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
200화 8장. 혼돈은 늪과 같아서 모든 것을 끌어들인다(4)
음유경의 시선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앞에 있는 한 남자 때문이다.
수수한 옷차림의 촌부였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하나도 특별하지 않은 그런 사람. 그녀의 눈앞에 있는 중년인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나마 이질적인 풍경은 그의 손에 비파가 들려 있다는 것이다. 손때가 가득 묻은 무척이나 오래된 비파는 전설적인 한 사람을 상징하는 신물이었다.
비파를 한 번 튕기는 것만으로 십 리 안의 생명체를 멸절할 수 있다고 알려진 전설적인 무인.
그녀의 눈앞에 있는 촌부는 바로 십리무생(十里無生) 소천산이었다.
마교엔 수많은 무맥(武脈)을 이은 지파가 존재한다. 소천산이 이은 지파는 그중에서도 대량살상에 특화된 문파였다.
상성상 절대고수 간의 대결에선 다소 밀릴지 모르지만, 일반 무인들을 대량 학살하는 데 있어 그보다 더 효율적인 무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마교 내에서도 소천산은 매우 특별했다.
그는 그 어떤 절대고수보다도 전장에서 더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보다 무공이 강한 자들조차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소천산이 음유경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성녀.”
“소 대협까지 이곳으로 오다니. 교주의 명인가요?”
“그렇소.”
“하! 소 대협이 나서면 너무 많은 사람이 죽어요.”
“알고 있소.”
소천산이 펼치는 음공은 적아를 구별하지 않는다. 자칫 잘못하다간 무림맹뿐만 아니라 마교의 무인들도 떼죽음을 당할 수 있었다.
음유경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소천산의 표정은 여유로웠다.
“성녀의 걱정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소. 허나 걱정하지 마시오. 최근에 깨달음을 얻어 음공을 잘 제어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본교의 무인들이 내 음공에 피해를 입는 일은 없을 것이오.”
소천산이 살짝 고개를 숙이면서 음유경을 지나쳐 갔다.
성녀라서 어느 정도 존중은 해 주지만, 그 이상의 개입은 용납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태도였다.
그런 소천산의 모습에 음유경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명색이 마교의 성녀였지만, 그녀에겐 아무런 실권도 힘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저 상징적인 존재로 퇴색되어 가고 있을 뿐.
음유경이 전장을 바라봤다.
전격적으로 이뤄진 기습이었다. 성녀인 음유경조차도 이런 기습이 있을 거라는 사실을 통보받지 못했다.
교주가 그녀를 믿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배척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교주는 도대체 어디까지 가려는 것인가? 이러다간 신교와 중원 무림 모두 파국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음유경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성물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대로 수많은 이들이 죽는 것을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그녀가 전장으로 몸을 날렸다.
곳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미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거나 다쳤다.
문제는 아직도 전투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더 치열해지고 있었다.
음유경은 삭주 지부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몇몇 무인들이 그녀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저년도 마교도다.”
“죽엿!”
쉬이익!
그들의 검이 음유경의 요혈을 노리고 날아왔다. 음유경은 그들의 검을 가볍게 피한 뒤 검결지로 그들의 마혈을 짚었다.
마혈을 제압당한 무림맹의 무인들이 허수아비처럼 픽픽 쓰러졌다.
음유경은 바닥에 쓰러진 무림맹의 무인들을 뒤로 하고 삭주 지부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지부장을 찾아 경고를 해야 해.’
소천산이 십리멸절음을 펼치기 전에 지부장을 찾아야 했다.
그때였다.
“멈춰요.”
그녀의 앞을 한 여인이 가로막았다.
자주색 광목옷을 입은 수수한 차림의 여인. 은은한 푸른 기운이 감도는 눈썹과 머릿결, 그에 대비되는 새하얀 피부가 유독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바로 해소월이었다.
해소월의 옷에는 핏방울이 점점이 묻어 있었다. 그녀 역시 침입해 온 마교의 무인들을 상대로 분전하고 있었다.
해소월은 한눈에 음유경이 범상치 않은 존재임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음유경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들은 무림맹과 마교를 대표하는 여무인들이었다. 서로의 남다른 존재감을 감지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몰랐다.
음유경이 먼저 해소월을 알아봤다.
“해중화 해소월 소저군요.”
“그러는 그쪽은 누군가요?”
피잉!
음유경이 대답대신 해소월을 향해 검을 찔러 갔다. 해소월은 놀라지 않고 벽상을 휘둘러 전신을 보호했다.
따다다당!
두 여인의 검이 격돌하며 허공에서 불꽃이 튀었다.
음유경은 매섭게 검을 휘두르면서 입술을 달싹였다.
―십리무생 소천산이 곧 음공을 펼칠 거예요. 내공이 약한 사람은 심맥이 파열되어 죽을 테니 어서 사람들을 데리고 이곳을 빠져 나가요.
그녀의 전음이 해소월의 귀를 파고들었다.
‘무슨?’
―지체할 시간 없어요. 소천산이 음공을 펼치는 순간 이곳에 지옥이 펼쳐질 거예요.
음유경이 갑자기 검을 크게 휘둘렀다.
그녀의 성명절기인 낙월신검의 절초가 해소월을 향해 쏟아졌다. 해소월이 창해단파검(蒼海斷波劍)을 펼쳐 낙월신검에 대항했다.
뚜다다다당!
검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해소월의 호구에서 피가 흘렀다. 그만큼 음유경의 공격엔 막대한 역도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해소월은 결국 그녀의 모든 공격을 막아 냈고, 반격을 하려 했다.
“…….”
그러나 그녀는 그럴 수 없었다. 그렇게 매섭던 공격을 퍼붓던 음유경이 거짓말처럼 모습을 감췄기 때문이다.
공령운무행(空靈雲霧行).
음유경은 마교 내에서도 비전으로 전해지는 경공술을 펼쳐 장내를 빠져나갔다.
졸지에 홀로 남게 된 해소월이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가 음유경의 경고를 떠올렸다.
“십리무생이라니…….”
음유경의 말이 사실이라면 일대에 지옥도가 펼쳐질 것이다.
그녀는 급히 삭주 지부장인 공손중을 찾았다.
공손중은 휘하의 무인들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대체 지원 병력은 언제 오는 거야?”
“동문이 뚫렸다고 합니다. 그곳에 지원 병력을 보내야 합니다.”
“정문도 위태합니다. 동문에 보낼 여력이 없습니다.”
“백전문 있잖아. 그쪽에 지원 요청해.”
“그쪽은 지금 별채를 지키고 있습니다.”
“별채에 누가 있는데?”
“화산파의 현소 장로와 아이들이 있습니다.”
“빌어먹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늙은이를 뭐 하러 데려와서는…….”
공손중이 욕설을 마구 토해 냈다.
평소 누구보다 이성적이고 차분하다는 평가를 받던 공손중이었지만,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은 그에게서 냉철한 판단력과 이성을 앗아가 버렸다.
한밤중의 기습은 삭주 지부를 누란의 위기로 몰아넣고 있었다. 이대로 전멸을 당할 수 있다는 공포심이 공손중의 가슴을 스멀스멀 잠식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해소월이 공손중을 찾아왔다.
“지부장님!”
“또 무슨 일인가?”
공손중이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평소라면 예의 있게 해소월을 맞이해 주었겠지만, 지금 그는 최소한의 예의마저 잊어버리고 있었다.
“십리무생 소천산이 나설 거라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소천산? 그 음공으로 십 리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죽인다는 마인 말인가?”
공손중의 안색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렸다.
그도 소천산이 무림맹의 추적대를 어떻게 몰살시켰는지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 그렇다면 큰일 아닌가?”
“그렇습니다. 무공이 약한 자들을 뒤로 물려야 해요. 소천산이 음공을 펼치면 그들이 제일 먼저 죽을 거예요.”
“하지만…….”
해소월의 말에도 공손중이 머뭇거렸다.
고양이 발이라도 필요할 만큼 급박한 상황이었다. 무공이 약한 자라도 나름 쓸모가 있는데, 지금 빼 버리면 전황이 급속도로 기울어지게 된다.
공손중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금은 병력을 뺄 수 없네.”
“그러면 모두 죽어요.”
“그 정보는 어디서 들은 건가? 정말 십리무생이 이곳에 나타난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그리고 그가 나타나더라도 꼭 이쪽이 당한다는 보장은 없지 않은가? 그가 음공을 펼치기 전에 척살하면 되니까.”
“누가 그를 척살한단 말인가요?”
“자네도 있고…… 또 다른 이들이 도와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지 않겠는가?”
공손중의 말에 해소월은 속에서 무언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해소월의 무력이 후기지수 중 발군이라 해도 아직 칠대 마인 중 하나인 소천산에 비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소천산을 상대하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 섶을 지고 불길에 뛰어들라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지금은 전력을 뺄 수 없네. 그러니 자네가 소천산이 음공을 펼치지 못하도록 견제해 주게.”
공손중은 부끄러움도 잊고 그렇게 말했다.
다른 이들은 고개를 돌려 해소월을 외면하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들도 공손중의 말이 억지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워낙 전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어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를 위안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따라랑!
전장에 갑자기 청아한 비파음이 울려 퍼졌다.
비파음을 듣는 순간 모두의 얼굴이 경직됐다. 고막을 파고드는 미약한 비파음이 그들의 심령을 송두리째 흔들었기 때문이다.
“크음!”
“헉!”
공손중과 삭주 지부의 수뇌부들이 급히 공력을 끌어 올려 비파음에 대항했다. 그러자 흔들리던 심령이 안정을 찾았다.
그러나 모두가 그들처럼 내공으로 심맥을 보호한 것은 아니었다. 내공이 약한 자들은 갑작스러운 음공에 심맥이 찢어질 듯한 고통을 느꼈다.
“크아악!”
“살려 줘! 으아악!”
고막이 찢겨져 나가고 피가 흘러나왔다.
수백 명의 무인들이 싸우다 말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음공은 그들의 뇌를 휘젓고 있었다.
“크윽!”
“음!”
무림맹의 무사들을 상대하던 마교의 무인들조차 안색이 창백하게 변해 물러났다.
소천산 딴에는 음공이 무림맹의 무인들에게만 피해가 가도록 조절했지만, 마교의 무인들까지도 영향을 받은 것이다.
비록 무림맹의 무인들처럼 직접적인 공격은 받지 않았지만, 그들의 심맥도 영향을 받아 속이 울렁였다.
무공을 익힌 무인들이 그럴진대 평범한 일반인에 불과한 현소 진인과 아이들이 소천산의 음공에서 무사할 수는 없었다.
“허윽!”
“으와앙! 할부지.”
“아파!”
현소 진인의 얼굴에선 핏기가 사라졌고, 아이들은 고통에 몸부림쳤다.
“미친! 그만두지 못해.”
근처에서 마교의 무인들과 싸우던 초연운과 백전문의 제자들이 급히 달려왔다.
초연운과 몇몇 제자들이 현소 진인과 아이들에게 내공을 주입했다. 다른 제자들은 그들을 보호하며 마교의 무인들에게 대항했다. 당연히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제기랄!”
초연운의 얼굴이 보기 싫게 일그러졌다.
단 한 명의 개입이 상상을 초월하는 결과를 만들어 냈다.
소천산은 전장 한가운데 서서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그의 입가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비파를 탄주하는 손놀림이 점차 빨라지고 있었다. 그에 비파음이 점차 격렬해지고 있었다.
십리멸절음(十里滅絶音).
십 리 안의 생명체는 모조리 멸절시킨다는 음공이 그의 손을 빌어 펼쳐지는 것이다.
제대로 된 십리멸절음을 펼치기 위해서는 탄주가 최고조에 달해야 했다. 그리고 지금 소천산의 탄주는 최고조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모두가 신교를 위해서다. 천 명을 죽여 신교를 위한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면 그 모든 오욕은 내가 뒤집어쓰겠다.’
수많은 이들이 그의 탄주에 고통을 받고 있었다.
눈이 충혈되고, 머리가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이대로 조금만 더 시간이 흐른다면 뇌압에 그들의 머리가 터지거나 심맥이 찢겨져 나가고 말 것이다.
“멈추지 못하겠느냐?”
한참 등천소를 상대하던 현검 진인이 사자후를 터트렸다. 하지만 그의 사자후는 소천산에게 영향을 주지 못했다.
“놈!”
현검 진인이 소천산을 향해 검을 날리려 했다. 하지만 그 앞을 등천소가 막아섰다.
“흥! 어림없다.”
등천소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지금까지 보여 준 그들의 무력은 호각이었다. 물론 숨겨 둔 한 수가 있겠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여 준 모습은 그랬다.
그가 당장 현검 진인을 어찌할 수는 없었지만, 반대로 현검 진인 역시 숨겨진 한 수를 드러내기 전까지는 등천소를 어찌할 수 없었다.
등천소가 현검 진인의 앞을 막아선 채 소천산을 바라봤다.
“우리를 핍박한 자들이다. 망설이지 말고 단죄의 철퇴를 내리게, 천산.”
등천소의 목소리가 신호가 되었다.
소천산이 손가락이 마지막 한 음(音)을 튕기기 위해 벼락같이 내리꽂혔다.
따앙!
비파음이 천지를 울렸다.
가공할 음파가 폭풍처럼 전장을 휩쓸었다. 음파에 노출된 이가 심장을 부여잡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소천산 근처에 있던 이들이 먼저 피를 토했다.
순식간에 백여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소천산은 다시 한 번 죽음을 내리려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가 손을 내리치는 순간 그 몇 배의 목숨이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십리멸절음이 완성되는 그 순간 일대는 죽음의 대지가 될 것이다.
“아아!”
현소 진인의 눈이 벌겋게 충혈됐다. 그와 아이들의 고막이 터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나마 초연운과 백전문의 무인들이 내공을 주입해서 간신히 버티고 있었지만 그마저 한계에 달했다.
무너진 담장 사이로 소천산이 십리멸절음을 완성시키려 하는 모습이 보였다.
‘끝인가?’
현소 진인이 아이들을 품에 안은 채 눈을 감았다.
그의 양 볼을 따라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신의 한 목숨 죽는 것은 아깝지 않았지만, 아직 피지 못한 어린 꽃들이 이대로 떨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그를 비통하게 만들었다.
그 순간 전장에 기묘한 소성이 울려 퍼졌다.
스르륵! 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