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권마-199화 (199/500)

 199

199화 8장. 혼돈은 늪과 같아서 모든 것을 끌어들인다(3)

현소 진인이 답답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사방 어디를 봐도 높다란 담장으로 둘러 싸여 있었다.

현재 그가 있는 곳은 삭주 지부 구석의 조그만 별채였다. 말이 별채지 출입구가 하나밖에 없고, 높다란 담장으로 둘러 싸여 있어 뇌옥이나 마찬가지였다.

현검 진인은 이곳에서 아이들과 함께 머물고 있으면 내일 아침 화산파의 제자들이 와서 화산으로 데려갈 거라고 했다.

그때까지는 꼼짝없이 이곳에 머물러야 했다. 불과 하루만 머물면 된다고 하지만 마치 닭장에 갇힌 것처럼 가슴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할부지.”

하영이와 아이들이 어미 닭을 찾는 병아리처럼 그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괜찮다. 괜찮을 게야.”

그것은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때 별채의 출입구가 열리고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현소 진인과 아이들의 얼굴에 긴장의 빛이 떠올랐다.

이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는 바로 초연운이었다.

초연운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현소 진인과 아이들에게 웃으며 인사했다.

“저는 백전문의 초연운이라고 합니다. 제자 분이신 담호와는 친구 사이니 그렇게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초연운?”

“그렇습니다. 담호와는 강호 초출 때부터 인연을 이어 왔습니다.”

“그런가?”

현소 진인의 얼굴에서 경계의 빛이 사라졌다.

“어서 오시게. 사정이 이렇다 보니 처음 보는 사람은 무조건 의심하게 되는군.”

“이해합니다. 저라도 그랬을 테니까요.”

“내 제자의 친구라니. 이렇게 보면서도 믿기지가 않는군. 그 아이가 친구를 사귀다니.”

“하하! 처음엔 쉽지 않았습니다. 아시다시피 그 친구가 워낙 까칠해서 말이죠.”

“음! 호가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지.”

“말도 마십쇼.”

초연운은 마치 오래된 인연을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넉살 좋게 말을 이어갔다.

담호와의 만남, 그리고 악양에서의 행보까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말했다.

현소 진인은 정신없이 초연운의 말에 빠져들었다.

자신이 모르는 제자의 삶. 그는 초연운의 말에 웃고 울었다.

해소월이 슬쩍 별채를 바라봤다.

초연운이 들어가고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도 초연운은 나올 줄 몰랐다. 그만큼 할 이야기가 많다는 뜻일 것이다.

“휴우!”

해소월의 붉은 입술을 비집고 옅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오늘따라 유독 마음이 편치 않았다. 연무장에 박혀 검이라도 마음껏 휘두르려고 했지만, 정신이 집중되지 않아서 관뒀다.

봄이 왔지만 아직 바람이 차가웠다. 해소월이 옷깃을 여미며 걸음을 옮길 때였다.

사사삭!

쥐 죽은 듯이 조용하지 않았다면 결코 들리지 않았을 나지막한 소음이 울려 퍼졌다.

“이건?”

해소월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뇌리를 엄습하는 불길한 느낌. 그런 느낌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쿠웅!

뒤이어 불길한 기파가 삭주 지부를 휩쓸고 지나갔다. 기감이 약한 사람들도 느낄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힘이 담겨 있었다.

“습격이다.”

“마교다. 마교가 습격해 왔다.”

뒤이어 사람들의 급박한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젠장! 야밤에 습격이라니.”

“어서 움직여.”

잠을 자고 있던 무인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무기를 든 무인들은 분개한 얼굴로 적들이 습격한 정문을 향해 달려 나갔다.

해소월도 정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녀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차가운 바람에 짙은 살기가 깃들었다.

“무척 긴 밤이 될 것 같구나.”

스릉!

그녀가 애검 벽상을 꺼내 들었다.

정문 근처에 도착하자 짙은 혈향이 느껴졌다. 예상대로 정문 근처에서 마교와의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둠 때문에 정확히 몇 명이 습격했는지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그나마 알 수 있는 것은 저들의 수가 무척이나 많다는 것이고, 또한 굉장히 강하다는 것이다.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무인들 대부분이 무림맹 측이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 악귀 같은 놈들!”

“모조리 죽엿!”

무림맹 무사들의 악다구니가 삭주의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하급 무사부터 삭주 지부장인 공손중까지 뛰어나와 적들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해소월은 적들과 어울려 싸우는 대신 어둠을 바라보았다.

어둠의 장막 뒤에 더 강한 이들이 대기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음습한 그들의 숨결이 그녀의 목덜미를 불길하게 자극하고 있었다.

‘진짜는 저들이야. 나머지는 이쪽의 반응을 보기 위한 미끼에 불과해.’

해소월이 벽상을 잡은 손에 힘을 준 그때였다.

“제법이군.”

어둠 속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순간 해소월은 어둠이 요동치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매부리코에 툭 튀어나온 광대뼈, 그리고 피처럼 붉은 무복을 입은 중년의 무인이었다.

무인의 몸에서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불길한 기운이 물씬 풍겨 나오고 있었다.

“당신은?”

“내 이름은 등천소라고 한다. 혹시 들어 본 적이 있느냐?”

해소월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등천소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유감이구나. 하지만 곧 알게 될 것이다. 이 혈해판관 등천소가 어떤 존재인지 말이다. 아, 너는 모르겠구나.”

“왜죠?”

“여기서 죽을 테니까. 죽은 자는 결코 소문을 들을 수 없는 법이지.”

등천소는 해소월을 죽은 자 취급하고 있었다.

해소월이 어금니를 꽉 깨물며 말했다.

“당신은 내가 누군지 아나요?”

“글쎄! 내가 알아야 하나?”

“알아야 할 거예요. 내 이름은 해소월이니까요.”

“호! 해중화(海中花)인가? 구무룡 중 하나가 여기 있었군.”

등천소의 눈빛이 더욱 섬뜩하게 빛났다. 그에 해소월이 잠시 움찔했지만 물러나지는 않았다.

등천소가 해소월을 향해 다가왔다.

“구무룡 중 하나라면 제물로 충분히 넘치지.”

“결코 쉽지 않을 거예요.”

“제법! 오만하구나. 젊다는 것이 좋기는 하군. 패기가 넘쳐흐르니.”

쿠웅!

등천소의 전신에서 강력한 패기가 발산된 순간 해소월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그런 그녀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강해!’

등천소는 이제까지 그녀가 상대해 본 그 어떤 무인들보다도 강력한 기파를 발산하고 있었다.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직감으로 느꼈다. 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앉아서 당해 줄 생각 따윈 없었다.

그렇게 그녀가 전의를 불태울 때였다.

“훌륭한 아이구나. 허나 상대가 아님을 알면 물러나는 것도 한 방법이다.”

해소월의 등 뒤에서 차가운 음성이 들렸다.

저벅! 저벅!

이어 나지막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해소월이 놀라 뒤를 바라보자 삭주 지부 안에서 한 중년인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아!”

“그는 내가 상대하겠다. 너는 다른 이들을 돕거라.”

얼음장처럼 차가운 얼굴과 그에 걸맞은 냉막한 분위기. 마치 검을 벼려 놓은 것 같은 날카로운 기세의 중년 남자.

그의 등장에 등천소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상대는 범상치 않은 기파를 발산하고 있었다.

현검 진인이 등천소를 보며 말했다.

“누가 사악한 마교도가 아니라고 할까 봐 어린아이를 핍박하는군.”

“너는 누구냐?”

“난 화산파의 현검이라 한다.”

“현검? 화산제일검?”

“그렇다.”

“호! 제법 거물이 튀어나왔군.”

그제야 등천소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드디어 급에 맞는 상대가 나온 것이다.

“어디 화산제일검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구경해 볼까?”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스릉!

현검 진인이 낡은 철검을 꺼내들었다.

여타 신병이기처럼 날이 서 있지도 않았고, 별다른 예기가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섬뜩하게 느껴졌다.

등천소도 세 자루의 검 중 하나를 꺼내 들었다.

츄화학!

현검 진인이 바람을 몰고 달려왔다.

카카캉!

검과 검이 부딪치고, 어둠 속에서 불꽃이 피어났다.

칼바람이 일어나 사위를 휩쓸어 갔다.

“으음!”

해소월이 급히 뒤로 물러났다.

등천소와 현검 진인.

두 사람의 무위는 해소월의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고 있었다. 그녀가 감히 끼어들 수 있는 상대들이 아닌 것이다.

해소월은 그들을 내버려 두고 다른 상대를 찾아 움직였다. 그리고 곧 상대를 찾았다.

그 역시 검을 무기로 사용하는 젊은 무인이었다. 그의 손에 죽은 무림맹의 무인이 벌써 다섯 명이 넘었다.

“챠앗!”

해소월은 망설이지 않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쉬악!

벽상이 푸른 검기를 토해 냈다.

“큭! 이게 무슨 난리야?”

초연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별채에서 한참 현소 진인과 대화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이 소란이 일어났다.

사제들이 어떻게 되었을지 걱정이 되기도 했고, 다른 사람들의 안위도 궁금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뛰어나가서 적들을 상대하고 싶었다. 하지만 현소 진인과 아이들은 무공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이대로 그들을 무방비 상태로 놓아 둔 채 혼자 뛰어나갈 수는 없었다.

“제발 버텨야 한다.”

그는 사제들이 무사하기만 빌었다.

고개를 돌리니 현소 진인을 중심으로 한데 뭉쳐 있는 아이들이 보였다. 겁에 질린 표정이 선명하게 보였다.

초연운이 현소 진인에게 애써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기는 제가 지킬 테니까.”

“고맙네!”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감사하실 필요 없어요.”

초연운은 공력을 끌어 올린 채 어떤 돌발 상황에도 대응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그때였다.

쉬아악!

일단의 무인들이 담을 뛰어넘어 왔다.

초연운이 이를 악물었다.

“야밤에 남몰래 담을 넘는 놈들치고 좋은 놈들은 없지.”

그들을 향해 팔황신권이 펼쳐졌다.

빠가각!

“크윽!”

“커읍!”

불청객들이 비명을 토하며 떨어져 내렸다.

순식간에 서너 명의 침입자를 처리했지만, 담을 넘은 자들의 수는 훨씬 많았다.

촤앙!

그들이 도를 뽑아 든 채 초연운과 현소 진인 등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악!”

“무서워! 할부지.”

살기 어린 그들의 눈빛에 아이들이 놀라 울었다. 현소 진인이 그들을 한데 끌어안으며 말했다.

“괜찮다. 괜찮을 게야.”

“으아앙!”

장내는 아이들의 울음소리로 순식간에 난장판이 됐다.

“칫!”

초연운의 악다문 입술 사이로 이빨 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이들을 헤칠 수 있을 것 같으냐?”

그가 팔황신권의 절초를 연이어 펼쳤다. 팔황신권의 가공할 위력에 침입자들이 주춤거렸다. 그러자 우두머리 무인이 소리쳤다.

“놈의 약점은 도사와 아이들이다. 먼저 그들을 제압하라.”

초연운을 상대하는 자들을 제외한 이들이 빙 돌아 현소 진인과 아이들에게 접근했다.

“제기랄!”

그 광경을 보면서도 초연운은 움직일 수 없었다.

적들은 마치 개떼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초연운은 그들에게 발목을 잡혔다.

그사이 현소 진인과 아이들에게 접근한 무인들이 칼을 휘둘렀다.

쉬악!

“멈춰라! 이 개새끼들아.”

그 순간 문을 부수고 일단의 무인들이 별채로 들어왔다. 그들은 현소 진인과 아이들을 보호하며 침입자들에게 맞섰다.

“사제들!”

그제야 초연운의 얼굴에 안도의 표정이 떠올랐다.

갑자기 나타나 현소 진인과 아이들을 보호하는 이들은 바로 그의 사제들인 백전문의 무인들이었다.

겨우 한숨을 쉴 수 있게 된 초연운이 침입자들을 보며 씨익 웃었다.

“씨팔! 네들 다 뒈졌어.”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