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그날의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

“사형!”

현소 진인이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현검 진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지금이야 천경의 특별함이 도드라져 보이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그 아이는 화산에 도움이 되지 않는 아이였어. 내가 아닌 누구라도 그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호의 명성이 천하를 뒤흔들지만, 사형은 여전히 그 아이를 인정하지 못하는군요.”

“나는 내 눈으로 본 것 외에는 믿지 않는다.”

“휴우!”

완고하기 그지없는 현검 진인의 모습에 현소 진인이 다시 한 번 한숨을 내뱉었다.

그의 사형은 여전히 고집불통이었고, 타인을 인정할 줄 몰랐다. 그런 고집이 현소 진인의 가슴을 답답하게 짓눌렀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먼저 깬 이는 현검 진인이었다. 한곳에 모여 앉아 두려운 눈으로 자신들을 바라보는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번엔 저 아이들이냐?”

“…….”

“천경도 그러더니……. 너도 참 한결같구나.”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을 거둔 것뿐입니다.”

“흥!”

“겨우 그 말을 하려고 오신 겁니까?”

“너를 데리러 왔다.”

“운경에게 분명히 말했습니다. 당분간은 돌아가지 않겠다고.”

“그래서 내가 왔다.”

“사형!”

“나도 이러긴 싫다만 장문인께서 너를 데려오라고 하시니 어쩔 수 없구나.”

“그런…….”

“아무리 부정해도 넌 화산파의 장로다. 그 사실을 결코 잊지 말거라.”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허나…….”

현소 진인의 시선이 아이들을 향했다. 아이들은 잔뜩 겁을 집어먹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행여나 버림받을까 두려운 감정이 그대로 전해져오고 있었다.

현소 진인의 눈빛이 단호해졌다.

“저 아이들을 두고 갈 수 없습니다.”

“넌 항상 쉬운 길을 두고 어려운 길을 택하는구나.”

현검 진인의 눈빛이 더욱 차가워졌다. 보통 사람이라면 감히 마주 보지도 못할 그 눈빛을 무공도 모르는 현소 진인이 감당하고 있었다.

그의 각오가 느껴졌다.

현검 진인은 한발 물러섰다.

“좋다. 저 아이들도 데려가마. 허나 화산파의 제자로 받아들이지는 않을 게야.”

“상관없습니다. 저 아이들이 원하지 않는다면 저 역시 화산의 품에서 키우지 않을 테니까요.”

“흥!”

현검 진인이 코웃음을 치며 뒤돌아섰다.

눈치만 보고 있는 운경이 보였다.

“현소와 아이들을 삭주 지부로 데려가거라.”

“허나 그곳은 너무 위험합니다.”

“그곳에서 바로 화산으로 출발할 거야. 하나도 위험할 것 없다. 내가 있는데 무엇이 위험하단 말이냐?”

“알……겠습니다, 사숙.”

운경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화산제일검인 현검 진인의 결정이었다. 그가 감히 토를 달 수는 없었다.

그의 눈에 겁을 집어먹은 아이들을 다독이고 있는 현소 진인이 보였다.

“휴우!”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

항산(恒山)의 다른 이름은 북악(北嶽)이다.

중원 오악 중 하나로 예전부터 군사 요충지로 유명했다. 동서로 사백여 리 늘어선 산맥은 북방의 이민족 침입을 막는 방파제 같은 역할을 했다.

예로부터 항산에는 항산파가 매우 유명했다. 한때는 구대문파를 넘볼 정도로 대단한 성세를 누렸었지만, 지금은 몰락해서 그 명맥만 겨우 유지하고 있었다.

옛 영화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그래도 예전의 성세를 증명해 주기라도 하듯이 커다란 전각 군들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수백 년을 이어 온 명문 항산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곳엔 항산파의 옛 영화를 찾겠다는 의지로 분주히 움직이던 문도들 삼백여 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항산파의 무인들이 연무를 하고 있어야 할 연무장엔 낯선 이들이 들어와 있었다. 하나같이 심상치 않은 기세를 발산하는 수많은 무인들.

세인들이 흔히 말하는 마교의 무인들이었다.

얼마 전 새벽 마교의 무인들은 항산파를 침공했다. 문주인 좌경학이 문도들을 이끌고 분전을 했지만, 마교를 당할 수는 없었다.

결국 좌경학과 문도 삼백여 명이 장렬히 산화했고, 그 자리를 마교의 무인들이 차지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마교의 전력은 속속 항산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 넓은 항산파의 전각들이 마교의 무인들로 가득 찼다. 때문에 항산파는 작은 마교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수많은 마교의 무인들 중에서도 유독 돋보이는 여인이 있었다. 마치 늪에 홀로 피어난 꽃처럼 눈에 확 띄는 미인은 바로 음유경이었다.

그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치맛자락이 사락사락 바닥을 스쳐 지나갔다. 많은 이들이 그녀에게 눈길을 주었다. 하지만 정작 음유경은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고고히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음유경의 머릿속은 무척이나 복잡했다. 그 때문에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흔히들 세상 사람들은 마교도라고 하면 마기를 줄줄이 흘리는 마인일 거란 편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모시는 신만 다를 뿐 마교도들도 평범한 사람이 더 많았다. 다만 무인들의 힘이 너무 강해 그들이 부각되지 않을 뿐이다.

수십 년 동안 세상의 끝에 몰렸던 사람들이다. 그들이 가진 원한은 너무나 커서 쉽게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마치 분출 직전의 화산을 보는 느낌이었다.

음유경이 붉은 입술을 질겅 깨물며 중얼거렸다.

“이래서 안 돼.”

“무엇이 안 된단 말이오? 성녀.”

그 순간 낯선 음성이 그녀의 말에 불쑥 끼어들었다.

음유경이 고개를 돌리니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마치 피처럼 붉은 무복을 입은 중년의 사내, 광대뼈는 툭 붉어져 나와 있었고, 매부리코 위로 붉게 충혈된 눈동자가 요사한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의 등 뒤로 천으로 둘둘 만 기다란 물체가 보였다.

마교에 수많은 무인들이 존재했지만 이렇게 뚜렷한 특징을 가진 무인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혈해판관 등천소.’

칠대마인의 일인이자 피에 미친 미치광이. 그 때문에 같은 마교 내에서도 등천소를 두려워하는 이들이 무척이나 많았다.

등천소가 물었다.

“묻지 않았소, 성녀. 무엇이 안 된단 말이오?”

“그냥 혼잣말일 뿐이에요.”

“그렇소?”

등천소가 붉은 눈으로 음유경을 빤히 바라봤다. 음유경도 지지 않고 그를 마주 바라봤다. 그러자 등천소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나저나 매우 오랜만에 돌아오신 것 같소. 그래도 명색이 성녀이신데 너무 격조하신 것이 아니오?”

“성녀라고 해서 꼭 신교에만 붙어 있으란 법은 없으니까요.”

“물론 그렇기는 하지만, 조금은 더 신경을 써 달란 뜻이오. 괜히 성물을 찾겠다고 천하만 떠돌지 마시고 말이오.”

“성물은 본교를 상징하는 신물이에요. 그런 물건을 찾는 일이 쓸데없는 짓이란 말인가요?”

“쓸데없는 짓이라고는 하지 않았소. 단지 성녀께서 너무 고생하시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오.”

“하나도 고생스럽지 않아요.”

음유경이 딱 잘라 말했다.

무안할 만도 하건만 등천소는 웃었다.

“역시 젊으니 기운이 넘치는 모양이구려, 알겠소! 성녀께서 괜찮다고 하시니 더 이상 말은 하지 않겠소. 부디 알아서 잘 처신하시길 빌겠소.”

“그러는 혈해판관이시야말로 부디 고약한 취미를 자제하시길 빌게요. 재미로 쌓는 살업은 결국은 화가 되어 돌아오기 마련이니까요.”

그 말을 끝으로 음유경이 걸음을 옮겼다.

등천소가 음유경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붉은 그의 눈에는 은은한 분노가 어려 있었다.

‘건방진!’

그의 어깨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마침내 음유경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등천소가 누군가를 불렀다.

“혈우.”

“예!”

홀연히 등 뒤에 나타난 붉은 무복의 사내는 바로 그의 심복이었다.

“저년을 감시해. 정말 저년이 성물을 찾게 되면 골치 아프니까.”

“알겠습니다.”

“그리고 누구를 만나는지도 알아내.”

“예!”

대답과 함께 혈우가 홀연히 사라졌다.

혼자 남은 등천소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성녀라고……. 웃기는군. 구시대의 유물 따위가 감히 교주의 행사를 막으려 하다니…….”

그때 누군가 그에게 다가왔다.

“무얼 그렇게 중얼거리십니까?”

이제 이십 대 후반이나 삼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청년이었다. 등천소는 감히 그를 경시하지 못했다.

“번천대주군.”

“오랜만입니다.”

포권을 취하는 남자는 바로 번천대주 조자경이었다.

“자네가 어찌 이곳에 왔는가?”

“빚이 있어서 말입니다.”

조자경의 시선이 삭주를 향했다. 그런 그의 눈에는 한기가 감돌고 있었다.

‘초연운.’

등천소가 그런 조자경을 보며 활짝 웃었다.

“마침 잘 왔군. 그렇지 않아도 저쪽에 인사나 가려했는데 말이야.”

“인사?”

“만나지 못했나? 소천산, 그 친구도 왔는데.”

“설마 십리무생(十里無生)?”

조자경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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