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
202화 1장. 사부는 눈물을 흘리고, 제자는 사자후를 터트린다(2)
등천소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담호가 나타난 그 순간 위험을 느끼고 소천산을 도와주려 했다. 하지만 현검 진인에게 잡혀 그럴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소천산이 담호의 손에 죽는 모습을 무기력하게 지켜봐야 했다.
소천산은 결코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그는 마교의 무인들 중에서도 몇 안 되는 대량살상이 가능한 무인.
그 때문에 마교 내에서도 귀한 대접을 받던 존재였다. 그런 이가 별반 대항도 하지 못하고 담호의 손에 죽고 말았다. 마교로서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셈이었다.
한참 등천소와 어울려 싸우던 현검 진인에게도 담호의 등장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누구보다 담호를 인정하지 않던 현검 진인이기에 그가 받는 충격은 더욱 컸다.
그가 상대한 등천소는 소천산과 마찬가지로 칠대마인의 일인. 개개인 간에 약간의 무력 차이는 있겠지만, 그래도 동급으로 평가받는 무인이었다.
등천소와 호각을 이룬 자신과 달리 담호는 순식간에 소천산을 죽였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담호가 현검 진인을 압도하는 무력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할 만한 광경이었다.
현검 진인은 그런 사실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니, 인정할 수 없었다.
담호를 인정하면 그를 인정하지 못했던 자신의 삶을 부인하는 꼴이 되기에.
뿌드득!
누구의 입에서 먼저랄 것도 없이 이빨을 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실수를 깨달은 현검 진인과 등천소가 잠시 서로를 바라봤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등천소였다.
“계속할 것인가?”
“흥이 깨졌다. 오늘은 곱게 보내 주지, 마교의 주구.”
“그쪽이야말로 운이 좋은 줄 알도록. 권마만 아니었다면 오늘 삭주 지부에 살아 있는 존재 따윈 없었을 테니까.”
“입만 살았구나.”
“누가 입만 산 것인지는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겠지. 그나저나 그대의 삶도 단단히 꼬이겠구나.”
“무슨 뜻인가?”
“그걸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니겠지?”
등천소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담호를 바라봤다. 순간 현검 진인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그 짧은 순간 등천소는 현검 진인이 가지고 있는 어그러진 감정을 꿰뚫어 본 것이다.
“크흐흐! 적의 적은 같은 편이 될 수도 있음을 기억하라, 현검.”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세상에 절대란 없는 법이지. 의심생암귀(疑心生暗鬼)라. 의심을 품는 순간 마음속에선 귀신이 자라나는 법이지. 으하하!”
등천소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남기고 허공으로 몸을 뽑아 올렸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현검 진인은 칼날처럼 날카로운 눈으로 등천소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봤다. 싸우고 싶은 마음 자체가 싹 사라졌다. 현검 진인이 검을 거두며 뒤돌아섰다.
난장판이 되었던 전장은 어느새 수습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수많은 이들이 죽었지만, 그래도 삭주 지부는 건재할 수 있었다.
수천 명이 넘는 무인들을 동원하고도 위태로웠던 전장이 단 한 명에 의해 진정됐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무엇보다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 것은 위업의 당사자가 바로 담호라는 것이다.
‘감히 절름발이 따위가…….’
그의 눈에서 불길이 일어났다. 질시라는 이름의 불길이.
담호는 이미 별채 안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현검 진인은 별채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
“이놈! 호야!”
현소 진인이 담호를 힘껏 껴안았다. 그의 노안엔 뿌연 습기가 어려 있었다.
“사부!”
담호가 손을 뻗어 현소 진인의 등을 어루만졌다.
청수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뼈만 남은 앙상한 몸에 살가죽만 씌워 놓은 것처럼 삐쩍 말라 있었다. 그런데도 온기만큼은 여전했다.
언제나 따스하게 감싸 주던 품도 그대로였다.
담호가 눈을 감았다.
“잘 왔다. 정말 잘 왔어.”
현소 진인의 목소리가 담호의 가슴을 울렸다.
두 사람이 떨어진 것은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격정적인 감정이 가라앉자 현소 진인이 멋쩍은 표정으로 웃었다. 아무래도 눈물을 흘린 것이 못내 쑥스러운 모양이었다.
“저도 들어가도 될까요?”
그때 묘령의 여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바로 뒤따라온 종리연이었다.
현소 진인이 물었다.
“처자는 누구신가?”
“종리연이라고 해요. 이 사람과 함께 이곳까지 동행했지요.”
“오! 이런 귀한 인연이 있나.”
현소 진인의 말에 종리연이 배시시 웃었다. 현소 진인의 음성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힘이 담겨 있었다.
‘이분이 그의 사부라고? 제자는 그렇게 무서운데, 사부는 이렇게나 인자하다니.’
꽤나 모순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낯설기까지 한 그들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특히 현소 진인의 모습은 그녀의 가슴을 울렸다.
현소 진인에게서 몇 년 전에 죽은 사부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때 초연운이 다가왔다.
“하하하! 친구.”
“연운.”
“덕분에 살았어. 아주 죽는 줄 알았는데. 휴!”
그의 너스레에 현소 진인이 입을 열었다.
“초 소협이 우리를 보호해 주었단다.”
“고맙군!”
“친구 사이에 인사는 무슨……. 친구의 사부가 내 사부고, 내 사부가 친구의 사부지. 아, 이건 아닌가? 여하튼 당연히 해야 할 일이란 말이지.”
초연운은 두서없이 떠들었다. 그만큼 그도 흥분한 것이다.
담호가 그런 초연운을 신뢰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주위에 있던 백전문의 제자들은 담호를 경외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담호라는 이름과 권마라는 별호를 들었지만, 그가 저렇게 무서운 사람인 줄은 정말 몰랐다.
모두를 공포에 떨게 했던 소천산을 단숨에 격살한 그가 도저히 인간처럼 보이지 않았다.
‘저런 사람이 사형의 친구라고?’
‘정말?’
그들의 눈동자엔 믿을 수 없다는 빛이 역력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초연운이 위대하게 보였다. 단순히 담호의 친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말이다.
“훗!”
우월감을 즐기기라도 하듯이 초연운의 콧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갔다. 그런 초연운의 모습에 백전문의 제자들이 잠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현소 진인이 담호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낸 거냐? 분명 폭발로 모든 것이 매몰되었는데 어떻게 살아남은 것이더냐?”
담호는 천금마옥에서 어떻게 살아남았고, 어떻게 혼자 무공을 익혔는지 담담히 말했다.
현소 진인의 눈이 금세 붉게 물들며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가 모르는 담호의 삶은 너무나 위태해서 그런 지옥 같은 곳에서 홀로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담담한 담호의 말은 오히려 현실감을 생생하게 느끼게 했다. 그래서 눈물이 났다.
현소 진인과 아이들은 하염없이 울었고, 종리연과 초연운은 숨을 죽인 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어디서도 듣지 못한 비사였기에 그들이 느끼는 충격은 더욱 컸다.
“그래서…….”
그제야 초연운과 종리연은 담호의 거칠면서도 파괴적인 성격이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누구라도 빛 한 점 존재하지 않는 암흑에서 십이 년이나 홀로 생존한다면 그렇게 될 것이다. 솔직히 자신들이 그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진즉에 미쳐 버렸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살았습니다.”
“아아!”
마침내 담호의 긴 이야기가 끝났을 때 사람들이 참았던 숨을 터트렸다.
이번엔 담호가 물었다.
“왜 화산에 있지 않고 여기에 계신 겁니까?”
“너를 그렇게 보내고 화산에 있는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단다. 수많은 경전을 읽어도 마음속엔 오직 분노와 증오만이 가득했지. 그렇게 수많은 날들을 스스로를 파괴하며 보냈단다.”
그러던 어느 순간 이래서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말없이 화산을 떠나 천하를 주유했다.
수많은 이들을 만나고, 인간 세상을 경험했다.
“그리고 이 아이들을 만났지.”
현소 진인이 어미 닭의 품을 찾는 병아리처럼 자신의 주위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은 호기심과 경외심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담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담호는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바라봤다.
자신이 없는 시간 동안 아이들이 사부의 빈자리를 채웠다. 질투심 따윈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그때 가장 어린 하영이 담호에게 다가왔다.
“오……빠.”
담호가 무섭지도 않은지 담호의 무릎에 앉기까지 했다. 순진무구한 하영의 행동에 담호는 잠시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담호의 무릎에 앉은 하영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봤다. 유난히 크고 새까만 눈동자 안에 담호의 얼굴이 맺혀 있었다.
“하영이는 오빠가 쪼아.”
“내가 무섭지 않느냐?”
“안 무셔.”
“그래?”
“하나도.”
담호는 하영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하영이 기분이 좋은지 ‘헤헤’ 웃었다.
그것이 신호가 되었는지 아이들이 담호 주위에 몰려들었다.
“형!”
“담호 형!”
아이들이 앞을 다퉈 담호를 불렀다. 아이들이 목소리를 높이면서 장내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왁자지껄하게 변했다.
초연운이 백전문의 제자들과 눈빛을 교환했다.
“아무래도 자리를 비워 줘야겠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그들도 눈치란 것이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 그들이 끼어들 틈은 없었다.
그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종리연도 뒤따라 일어났다.
밖으로 나가기 직전 그녀가 담호를 잠시 바라봤다.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담호의 표정은 여전히 냉막했다. 하지만 담호와 오랫동안 동행해 온 종리연은 그의 표정이 평소와는 미묘하게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래도 저들이 있어 그가 한 가닥 인간성을 유지할 수 있겠구나.’
이상하게 안도감이 들었다.
지금은 저들을 위한 시간이었다. 종리연은 그들을 위해 기꺼이 밖으로 나왔다.
종리연의 표정이 살짝 굳은 것은 초연운 등을 따라 밖에 나온 직후였다.
별채 밖에 한 여인이 서 있었다.
자줏빛 광목옷을 입은 수수한 차림의 여인. 하지만 수수한 차림과 달리 그녀의 외모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초연운이 먼저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해 소저!”
“초 소협!”
초연운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아는 척을 하는 여인은 바로 해소월이었다.
해소월의 시선은 종리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담호와 함께 나타난 여인이었다.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그것은 종리연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침묵을 먼저 깬 이는 종리연이었다.
“전 종리연이라고 해요.”
“해남파의 해소월이라고 해요, 종리 소저.”
“반가워요, 해 소저.”
“담…… 대협과 함께 온 건가요?”
“어쩌다 보니 이곳까지 동행하게 되었네요.”
해소월의 얼굴에 살짝 균열이 갔다. 남자들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종리연은 그녀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그를 의식하고 있구나.’
지금 이 순간에도 해소월은 담호가 있는 방을 흘깃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 종리연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마음속에서 묘한 경쟁심이 생겨났다.
그때 두 사람 사이의 어색한 분위기를 느꼈는지 초연운이 일부러 활짝 웃으며 끼어들었다.
“자, 자!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자리를 옮깁시다. 술도 마시고, 이야기도 하고…….”
“술은 사형이 사시는 겁니까?”
“당연히 그래야지.”
그의 너스레에 백전문의 제자들이 동조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종리연과 해소월은 그들의 분위기에 휩쓸려 함께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굳은 표정을 풀지는 않았다.
일행을 이끌고 걸음을 옮기던 초연운이 문득 뒤를 돌아봤다.
‘행복한 시간 보내라구, 친구.’
그는 진심으로 담호와 현소 진인의 해후를 축복했다.